[오승욱의 만화가 열전]
[뒷골목 만화방] 미야자키 하야오 <책으로 가는 문: 이와나미 소년문고를 말하다>
2017-10-26
글 : 오승욱 (영화감독)
미야자키 하야오의 다음 만화책을 기다린다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청년이 책장 앞에 서 있다. 전쟁에 패망한 직후 일본 작가들이 소년, 소녀들을 위해 쓴 소설부터 동서양의 소년, 소녀 소설들이 총망라된 책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는 책장이다. 아마도 애니메이션 기획 자료로 구입한 모양인데, 아무도 읽은 흔적이 없는, 구입해서 처음 꽂아놓은 그대로의 책들이었다. 마침 애니메이션 스튜디오가 태업을 하는 분위기여서 별일이 없었던 청년은 책장 담당 여직원이 귀찮아할 정도로 매일 그녀에게 열쇠를 받아 책장을 열어 닥치는 대로 책들을 읽는다. 몇 페이지 보다가 재미없으면 집어치우고 또 다른 책을 집어들고 읽는다. 청년 미야자키 하야오의 모습이다.

청년 하야오는 책장의 소년, 소녀 문고를 읽으면서 ‘이 작가의 번역 덕분에 이렇게 아름다운 문장으로 이런 아름다운 외국 소설을 읽게 되었구나’ 감탄도 하고, ‘어릴 적 좋아했던 책 속의 그림들을 이런 작가가 그린 것이구나’ 하면서 새삼스럽게 소년, 소녀 소설을 다시 발견하고 매혹된다. <책으로 가는 문: 이와나미 소년문고를 말하다>는 지브리 스튜니오에서 비매품으로 만든 책으로 마야자키 하야오가 이와나미 소년문고에서 골라 추천한 50권의 책에 대한 간단한 코멘트와 미야자키 하야오가 읽었던 소년, 소녀 소설들에 대한 인터뷰를 정리하여 담아놓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에세이다.

삽화의 시대, 그러나 글만큼 그림도 중요했다

내가 어릴 때 보았던 소년, 소녀 문고의 책들은 주로 일본에서 출판된 문고를 참고 또는 표절해서 번역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소년, 소녀 문고라 하면 소년, 소녀들을 위해 처음부터 쓴 <강소천 소년 소녀 문학> 같은 보물도 있지만, 어른들의 소설을 소년, 소녀들이 읽기에 부담이 없도록 적당히 추리고 첨삭하여 만든 책들이라 입문용 정도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었다. 어린시절 소년, 소녀 문고로 읽었던 <몬테크리스토 백작>과 <보물섬> <해저 이만리> 같은 소설은 나중에 성인이 되어 완전판을 읽고 어릴 때 읽은 소년, 소녀 문고로 그 작품을 읽었다 말할 수는 없다고 느꼈다. 심지어 소년, 소녀들을 위해 쓴 외국 원작들마저 우리나라 현실에 맞게 삭제와 변형을 거쳐 출판된 책이 한두권이 아니었다. 그러니 소년, 소녀 문고는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당시 어른들의 감시와 통제에 의해 만들어진 기형에 가까운 물건이란 생각이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렇게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두꺼운 하드커버의 아름다운 장정과 책표지에는 책의 내용을 한눈에 알아차릴 수 있는 멋진 그림이 있었다. 글만 있는 페이지를 몇 페이지 읽다보면 지금까지 읽은 내용에 상상력을 더하거나 박진감을 주는 오아시스 같은 그림이 한 페이지에 그려져 있다. 교학사의 <세계 전래 동화 선집>의 그림들에는 상당히 유니크한 것이 많았는데 고등학생이 되어서 이 책의 그림들이 한국 화단의 중진들이 그린 삽화여서 아무렇게나 일본 책을 훔쳐서 출판한 것만은 아니었구나 하고 생각한 적이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 역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어서 소년, 소녀 문고의 책 이야기의 반 이상은 책 속에 그려진 그림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지금은 책 속에 그려진 그림을 일러스트라 부르는 시대지만 내가 어렸을 때에는 한국에서는 책 속에 그려진 그림을 삽화라 불렀고 삽화란 어느 정도 무시의 뜻이 담겨져 있었다. 책이란 작가의 사상이 담긴 어마어마한 것이고 그 곁다리에 그림이 들어가 흥미를 잃지 않게 하려는 것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미야자키 하야오는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저 멀리 날려버리고 오히려 책 속의 이야기보다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말한다. 나로서는 전혀 알 수 없는 작가들의 독특한 그림들의 세계가 펼쳐지고 미야자키 하야오는 그 그림들의 매력에 대해 설명한다. 19세기에는 이야기 책 속에 호화로운 장정을 위해 일러스트들이 등장하고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일러스트가 글을 압도하는 경우도 있었다.

만화가 미야자키 하야오의 예고

애니메이션 감독이기도 하지만 미야자키 하야오는 만화가다. 그가 그린 장대한 서사극 <바람계곡의 나우시카>(1984)는 기존 만화와는 다른 컷의 구성과 이야기가 놀라워 애니메이션 감독의 첫 장편만화라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재미있는 걸작이다. 만화와 그림을 사랑하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자신이 그린 일러스트가 담겨 있는 이야기책을 안 만들었을 리 없다. 연필과 수채화 물감만으로 그린 일러스트가 들어가고 글이 담겨 있는 <슈나의 모험>이란 작품이다. 소년과 소녀가 사막을 횡단하는 장대한 모험담은 일종의 스토리보드이기도 하고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림으로 그린 시나리오이기도 하다. 소년, 소녀 문고에 담긴 아름다운 일러스트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고 미야자키 하야오는 에세이의 2부에서 바람에 대해 이야기한다. 1923년 관동대지진이 일어나기 며칠 전부터 불던 기분 나쁜 바람은 땅을 상처 입은 뱀처럼 요동치게 하여 불바람과 피바람을 일으켰다. 지진을 몰고 온 바람은 멈추지 않고 전 국민이 학살자가 되어 미쳐 날뛰게 했고 종국에는 원폭의 바람으로 모든 것이 재가 되어버렸다. 그 당시 어린 미야자키 하야오는 아버지 등에 업혀 철도의 둑 위에 올라서서 멀리 불타오르는 시내에서 불어오는 후끈한 독기의 바람을 맡았던 걸 기억한다. 그 후 다시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책으로 가는 문: 이와나미 소년문고를 말하다> 146쪽에서 말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 시대의 바람’이란 “상쾌한 것이 아니고 무섭고 요란하게 지나가는 바람이며 죽음을 안고 독을 품은 바람이다. 인생을 뿌리째 뽑으려는 바람”이다. 마치 나우시카가 사는 마을에 불어 닥쳐 사람들의 폐 속에 죽음을 차곡차곡 쌓는 그런 바람이고 모두를 피범벅의 전쟁으로 내모는 바람이다. 그것은 2011년 3월 11일의 바람이다. 그 바람은 동일본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그치지 않고 타자들에 대한 혐오와 증오를 실어나르고 살아가기 어려운 시대의 개막이며 파국은 전세계적 규모가 돼 있다고 말하며 이제 판타지를 만들 수 없는 시대라 한다.

몇해 전 그가 여러 번의 은퇴와 복귀를 거듭하고 이번에는 진짜 마지막이며 진짜 은퇴한다고 선언한 후, 이제는 만화를 그리겠다고 발표한 후 열심히 책상 위의 종이에 코를 박고 만화를 그리는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 나는 그가 바람에 대한 만화를 다시 시작한다고 상상했고 이제 다시 그가 그린 만화를 볼 수 있겠구나 하며 기대했었다. 그런데 다시 은퇴를 번복하고 복귀선언을 했다. 나는 속으로 ‘은퇴 후 그린다던 그 만화는!’하면서 실망했다. 아무리 훌륭한 전쟁보다 어리석은 평화가 더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미야자키 하야오 할아버지의 만화는 언젠가 꼭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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