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호 에디토리얼에서 얘기했던 ‘남배우A 성폭력 사건’이 항소심에서 유죄로 판결된 후, 이번 사건의 공동대책위원회가 지난 10월 24일 유죄판결을 환영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이번호 18쪽 포커스 ‘#STOP_영화계_내_성폭력, 싸움은 계속된다’ 참조). 예상대로 피해자 여배우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편지를 통해 심경을 전했다. 내용 중 “연기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 성폭력 피해자들과 연대하는 나의 방식”이라는 대목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역시 지난호 에디토리얼에서 언급했던 그 여배우가 곽현화와 만난 자리에서도 그랬다. “여성 영화인들이 제보하고 폭로할 때는, 사실 업계를 떠날 각오까지 하고 그러는 것이다. 하지만 끝까지 살아남아 활동하는 걸 보여주고 싶다”는 것이 그날 모두의 다짐이었다.
하지만 유죄판결 환영 기자회견 다음날, 인터넷 언론 <디스패치>에서 마치 남배우의 억울함을 대신 풀어주는 것 같은 기사를 썼다. 입수한 메이킹 필름의 캡처 화면을 써가며, 심지어 법영상분석연구소에 행동분석까지 의뢰해서는 성폭행 장면에 대해 대놓고 남배우를 옹호하고 있었다. 마치 SBS 시사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가 경찰 대신 현장검증을 하는 것처럼, 저열한 ‘그알 놀이’를 하고 있었다고나 할까. 어차피 메이킹 필름 자체도 한 각도의 시선만을 제공할 뿐인데(지금 당장 열리고 있는 프로야구 한국시리즈에서도 ‘비디오 판독’에 방송사 중계 카메라 6대와 한국야구위원회 자체 카메라 3대가 찍은 영상을 활용한다. 그럼에도 오심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그들의 어처구니없는 전지적 시점 분석은 차마 읽어줄 수 없는 수준이었다. 요약해서 ‘강제 추행을 당하는 피해자의 얼굴이라 할 수 없다’, ‘빠져나올 방법은 많다’라는 식의 지적은, 그 기사 자체가 피해자를 두번 죽이는 성추행이라 해도 틀리지 않다.
그렇다면, 굳이 기자회견 직후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개인적으로 예상하건대, 항소심 첫 공판부터 재판부가 ‘피해와 관련된 사실관계 파악에 집중하겠다’고 선언한 후, 원심의 무죄를 깨고 항소심에서 유죄가 선언된 이 사건이, 사실심이 아닌 법률심인 3심 상고심에서 뒤집힐 가능성은 (물론 원심과 항소심의 판단이 같았던 것이 아니기에 속단할 수는 없지만) 별로 없으리라 생각된다. 그래서 추측건대, 남배우의 기자회견도 그렇고 <디스패치>의 기사도 그렇고 순전히 승소한 여배우를 흠집내기 위한 의도가 아닐까 싶다. 악질적인 2차 가해라고나 할까. 뒤집힐 가능성이 없을 수도 있으니 감독까지 끌어들여 억울하고 힘없는 배우 코스프레를 하면서 고춧가루나 뿌리겠다는 못된 심보나 다름없다. 결과적으로는 남감독과 남배우가 여배우 몰래 몰래카메라를 찍어놓고는 급기야 자기네들끼리 싸우고 있는 꼴이다.
어쨌건 사람들이 간과하는 것은, 그 영화는 처음부터 ‘15세 관람가’였다는 것이다. 감독의 유연하고 즉흥적 연출이든, 메소드를 선호하는 배우의 과몰입 연기이든 간에, 촬영현장에서 넘어서는 안 되는 당연한 선이 있다. 여배우는 그렇다는 것을 확인했고, 그래서 출연하기로 결정했다. ‘청소년 관람불가’였다면 처음부터 출연을 고려하지 않았을 거라고도 했다. 그리고 상대배우와 사전에 합의되지 않은 19금의 폭행 연기가 ‘업무로 인한 행위’라는 이름으로 둔갑하며 부상까지 입고는 고통의 나날을 보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감독과 남배우 그 누구도 아직까지 진심으로 사과하지 않았다. 사건을 키운 것은 그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