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이미지의 최전선. 삶 전체를 관통하는 단면을 기어이 포착해내 10여분의 짧은 영상 속으로 옮겨담는 카메라의 시선은 영상매체로서는 아주 전통적이고 또 그래서 더욱 전복적인 시도를 꾀할 수 있다. 단편영화의 매력은 거기에서 나온다. 올해로 15회를 맞이하는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AISFF, 이하 아시프)의 메인 포스터 전면에 꽉 들어차 있는 보름달의 이미지가 보여주는 의미도 실은 영상의 길고 짧음에 상관없이 우주 만물을 담아낼 수 있다는 포부가 아닐까. 11월 2일부터 7일까지 6일간 씨네큐브 광화문과 CGV피카디리1958에서 열리는 이번 영화제에서는 총 125개국 5452편이 출품된 가운데 국제경쟁부문에서 총 31개국 47편, 국내경쟁부문에서 총 13편을 최종 선정했다. 올해 15회를 맞이해 수상 부문에 약간의 변화를 꾀했는데 기존 수상 부문에 더해 한국영화아카데미의 후원으로 ‘KAFA상’이, 티캐스트 협찬으로 국내경쟁에 한해 수상하는 ‘씨네큐브상’이 추가로 신설됐다. 국내외 경쟁부문을 비롯해 올해 영화제에서 다양하게 준비한 특별전을 소개한다.
개막작
<골수팬> The Clap_제프 린지 / 영국 / 2005년 / 12분
올해 개막작으로 선정된 제프 린지 감독의 <골수팬>은 교향곡과 소나타가 끝날 때마다 가장 먼저 박수를 치려는 강박관념에 빠진 클래식음악 골수팬에 관한 영화다. 영웅처럼 떠받들던 어느 피아니스트의 연주회에서 그는 누구보다 먼저 곡이 끝나자마자 박수를 치는 것으로 삶의 위안을 삼는데, 그의 박수 소리에 피아니스트가 노이로제에 걸린다. 결국 피아니스트는 자신의 골수팬이 곡이 끝나는 지점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묘책을 짜낸다. 제4회 아시프 국제경쟁부문 관객심사단상 수상작으로, 예술가와 팬의 기묘한 관계에 대한 우화다.
<내 인생의 물고기> The Fish of My Life_율리우스 시쿼우나스 / 리투아니아 / 2014년 / 5분39초
또 한편의 개막작 <내 인생의 물고기>는 제12회 아시프 국제경쟁부문 심사위원특별상과 관객심사단상을 수상한 작품. 옛날 옛적 외딴곳에 농가가 한채 있었다. 그곳에는 두 노인이 살았다. 아주 오래전에 두 사람은 진심으로 사랑했지만 이제 그들에게 삶은 그저 무의미한 일상일 뿐이다.
아시프 15주년 특별전(Play It Again, AISFF!)
올해 영화제에서 준비한 의미 있는 특별전은 바로 지난 14년간 영화제에 초청돼 수상했던 주요작 7편을 다시 볼 수 있는 ‘아시프 15주년 특별전’(Play It Again, AISFF!)이다. 오랫동안 아시프를 찾은 관객에게는 반가운 이름들을 찾는 재미가 있을 것이다. 개막작으로 선정된 두편을 비롯해 제1회 대상작이었던 로사리오 가르시아 몬테로 감독의 <외로우세요?>는 모두 추억의 영화다. 제5회 대상작 <소년과 TV>(2006)의 루마니아 출신 라두 주드 감독은 2015년에 장편 <아페림!>으로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은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을 올해 아시프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 이렇게 한 영화감독의 뿌리를 찾아가는 흥미로운 여정이 이번 특별전을 즐기는 묘미 가운데 하나다.
시네마 올드 앤 뉴
오랜 영화 팬들이 가장 주목할 만한 섹션이다. ‘시네마 올드 앤 뉴’ 섹션은 아시프의 전통적인 특별프로그램이다. 올해에도 역시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감독들의 단편영화 3편을 초청했다. 최근에 신작 <빛나는>으로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은 가와세 나오미 감독이 가장 최근에 만든 단편 <패러렐 월드>가 국내 최초로 소개된다. 프랑스 배우이자 감독인 루이 가렐의 2010년작 <어린 재단사>(2010)도 이번 섹션에 초청됐다. <가장 따듯한 색, 블루>와 <007 스펙터>로 국내에도 많은 팬을 보유하고 있는 배우 레아 세이두가 주연을 맡았다. 섹션명에 어울리게 과거의 작품을 볼 기회도 마련했다. 데뷔작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를 연출하며 주목받은 안국진 감독의 단편 <더블 클러치>를 통해서는 15주년 특별전 섹션에서 만나보는 작품들처럼 안국진 감독의 연출 세계의 근원을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폴란드 애니메이션의 세계
‘폴란드 애니메이션의 세계’ 특별전은 폴란드의 크라쿠프 영화재단과 아시프가 함께 준비한 섹션이다. 이 섹션에서는 멀게는 1950년대부터 가깝게는 2010년대까지 폴란드 애니메이션의 역사를 한눈에 조망해볼 수 있는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칸국제영화제, 베를린국제영화제, 아카데미 시상식, 오버하우젠국제단편영화제, 안시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 등 각종 해외 영화제에서 초청받은 작품들뿐만 아니라 독특한 스타일을 앞세워 실험적인 성과를 이뤄낸 작품 위주로 선정했다. 이 섹션에서 소개되는 총 21편의 영화 중 브워지미에시 하우프, 할리나 비에린스카 감독의 <위병 교대식>(1958), 얀 레니차 감독의 <미로>(1961), 비톨드 기에르슈 감독의 <적과 흑>(1963) 같은 과거의 애니메이션은 당시로서는 놀랍고 독창적인 아날로그 기법을 선보였던 작품들로 기괴하면서도 현실적인 주제를 담고 있는 작품을 만날 수 있다. 미로스와프 키요비치 감독의 <감방>(1966), 리샤르트 체칼라 감독의 <점호>(1970) 등은 교도소와 수용소 등을 배경으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묻는 작품이다. 2010년대 이후 작품들은 최근의 영화들보다 현대화된 기법으로 거대화된 세계보다는 미시적인 주제로의 접근이 많아지고 있는 경향을 알 수 있다. 한편 상영작 관람 외에 영화제 기간 중에는 크라쿠프예술대학의 애니메이션학과 학과장을 초청해 폴란드 애니메이션에 대한 역사와 함께 학과 과정도 들을 수 있는 워크숍이 준비되어 있다.
숏쇼츠필름페스티벌 & 아시아 컬렉션
아시프에서는 올해에도 일본 최대 국제단편영화제인 ‘숏쇼츠필름페스티벌 & 아시아’와 함께하는 상호 교환 프로그램으로 특별전을 꾸렸다. 이 섹션에서는 2017년 숏쇼츠필름페스티벌 & 아시아에서 주목받았던 다양한 장르의 최신 일본 단편들을 만날 수 있다. 미래의 도쿄에서 공부와 운동 사이에서 갈등하는 아이의 고민을 담은 하리우 유지 감독의 <12월 17일>, 택시운전사와 소녀, 배낭여행객 등 3명이 도쿄에서 우연히 한 여자와 동시에 조우하면서 벌어지는 마카베 유키노리 감독의 <제2의 고향>, 막 나가는 연출력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숫총각 DJ ‘DJ 마츠나가’와 촌뜨기 MC ‘Rated-R’로 구성된 크리피 넛츠가 춤으로 세계를 평정하는 내용의 뮤직비디오, <남우조연상>, 소년, 소녀의 잊을 수 없는 순간을 다룬 고가하라 다케시 감독의 <나기사>, 탁구를 통해 우울한 현실을 잊는 여자의 기이한 환상 세계를 다룬 다나카 요이치 감독의 <핑팡>, 사이렌 소리에 얽힌 이웃간의 정을 다룬 미야케 노부유키 감독의 <사이렌> 등 총 6편의 작품이 소개된다. 모두 현재 일본 영화인들의 재기발랄한 개성을 만날 수 있는 작품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