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윗선에 보이기 위한 요식행위인 줄로만 알았다. 투자심사 과정에서 그들에게 거부권이 없었고, 그들이 특정 프로젝트를 거부했다고 해서 본투자심사를 통과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는 얘기도 있어 모태펀드 외부 전문가 풀이 투자심사에 그다지 영향력을 끼치지 않았을 거라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씨네21> 1127호 포커스 ‘국정원 개혁 반대 법조인부터 공안검사 출신까지’에서 모태펀드 외부 전문가 풀 전량이 공개되자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접근하기로 했다. 문화·영화산업과 무관한 인사 19명으로 채워진 문화·영화계정의 모태펀드 외부 전문가 풀의 면면을 처음부터 다시 살펴보았다.
2015년 4월경, 영화진흥위원회측에서 영화계정 외부 전문가 풀은 문화체육관광부가 구성한 외부 전문가 풀로 갈음한다고 통보해왔다.”_한국벤처투자
“현 출자사업 담당인 창작지원팀은 인사이동으로 2015년 7월부터 해당 업무를 시작해 이후 외부 전문가 풀 사용 및 추천과 관련하여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벤처투자와 요청, 협의한 사실이 없다.” _영화진흥위원회
“업계 및 학계 전문가로부터의 추천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하여 (외부 전문가 풀) 명단을 구성한 것으로 알고 있으며, 정확한 루트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_문화체육관광부
삼자대면이라도 해야 할 판국이다. 박근혜 정권의 모태펀드 외부 전무가 풀에 속한 19명이 문화·영화산업과 무관한 교수, 변호사들로 구성됐다는 사실이 <씨네21> 보도(1127호 포커스 ‘국정원 개혁 반대 법조인부터 공안검사 출신까지’ 참조)를 통해 확인되자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 한국벤처투자(이하 한벤투),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는 서로 책임을 전가하며 오리발을 내밀고 있다.
정치적으로 보수인, 영화의 ‘비전문적 전문가들’?
노웅래 더불어민주당 의원(서울 마포구갑·교문위)이 한벤투로부터 제출받은 자료 ‘영진위 외부 전문가 풀 적용 경과’를 살펴보면, 문체부 투자심의 외부 전문가 풀이 영진위 모태펀드에 적용되기까지의 과정들이 대략 공개됐다. 지난 2015년 1월 20일, 한벤투는 영진위에 모태펀드 자펀드 투자심의위원회 외부 전문가 풀을 구성하기 위한 외부 전문가를 추천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로부터 보름이 지난 2월 5일, 영진위는 ‘출자계정: 영화계정, 역할: 펀드운용사 선택에 일임, 선택범위: 투자심의 위원회 또는 참관인, 투자분야: 한국영화’라는 내용의 답장을 보내며 ‘외부 전문가 풀은 추후에 별도로 회신’하겠다고 덧붙였다. 외부 전문가 풀은 한국영화에 투자하는 영화계정 모태펀드의 투자심의위원회에 들어가 의결권을 행사하거나 참관하되 의결권을 행사할지 참관인에 머무를지는 펀드운용사가 선택하게 한다는 얘기다.
영진위 소속의 누구의 머릿속에서 나온 생각인지 몰라도, 혹은 영진위보다 더 윗선인 문체부가 지시한 내용인지 몰라도 외부 전문가 풀의 역할이 이미 정해진 채 한벤투에 전달된 셈이다.
두달이 지난 뒤인 4월경, 영진위는 영화계정 외부 전문가 풀은 문체부의 외부 전문가 풀로 갈음하겠다고 통보한다. 그 시기를 전후로 문체부가 외부 전문가 풀을 구성한 모양이다. 다음달인 2015년 5월 4일, 모태펀드 영화계정 외부 전문가 풀이 구성됐다. 그들은 <씨네21>이 현재 파업 중인 KBS 노조를 통해 입수한 문건에 적시된 ‘문화·영화계정 외부 전문가 15명이다(<씨네21> 1125호 기획 ‘비전문적 전문가들’을 참조할 것).
문체부 또한 한벤투가 전문가 추천을 (영진위를 통해) 의뢰해와서 전문가 명단을 추천하는 절차로 진행한 사실을 인정했다. ‘외부 전문가의 역할(단순 참관 또는 의결권 보유)은 자조합에서 자율적으로 결정하도록 했고, 대부분 참관인으로만 참여한 것으로 드러났다’고도 전했다. 문체부의 말대로 그들이 단순한 참관인에 머물렀는지는 좀더 정확한 조사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문체부(혹은 그 윗선 아니면 한벤투나 영진위 같은 관련 기관)는 누가 외부 전문가 풀을 기획·구성했는지에 대해서는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
한편, 영진위는 출자사업을 담당하고 있는 창작지원팀의 조직개편과 인사이동으로 인한 근무 시기가 외부 전문가 풀이 구성된 뒤라는 점을 강조하며 모르쇠로 일관하되 외부 전문가 풀의 영화계정 적용 여부를 지난해 10월 국정감사 때 처음 알게 됐고 후속 관리를 소홀히 한 점에 대해 책임감을 통감한다는, 아주 정치적인 입장을 내놓았다.
외부 전문가 풀은 모태펀드가 자펀드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모태펀드에 출자한 출자자(정부 각 부처)로부터 분야별 전문가를 추천받아 구성한 제도다. ‘(모태펀드) 최종 투자심의위원회에 외부 전문가를 참석시켜 전문적 의견을 제시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문화·영화계정뿐만 아니라 보건, 특허 등 전문성을 요하는 계정 전체를 대상으로 도입되었다’는 게 문체부의 설명이다. 하지만 해당 법률에 의해 설립된 특수법인·정부 출연 연구소·준정부기관에 속한 전문가가 포함된 미래, 보건, 특허계정의 외부 전문가 풀과 달리 문화·영화계정의 외부 전문가 풀은 문화·영화산업과 무관한 교수, 변호사들이 대거 포함됐다는 사실이다.
김종대(비례·국방위) 정의당 의원실과 함께 조사한 바에 따르면, 외부 전문가 풀에서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류석춘 자유한국당 혁신위원장이다. 자유한국당을 쇄신하고 보수재결집에 나서기 위해 자유한국당 혁신위원장으로 영입된 사람으로, 외부 전문가 풀에는 ‘류석춘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로 올라가 있다. 그는 <씨네21>과의 전화통화에서 “내 이름이 왜 거기에 올라갔는지 알지 못한다. 외부 전문가 풀(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다”고 말했지만, 문체부가 당사자의 동의 없이 외부 전문가 풀 명단을 구성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남정욱 교수, 강규형 KBS 이사, 남광규 교수, 조형곤 EBS 비상임 이사는 바른사회시민회의와 관련 있다. 바른사회시민회의는 참여연대 몇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등에 대항하기 위해 2002년 창립된 민간기구로 알려져있다.
남정욱, 강규형, 남광규는 바른사회시민회의 운영위원이고, 조형곤은 소속 운영위원은 아니지만 공교육살리기학부모연합 및 21세기미래교육연합 대표 등의 자격으로 바른사회시민회의에서 주최하는 토론회(주로 교육부문)의 단골 패널로 참여한 바 있다. 특히 전국언론노조 KBS 본부 조합원들은 강규형 이사를 “언론적폐·교육적폐”로 규정하고 “KBS 이사를 사퇴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최근 강규형 KBS 이사가 업무추진비를 사적으로 사용한 의혹이 제기되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추혜선 정의당 의원이 KBS로부터 제출받은 ‘이사회 법인카드 사용내용’을 분석해보니 강규형 이사가 자신의 주소지 근처에서 업무추진비를 다수 사용한 것으로 확인됐다.-편집자).
성빈 변호사와 강래형 변호사는 ‘행복한 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이하 행변)에 소속되어 있다. 행변은 MBC 방송문화진흥회 및 KBS 이사인 차기환과 이인철 그리고 탄핵반대 보수단체 집회를 주도하는 김기수 등 총 5명이 2014년 9월 16일 발족했다. <주간경향>(1210호 표지 이야기 “친정부적 변호사 모임 ‘행변’을 아시나요”)은 행변이 정치적 목적으로 결성된 변호사 모임이라는 의구심이 든다고 보도한 바 있다(강래형 변호사는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 김모씨 변호인단에 포함되었고, 세월호 유가족 대리기사 폭행사건으로 김현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기소된 이후 행변 활동을 거의 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 행변은 조희연 교육감을 비판하고, 2014년 9월 17일 세월호 유가족 대리기사 폭행사건의 대리기사쪽 무료 변론을 맡기도 했다. 고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업무 일지를 살펴보면 청와대는 민변의 대응조직으로서 행변을 필요로 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미영 교수는 <통영의 딸> 원작 에세이 <잃어버린 딸들 오! 혜원 규원>을 출간한 출판사 세이지 대표이자 ‘자유와 통일을 향한 변호사 연대’(이하 자변) 소속 변호사다. 자변의 전신이 앞서 소개한 행변이다. 조형곤 EBS 비상임 이사가 2011년 10월 3일 ‘구출! 통영의 딸, 백만엽서 청원운동’에 참여한 바 있다.
오영상 법무법인에이스 변호사, 심만수 살림출판사 대표 및 작가, 김광숙 파주 앨리스하우스(어린이도서관) 대표, 남정집 단국대 초빙교수, 한희원 동국대 법대 교수, 이동영 도현법무법인 변호사, 함귀용 KCL 법무법인 대표, 황인희 두루마리역사교육연구소 대표 등 8명도 문화·영화산업과 거리가 먼 변호사와 교수들이다. 함귀용 KCL 법무법인 대표는 공안검사 출신으로, 박근혜 정부 당시 방송통신심의위원이었다. 남정집 단국대 초빙교수는 “북한의 무력도발에 대한 경계심을 강화시켜야 하고, 국가안보에는 그 어떠한 가치나 이데올로기도 우선할 수 없다”는 내용의 글을 기고해 영화 <연평해전>을 재조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희원 동국대 법대 교수는 “국정원을 정치 공학적으로 공개, 개혁하는 건 위험천만한 일이니 통일에 대비해 장기적 관점에서(국정원 개혁을)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황인희 두루마리역사교육연구소 대표는 토론회 ‘학교에서 배우는 국가정체성의 정체’, ‘교과서, 어떻게 편향되어 있나’에 참석해 중·고등학교 사회과 교과서를 두고 “일반 개인은 모두 약자라는 약자 코스프레에 빠져 있고, 세계화를 부정적으로 보고,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를 부정적인 눈으로 보게 한다”며 교과서의 좌편향 문제를 지적했다.
영화계 블랙리스트 진실 규명에 가장 중요한 열쇠
황인희는 김미영과 함께 한국자유회의 발기인이기도 하다. 한국자유회의는 ‘광장의 촛불’이 법치를 무시하고 위협하는 ‘헌정(憲政) 위기’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지난 1월 23일 창립한 단체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적 가치를 지지하는 사람 130여명이 참여했다. 한편, 최규학 전 문체부 기획조정실장과 신용언 배제대 관광대학원 교수, 두 사람은 문체부 재직 경험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최규학은 2014년 10월까지 문체부 기획조정실장을 역임했다. 박영수 특검팀은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의 공소장에 박근혜 대통령을 ‘블랙리스트 정책에 소극적으로 임한 최규학 기획조정실장, 김용삼 종무실장, 신용언 문화콘텐츠산업실장 등 문체부 실장 3명이 사직하게 압박한 혐의’ 등으로 공범으로 기재했다).
<씨네21>이 모태펀드 블랙리스트 기사 ‘누가 모태펀드로 정치하는가’를 보도한 뒤 문체부는 지난 2월 외부 전문가 풀 제도를 폐지했다. 노웅래 의원은 “문화·영화 모태펀드 외부전문가를 선임한 문체부가 외부 전문가를 추천하게 된 경로를 모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박근혜 정부의 영화계 블랙리스트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문체부는 전혀 전문성이 없는 보수 단체 인사들을 누구의 지시로 모태펀드 외부 전문가로 추천했는지 밝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19명 모두 문화·영화산업과 무관한 보수 인사들로 채워진 것을 두고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제는 문체부가 대답할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