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혁은 영화에서 노래를 꽤 불렀다. 기가 막히게 잘 불렀다는 게 아니라 몇번 불렀다는 얘기다. 신기하게도 영화는 그의 노래를 중간에 끊지 않고 거의 처음부터 끝까지 들려줬다. 그의 무덤덤하면서도 담백한 노래는 몇 마디 인상적인 대사보다 영화가 얘기하고자 하는 바를 그대로 전해줬다. 그런데 이제 와 생각해보니 공교롭게도 그 노래들은, <광식이 동생 광태>에서 최호섭의 노래인 <세월이 가면>,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이하 홍반장)에서 각각 김광석과 유재하의 노래인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와 <그대 내 품에>다. 어쩜 그리도 떠난 그를 떠올리게 하는 곡들인지. 당연히 원곡보다야 못하지만 이상하게 그의 노래는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었다. 그래서 아마도 카메라는 그로 하여금 영화에서 그 노래들을 꼬박 다 부르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꽤 한동안 그 노래들이 입가를 맴돌 것 같다. “세월이 가면 가슴이 터질 듯한 그리운 마음이야 잊는다해도, 한없이 소중했던 사랑이 있었음을 잊지 말고 기억해줘요.”(<세월이 가면>) “지나간 시간은 추억 속에 묻히면 그만인 것을, 나는 왜 이렇게 긴긴 밤을 또 잊지 못해 새울까.”(<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배우 김주혁을 처음으로 인터뷰했던 기억은 2002년 <YMCA 야구단> 개봉 당시였다. 1920년대, 사람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던 야구단에서 그는 일본 유학생 출신의 투수 오대현으로 출연했다. ‘2002 월드컵 한국 축구 4강’의 흥분이 여전하던 때라 “다들 축구 얘기만 하는데 야구영화 얘기하는 기분이 참… (웃음)” 하며 인사를 시작했던 그가 들려준 이야기 중 특히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두 가지다. 바로 자신의 캐릭터에 대한 설명과 전작이자 데뷔작이었던 <세이 예스>에 대한 얘기였다. 먼저 그는 <YMCA 야구단>에서 연기한 투수 캐릭터에 대해, 포수와의 갈등과 반일 비밀조직에서의 활동 등으로 영화 속에서 가장 복합적인 감정을 지니고 있는 인물로서 “감정의 기복이 심하지만 잘 표현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사실 가장 잘 흔들리는 사람이지만 가장 흔들려서는 안 될 마운드에 서 있는 인물”이라고도 덧붙였다. 곱씹어보면 이후 그는 계속 그런 캐릭터를 연기해왔던 것 같다.
이건 진짜 ‘내 작품’
그리고 그 누구도 관심가지지 않았던, 흥행적으로나 비평적으로나 혹독한 결과를 피해갈 수 없었던 데뷔작 <세이 예스>에 대한 자부심은 의외였다. “나중에 완성된 영화를 보며 착잡하기도 했지만(웃음), 진짜 ‘온몸으로 때워가며’ 연기했다. 영화 전체에서 내가 나오지 않는 장면은 불과 6신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비록 주변의 권유로 출연을 결정한 작품이지만, 이건 진짜 ‘내 작품’이라는 생각으로 정말 열심히 했다.” 이 에피소드가 ‘배우 김주혁’을 말해준다면 그다음으로 ‘인간 김주혁’을 말해주는 에피소드도 있다. 공동주연이라고 할 수 있는, 당시 충무로 최고의 배우였던 선배 박중훈에 대한 얘기였다. “<세이 예스>를 준비하면서 가장 듣기 싫었던 얘기가, 바로 박중훈 선배와의 ‘기 싸움’에 밀리지 말라는 얘기였다. 가만히 듣고 있으면, 영화 속에서 대립하는 역할이라서 그런 얘기를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대선배한테 눌리지 말고 뭘 좀 어떻게 하라는 얘기인 거 같은데, 왜 꼭 그래야 하는지 영 듣기가 좀. (웃음)”
구탱이 형, 또 놀러와요
배우 김주혁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게 해준 작품은 영화나 드라마가 아니라, 2013년부터 2015년까지 약 2년간 출연했던 KBS 주말 예능 프로그램 <해피선데이-1박2일>(이하 <1박2일>)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지난 시즌들의 경우 (현재 또 다른 예능 프로그램 <아는 형님>에서도 그러는 것처럼) ‘시끄러운 형님’ 캐릭터로 분위기를 휘어잡으려는 강호동과, 종종 다른 출연자들을 무시하는 것 같은 태도가 느껴지는 성시경으로 인해 딱히 정이 가지 않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런데 김주혁, 김준호, 차태현, 데프콘, 김종민, 정준영, 윤시윤이 출연하는 시즌3의 <1박2일>은 거의 빼놓지 않고 봤던 것 같다. 가장 연장자인 김주혁이 전혀 ‘형님 놀이’를 하지 않고 어울린다는 점이 가장 호감가게 만드는 요소였다. 프로그램 속 4자성어 퀴즈 대결에서 ‘토사구팽’을 ‘토사구탱’이라고 하는 바람에 ‘구탱이 형’이라는 애칭을 얻은 그는 <1박2일>을 다시 전성기로 이끌었다.
그러다가 그는 연기에 전념하겠다는 이유로 프로그램을 떠났다. 재밌는 건 그다음이다. 남은 멤버들이 떠난 멤버인 그를 계속 찾았던 것이다. 말하자면 떠난 이후에도 심심찮게 다시 프로그램에 등장했다. 동생들이 신년 세배를 위해 그를 찾았고, 심심하면 전화 연결을 해서 그의 목소리를 들려주었으며, 또 자기가 떠난 자리에 들어올 새 멤버(윤시윤)를 축하해주기 위해(예능 프로그램 최초로 전 멤버가 새 멤버에게 인수인계를 하기 위해 특별출연했다는 후문) 보라돌이 같은 인형탈을 뒤집어쓴 채 언덕을 구르고 손하트를 날리며 재등장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이후 회차에서는 멤버들이 종종 “오늘의 게스트를 모시겠습니다!”라는 제작진의 얘기에 “또 주혁이 형 나오는 거 아냐?”라고 웃으며 지겹게 얘기할 정도로, 그는 프로그램에서 하차하고도 ‘떠난 멤버’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사람이었다. 특히, 인수인계차 출연했던 방송분에서 마지막으로 떠나던 그의 환한 얼굴 뒤로 깔렸던, 하지만 이제 이뤄질 수 없는 자막, “구탱이 형 또 놀러와요”.
뒤에서 더욱 빛나던
‘배우 김주혁’과 ‘인간 김주혁’ 사이에서 그를 직접 만나고, 또 그의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점은, 그가 이른바 ‘끼’가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배우로서 그것은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도 있는데, 이상하게도 그것이 그에게는 절대적인 장점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종종 정돈되지 않은 자신만의 끼가 전체적인 이야기의 맥락을 헤집거나, 상대배우를 혼란에 빠지게도 만드는 그런 일들이 그가 출연했던 작품에서는 딱히 없었던 것 같다. 영화 관계자들로부터도 그런 얘기를 들어본 적 없다. 정말 드물게도 ‘안티’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언제나 넘칠 듯 넘치지 않았고 또한 부족할 것 없이 자기 자리를 지켰다. 이어지는 다음 장에서 <씨네21> 기자들이 김주혁의 인상적인 순간들을 더듬으며 7편의 영화, 7개의 장면을 떠올릴 텐데, 한편 한편 기억을 더듬다보면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즉각적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김주혁은 언제나 제 역할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그 자신의 자리를 버티고 서 있던 믿음직한 배우였다. <싱글즈> <청연>의 장진영, <홍반장>의 엄정화, <사랑따윈 필요없어>의 문근영, <아내가 결혼했다> <비밀은 없다>의 손예진, <방자전>의 조여정 등 충무로에서 그처럼 많은 경우, 오히려 상대 여성배우를 돋보이게 만들어주며 자신의 몫을 찾던, 이 길고긴 든든한 조력의 필모그래피를 가진 남성배우가 과연 또 누가 있을까.
그런 그가 <1박2일>을 떠나고 맞이했던 2017년은 영화배우로서 생애 가장 바쁜 해였다. 언론인으로 출연했던 TV드라마 <아르곤>까지 더하면 그야말로 ‘커리어 하이’의 해였다. 생애 최초의 악역을 연기했던 <공조>로는 연기인생 20년에 처음으로 ‘영화상’이란 것도 받았고, 그게 스스로도 얼마나 감격스러웠던지 그 수상소감의 첫마디가 바로 그 영화상 얘기였다. 이제 김주혁의 유작으로 만나게 될 작품은 <독전>(감독 이해영)과 <흥부>(감독 조근현)다. 특히 <씨네21>이 지난 추석 합본호 1124호에서 촬영현장을 다녀온 <독전> 기사에서 그와 가진 인터뷰는, 아마도 그의 공식적인 마지막 인터뷰가 아닐까 싶다. 당시 이해영 감독은 그가 연기하는 악역 ‘하림’에 대해 “(김주혁 배우가) 어디서 듣도보도 못한, 강력하고 신기한 악의 캐릭터를 만들어왔다”고 평했다.
그처럼 홍상수 감독의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을 지나 <공조>와 <독전>에 이르기까지, 최근 그의 ‘선택’들을 보면 여태껏 출연해온 작품들의 결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그 첫 번째 기억으로, 임상수 감독의 <나의 절친 악당들>에 잠깐 냉정한 회장 역할로 출연했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뭐랄까, 이전 필모그래피는 늘 메소드 연기와는 거리가 먼 그냥 ‘김주혁’이라는 사람이 등장하는 영화였다. 매번 캐릭터가 도드라진다기보다 늘 김주혁이 김주혁을 연기하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지난 1, 2년간 영화에서 봤던 김주혁은 그야말로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스스로 배우로서의 변화와 쾌감을 느꼈던 것도 바로 그 지점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래서 그의 더 많은 영화를 보지 못하게 된 것이 진정으로 안타깝다. 그렇게 좋은 배우를 하나 잃었다. 또 한명의 대체하기 힘든 배우를 떠나보내고 말았다.
필모그래피
<독전> 개봉예정 / <흥부> 개봉예정 / <장옥의 편지>(감독 이와이 지, 2017, 디지털 단편) / <석조저택 살인사건>(2017) / <공조>(2016) /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2016) / <비밀은 없다>(2015) / <좋아해줘>(2016) / <뷰티 인사이드>(2015) / <나의 절친 악당들>(2015) / <적과의 동침>(2011) / <커플즈>(2011) / <투혼>(2011) / <방자전>(2010) / <아내가 결혼했다>(2008) / <사랑따윈 필요없어>(2006) / <광식이 동생 광태>(2005) / <청연>(2005) /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2004) / <싱글즈>(2003) / <YMCA 야구단>(2002) / <세이 예스>(20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