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빌리 진 킹: 세기의 대결> 테니스로 세상을 바꿀 수 있어!
2017-11-08
글 : 장영엽
<빌리 진 킹: 세기의 대결>의 배경이 된 1973년 9월 20일의 테니스 경기 그리고 미국, 영화계의 젠더 이슈와 이 영화의 상관관계는…

달 착륙 이후 사상 최고의 시청률. 1973년 9월 20일,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에 위치한 애스트로돔 경기장에 전세계 9천만명의 이목이 집중됐다. 29살의 여자 테니스 챔피언, 빌리 진 킹과 55살의 전직 남자 테니스 챔피언 보비 리그스의 경기를 보기 위함이었다. 이날의 대결은 단순히 두 선수의 커리어와 명예를 사수하기 위한 투쟁이 아니었다. 이건 ‘여자는 침대와 부엌에 머물러야 한다’고 주장하던 남성우월주의자와 ‘여자와 남자는 동등한 입장에서 대우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던 페미니스트의 대결이기도 했다. 테니스 코트 안에서의 승패가 테니스 코트 바깥의 사회적 분위기를, 나아가서는 시대정신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빌리 진 킹과 보비 리그스의 경기는 그야말로 ‘세기의 대결’이었다. <빌리 진 킹: 세기의 대결>은 바로 이날의 승부를 향해 달려가는 영화다.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기 앞서, 1973년 미국의 시대적 풍경이 어떠했는지를 짚고 넘어가는 게 좋을 것 같다. 1973년은 미국의 성평등에 있어 분기점이 될 만한 사건들이 연달아 일어났던 해다. 당대의 페미니스트 운동을 주도했던 글로리아 스타이넘과 도로시 피트먼 휴스가 페미니스트 잡지 <미즈>(Ms)를 창간했고, 여학생과 남학생이 균등한 교육 기회를 제공받아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교육 수정 법령 ‘타이틀 나인’(Title Ⅸ)이 본격적으로 시행되며 여학생들의 스포츠 참여가 늘어났다. 로 대 웨이드(Roe v. Wade) 소송에서 미국 연방 대법원은 처음으로 낙태권을 여성의 기본권으로 인정했다. 시대가 변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중이 일상적으로 체감하는 성차별은 여전히 뿌리깊었다. 여성들은 여전히 남성의 서명이 있어야 신용카드를 사용할 수 있었고, 같은 일을 하더라도 남성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은 월급을 받으며 일해야 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펼쳐진 빌리 진 킹과 보비 리그스의 테니스 경기는 성평등 이슈를 대중문화의 영역으로 끌어왔다는 점에서 기념비적인 대결이었다. TV로 경기를 시청한 9천만 관객에게 빌리 진 킹은 곧 1973년의 여성이었고, 보비 리그스는 곧 1973년의 남성이었다. 빌리 진 킹이 이긴다는 건 여성을 존중하지 않는 시대가 변해야 한다는 의미였고, 보비 리그스의 승리는 그래서 남성이 더 나은 대접을 받는 것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할 남성우월주의자들의 근거가 하나 늘어나는 것이었다. 변할 것인가, 퇴보할 것인가. 이 거대한 시대적 질문이 애스트로돔으로 들어선 두 남녀 선수의 어깨에 달려 있었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떤 계기로 성 대결에 임하게 되었나. <빌리 진 킹: 세기의 대결>은 서두름 없이 1973년 당시 빌리 진 킹(에마 스톤)과 보비 리그스(스티브 카렐)가 처한 상황 속으로 관객을 이끈다. 스포츠 스타 빌리 진 킹은 테니스 대회 ‘퍼시픽 사우스웨스트’에서 우승했을 경우 남녀 선수가 받는 상금이 8배나 차이난다는 사실에 격분한다. 대회의 주최자 잭 크레이머(빌 풀먼)는 남자 선수들이 훨씬 더 빠르고 투지가 강하다는 성차별적인 발언을 킹에게 가감 없이 쏟아내고, 그녀는 이렇게 응수한다. “그건 생물학적 차이고, 저는 티켓값을 얘기하고 있어요.” 영화는 세기의 성 대결을 펼치기 전, 성차별을 규탄하며 US테니스협회에서 탈퇴하고 여자테니스협회(WTA·49쪽 참조)를 만드는 등 이미 시대와 투쟁하고 있었던 빌리 진 킹의 모습을 비춘다. 한편 은퇴한 남자 테니스 선수 보비 리그스는 부유한 장인의 회사에서 일하며 무미건조한 일상을 이어간다. 그의 유일한 낙은 친구들과 함께 치는 내기 테니스와 도박. 승부사로서의 본능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그는 당대의 스타 빌리 진 킹에게 성 대결을 제안하는 것이 다시 세간의 주목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여긴다.

어떤 성별이 더 우월한지 묻는 게 아니다

<빌리 진 킹: 세기의 대결>은 두명의 빼어난 실력을 갖춘 남녀 테니스 선수들의 대결을 조명하고 있지만 인물을 다루는 방식에서 다소 빌리 진 킹쪽으로 무게중심이 기울어 있다. 그건 리그스에 비해 킹이 처한 상황이 더 복합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테니스계에 만연한 성차별과 불평등을 개선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빌리 진 킹의 모습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녀에게 처음으로 찾아온 성정체성의 혼란을 비중 있게 묘사한다. 여자 테니스 선수들만의 투어인 ‘버지니아 슬림스’(47쪽 참조)의 홍보 일정 중 미용실을 찾은 킹은 “빌리 진, 원하는 게 뭐예요?”라고 묻는 헤어드레서 마릴린(안드레아 라이즈보로)에게 매혹된다. 1980년대 레즈비언으로서의 성정체성을 밝힌 빌리 진 킹은 실제로 1970년대 초반 처음으로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고 말한 바 있다. <빌리 진 킹: 세기의 대결>의 연출을 맡은 <미스 리틀 선샤인>(2006)의 부부 감독, 발레리 페리스와 조너선 데이턴은 1973년 당시의 빌리 진 킹이 “개인적 싸움과 정치적 싸움을 동시에 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흥미를 느껴” 그런 그녀가 감당해야 했을 심리적 부담감에 보다 주목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말한다. 영화는 킹의 사연보다 비중은 적지만 보비 리그스의 개인사도 다루고 있다. 그는 뼛속까지 남성우월주의자(영화에서는 잭 크레이머가 오히려 이런 캐릭터에 가깝다)라기보다는 점점 남성의 사회적 입지를 위협하는 여성들을 막아서는 사람으로서의 포지셔닝이 사회적으로 먹힌다는 것을 깨달은 ‘쇼맨’으로 묘사된다. 여자들을 집으로 다시 보내버리자고 외치던 그가, 아내의 거대한 초상화가 걸려 있는 집으로 돌아와 경제력을 갖춘 아내에게 쩔쩔매는 장면은 실소를 자아낸다.

하지만 <빌리 진 킹: 세기의 대결>은 여성과 남성 어느 한편의 손을 티나게 들어주는 영화는 아니다. 시대를 뒤흔들어놓은 위대한 스타에게도 명암이 있다는 점을, 영화는 빌리 진 킹과 남편 래리 킹의 에피소드를 통해 보여준다. 20살 무렵부터 그녀의 동반자였던 래리는 응원차 방문한 투어에서 빌리 진 킹의 외도를 금세 알아차린다. 그러나 빌리 진 킹에겐 상처받은 래리와 마릴린에 대한 복합적인 감정으로 고민할 시간이 많지 않다. 1973년 당시 그녀에게 더 중요했던 건 테니스를 통해 세상을 바꿔놓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시대적 과제에 직면한 인물이 간과할 수밖에 없었던, 혹은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주변 사람들에 대한 언급도 이 영화에는 상당하다. 여자 테니스 선수들의 카리스마 넘치는 후견인, 글래디스 헬드먼(세라 실버먼)과 감각 넘치는 테니스 복식 디자이너이자 성정체성에 대해 킹이 유일하게 고민을 털어놓는 친구 테드 틴링(앨런 커밍), 킹의 위협적인 라이벌 마거릿 코트(제시카 맥나미) 등이 그들이다.

단연 이 영화의 백미는 휴스턴에서 펼쳐진 빌리 진 킹과 보비 리그스의 대결이다. 이 대목은 사회적 드라마와 애틋한 로맨스 장르의 색채를 오가던 <빌리 진 킹: 세기의 대결>이 가장 스포츠영화다워 보이는 순간이기도 하다. 발레리 페리스와 조너선 데이턴은 후반부에 이르기까지 영화를 이끌어온 모든 관계와 상황에 대한 심리적 묘사와 플래시백을 배제한 채 오직 스포츠 경기가 벌어지는 테니스 경기장의 현재에 초점을 맞춘다. 코트를 가로지르는 두 선수의 숨소리와 사방으로 튀어오르는 공, 매섭게 전방을 주시하는 그들의 눈, 흥분이 가득 담긴 관객의 표정으로 완성된 경기 시퀀스는 박진감 넘치게 촬영되었다. 승부가 난 뒤 다른 모든 사람들을 멀리하고 로커룸에 우두커니 앉아 승리와 패배를 받아들이는 두 선수의 모습도 깊은 여운을 남긴다.

아직도 갈 길이 멀지만

발레리 페리스와 조너선 데이턴 감독이 <빌리 진 킹: 세기의 대결>을 처음 기획한 건 미국 최초로 여성 대통령이 탄생할 거란 기대가 팽배했던, 2016년 미국 대선 예비 선거 때의 일이다. “한동안 모두 이 영화가 성 대결 이후 사회가 얼마나 많이 발전했는지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알다시피 선거 결과는 영 딴판이었지만.” 기대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빌리 진 킹을 연기한 에마 스톤이 현실에서 남녀 배우들이 받는 출연료를 동등하게 맞추기 위해 동료 남자배우들이 출연료를 깎는 희생이 있었다고 고백하는 2017년이다. 하지만 어떤 변화는 갑작스럽고, 격렬하게 온다. 1973년 테니스 코트에서 일어난 성 대결이 그랬듯. 세기의 대결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사진 이십세기폭스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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