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스코프]
허지웅 작가와 함께하는 <씨네21> 토크콘서트 <바닷마을 다이어리> 현장
2017-11-09
사진 : 백종헌
글 : 김소미
가마쿠라, 에노시마… 영화가 이곳을 선택한 이유가 있었네
허지웅 작가는 배경이 된 가마쿠라에 다녀온 뒤 <바닷마을 다이어리>를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고 밝혔고, 주성철 편집장은 ‘왜 이곳’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선택했는지 알 수 있는 공간들이었다고 설명했다.

“어떤 부분은 더 견고해졌고 어떤 부분은 의외로 허물어졌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을 만난 허지웅 작가의 애정 어린 소감이다. 영화의 배경이 된 장소를 실제로 방문하는 것 또한 어쩌면 비슷한 과정의 연속이 아닐까. 지난 10월 25일, 일본정부관광국 지원으로 <바닷마을 다이어리>(2015) 촬영지를 여행한 주성철 <씨네21> 편집장과 허지웅 작가가 대한극장에서 만났다. 지난 1126호에서 글이 전했던 정갈한 감상은 ‘토크콘서트’를 통해 인간적인 입담으로 더욱 생생하고 진솔하게 이어졌다. 가마쿠라 지역과 에노시마섬에서 보낸 이틀을 담은 취재 영상과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직접 전하는 인사말, 그리고 작곡가 간노 요코의 O.S.T 영상으로 시작한 대화는 이번 여행만큼이나 다양한 경유지를 거쳐 꼭 다시 가겠다는 기약으로 마무리됐다. 두 사람의 끈끈한 여행기를 정리해 싣는다.

<바닷마을 다이어리> 토크콘서트에 참여한 관객과 주성철 <씨네21> 편집장, 허지웅 작가(왼쪽부터).

허지웅_ 이번 여행에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장소가 있다면, 내겐 단연 ‘바다고양이 식당’이다. 거기서 먹었던 잔멸치덮밥은 ‘세상에 이런 음식이 있을 수가’라는 생각을 하면서 먹었던 음식이다. (웃음)

주성철_ 실제로는 ‘분사 식당’이라는 곳이다. 영화와 달리 나이 지긋한 할머니께서 운영 중인데 강렬한 기운을 내뿜으신다. 일본말로 ‘시라스동’이라 불리는 잔멸치덮밥을 실제로 먹기 전엔 ‘맛이 있을까?’ 갸우뚱했었다.

허지웅_ 상식적으로 밥과 멸치뿐인데 대단한 맛이 나올 리가 없지 않나. 대충 짐작 가는 맛일 것 같아서 전혀 기대를 안 했다. 근데 이건 덮밥의 이데아,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관념계의 맛이다. 다만 <씨네21> 지난호 지면에는 실리지 않았는데 라면은 좀 짰다. 내 입맛엔 일본에 존재하는 모든 소금을 긁어 넣은 맛이었다. (웃음)

주성철_ 영화에 등장했던 전갱이튀김도 주문했었는데 마침 전갱이가 다 떨어져서 먹지 못했다. 잔멸치덮밥을 먹은 다음날 인터뷰차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을 만나서 맛있었다는 얘길 했더니 본인도 정말 좋아한다더라. 한편으론 우리 두 사람이 그 덮밥을 좋아한다는 사실 자체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시치리가하마 해안은 하필 우리가 갔을 때 전날까지 태풍이 심했던 터라 여전히 파도가 세서 정작 우리는 해변 아래로 내려가지 못했다. 그럼에도 인상적이었던 건 모래가 정말 새카만 해변이었다는 거다.

허지웅_ 서핑하기 좋은 파도가 있는 곳이었다. (사진을 가리키며) 난 이 아이가 기억이 난다. 위에서 내려다볼 때 ‘저게 뭐지?’ 했던 복장이었다. 주변에서 혹시 전쟁물을 찍고 있나 싶은. 주변에 비슷한 복장의 또래들도 있어서 자세히 봤더니 아동용 서핑복이었다.

주성철_ 보호자도 없이 혼자 다녀서 걱정했던 기억이 난다. (웃음) 시치리가하마 해안은 네 자매가 함께 걸어가는 마지막 엔딩 장면에서 무척 멋졌기때문에 한번쯤 내려가서 걷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아쉬웠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 다녔던 거리와 바닷가 등 가마쿠라에 직접 다녀온 허지웅 작가와 주성철 편집장이 사진을 보며 풍경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추천 코스

허지웅_ 그다음 코스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이곳만큼은 꼭 가봤으면 좋겠다며 추천한 곳, 기누바리산 정상을 갔었다.

주성철_ 우리가 일본을 찾은 날이 9월 셋째 주 ‘노인의 날’이었다. 워낙 사람이 많아서 공항 도착 후에 가마쿠라 지역까지 이동하는 데 평소보다 시간이 꽤 걸렸다. 기누바리산이 첫날의 마지막 일정이었는데 뜻하지 않게 좀 늦은 시간에 도착했다. 그럼에도 꼭 올라가보고 싶어 정말 힘들게 등산했다.

허지웅_ 산에 오르게 될 경우 관광을 목적으로 닦아놓은 등산로가 아니어서 올라가는 과정에서 때때로 시련과 공포를 겪게 될 거다. (웃음) 하지만 막상 정상에 올라서면 어마어마한 풍경이 펼쳐진다.

주성철_ 촬영팀도 아주 힘들게 올라갔었다고 하더라. 힘겹게 정상에 섰을 때, 멍하게 경치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곳이다. 영화 속 자매들이 그랬듯 이런 곳이라면 어떤 이야기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허지웅_ 맞다. 정상까지 올라서면 화해를 할 수밖에 없는 그런 공간이다. 보통 영화 촬영지에 가서 실상을 접하면 약간의 괴리와 함께 실망하게 되는 경우도 있지 않나.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 만난 장소들은 오히려 ‘그래서 여기서 찍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주성철_ ‘여기에서 촬영한 이유가 있다.’ 딱 그런 생각이 든다. 둘째 날엔 네 자매가 아침에 바쁘게 출근했던 고쿠라쿠지역에 갔다가 사찰로 이동했다. 조금 늦은 시간에 도착해서 절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허지웅_ 중간까지 들어갔는데 어떤 스님이 와서 우릴 내보냈다. 영화처럼 긴 빗자루를 들고 쫓아오시더라. (웃음) 사실 밖에서 봤을 때 혹시 신사가 아닐까 싶어서 안내판을 아주 유심히 읽었다. 다행히 좋은 곳이었다.

주성철_ 고쿠라쿠지 사찰 바로 앞에 막내 스즈(히로세 스즈)가 비를 피하려고 잠시 머문 공간도 있다. 빨간 지붕이 인상적이라 기억하고 있었는데, 실제로 사찰을 나오면 바로 보이는 곳에 위치해 있어서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허지웅_ 현대적인 건물이나 가게 사이에 유독 낡은 건물이 있어 이상하다 싶어 주변 사람에게 물어봤다. 그 건물이 동네의 신을 모시는 장소라고 하더라. 일본에는 여전히 마을마다 이런 장소가 하나씩 있구나 싶었고, 안을 들여다보니 집집마다 가져와서 매달아놓은 물건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주성철_ 즈시 해변에 있는 ‘비치 머핀 카페’는 스즈가 잔멸치토스트를 먹는 ‘야마네코테이’로 등장한다. 주인장 역으로 릴리 프랭키가 출연했는데 실제로도 영화 속 모습 그대로 그가 운영하는 카페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 괴짜 아버지를 연기한 것처럼 희극적인 이미지로 기억되곤 하지만 <도쿄타워> 등을 직접 쓴 지적이고 재능이 많은 인물이다. 릴리 프랭키는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 요시다 다이하치 감독의 <아름다운 별>로 한국을 찾기도 했다. 고향이 오사카라 주변에 한국인이 많고 한국 문화에 익숙하다더라. 자신도 가수 조용필을 좋아한다면서 부산국제영화제 관객과의 대화(GV) 도중에 갑자기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불렀다. (웃음)

허지웅_ 사치를 연기한 배우 아야세 하루카도 압도적이었다.

주성철_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님도 아야세 하루카는 쇼와시대 고전 배우의 풍모가 느껴지는 귀한 배우라고 하시더라.

영화 전문 블로거들도 함께한 이번 토크콘서트는 많은 관객이 신청해 높은 경쟁률을 자랑했다는 후문.

‘분복’의 실천

주성철_ 사실 고쿠라쿠 지역 어딘가에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네 자매의 집이 궁금하기도 했다. 감독님과 PD님께 여쭤봤더니 공개할 수 없다고 하셨다. 실제로는 노부부가 사는 집이어서 혹시 관광객의 방문으로 불편을 끼칠까 배려하는 마음 씀씀이가 느껴졌다.

허지웅_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삶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영화를 만드는 태도에서도 잘 드러나는 부분이라 생각한다.

주성철_ 우리 두 사람 모두 이번에 실제로 감독님을 만나고 약간 감격했다고 해야 할까. 이번에 처음 뵀는데 어딘가 내 예상과는 다른 지점들이 있었다.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멋진 분이었다.

허지웅_ 첫인상은 초롱초롱한 눈에 여전히 청년 같은 모습이었다. 막상 얘기를 들어보니 또 의외의 면모들이 튀어나왔다.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 실질적인 고민을 진지하게 끌어안은 감독이었고, 매 장면을 그런 물음에서 시작한다고 하더라. 새삼 따뜻한 이야기 너머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를 관통하는 일관된 시선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인상깊었던 건 비슷한 어려움에 처해 있는 후배 감독들을 위해서 작은 제작사를 운영 중이라는 거였다. 자기 일에서만 끝내지 않고 남들도 함께할 수 있게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야말로 훌륭한 어른의 표상이라 생각한다.

주성철_ 제작사 입구를 보면 커다란 간판도 없고 조그만 프린트로 이름을 붙여놓은 게 전부다. 한자로 분복(分福), ‘복을 나눈다’는 의미다. 요란함이나 허세 같은 것은 전혀 없이, ‘분복’의 실천에 집중하겠다는 의지다. 지금도 10여명에 가까운 후배 감독들이 방을 나눠 쓰며 작품을 개발 중이다. 올해 부천국제영화제에서 몇몇 일본 감독들을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는데, 지금 일본의 투자·배급사는 대체로 원작이 있는, 안정성이 보장된 작품들을 선호한다고 한다. 창작 시나리오에 모험을 시도하지 않는 거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사 분복의 활동은 더욱 의미가 깊다. 감독님을 인터뷰했던 방에 테라스가 연결되어 있는데, 정말 깜짝 놀랄 만한 광경을 봤다. 창작의 고통이 느껴지는 담배 꽁초가 족히 수백개는 되어 보였다.

허지웅_ 선인장인 줄 알았다. (웃음) 이번 여행은 일정이 짧아서 아쉬운 마음도 크다. 일본영화계의 동향을 통해 한국영화계의 미래를 점칠 수 있는 부분도 있지 않나. 산업의 외피는 계속 커져나가는데 양국 모두 내실을 다질 수 있는 합리적인 여건들이 부족한 상황 같다. 다음번에 기회가 된다면 일본에 가서 다양한 산업 종사자들을 만나 이야기해보고 싶다. 나의 경우 90년대 일본영화 르네상스 시기에 특히나 많은 작품들을 보고 자란 세대라 그 밖에도 가보고 싶은 곳, 만나고 싶은 사람이 정말 많다.

즈시 해변에 있는 ‘비치 머핀 카페’는 스즈가 잔멸치토스트를 먹는 가게 ‘야마네코테이’로 등장한다. 영화 속에서 릴리 프랭키가 운영하는 카페다.

<아무도 모른다> 잊을 수 없어

주성철_ 마지막으로 <바닷마을 다이어리> 외에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좋아하는 작품이 무엇인지 물어보고 싶다.

허지웅_ 그의 영화를 보고 나서 단 한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그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가장 처음에 본 <아무도 모른다>(2004)다. 이런 작품을 만든 사람이라면 분명 무척 지혜로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영화다. 깊고 슬픈 것일수록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 된다는 태도가 느껴졌다.

주성철_ 야기라 유야의 눈빛은 지금도 기억난다. 이번에 감독님과 배우 아베 히로시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나눴는데 그의 출연작 중 한편만 고른다면 내겐 <걸어도 걸어도>(2008)일 것 같다.

허지웅_ 같은 영화, 같은 감독을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이렇게 모여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건 정말 특별한 인연이 아닐까 싶다. 잊지 못할 경험이 될 것 같다.

주성철_ 여행을 다녀온 지 한달이 조금 지났다. 최소 6개월 내로 다시 가겠다고 결심했었는데 이제 4개월 남은 셈이다. (웃음)

마지막 장면에서 사치(아야세 하루카), 요시노(나가사와 마사미), 치카(가호), 스즈(히로세 스즈)가 거닐었던 바닷가. 방문 전날 태풍이 몰아쳤던 관계로, 아쉽게도 내려가볼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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