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토피아로부터]
침묵을 강요당하지 않겠다는 것
2017-11-16
글 : 문강형준 (영화평론가)
일러스트레이션 : 마이자 (일러스트레이션)

김현석 감독의 <아이 캔 스피크>(2017)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감독의 전작인 <스카우트>(2007)를 연상케 한다. 일상과 역사가 결합되어 있다는 점도 그렇고, 전반부의 코믹함과 후반부의 진지함이 자연스럽게 연결된다는 점도 그러하며, 외부에 있던 관찰자가 내부의 아픔을 알게 되면서 변화한다는 설정도 그렇다. 사실 이런 요소들은 한국 대중영화에 하나의 ‘법칙’처럼 새겨져 있다. 대중을 울리려면 먼저 웃겨서 무장해제시켜야 하고, 무거운 역사를 이야기하려면 먼저 그것을 일상 속에서 용해시켜내야 한다. 무턱대고 진지하기만 하거나 쉽사리 다가갈 수 없을 정도로 실험적이거나 상식적인 생각을 뒤엎을 만큼 래디컬하면 한국에서 흥행은 불가능하다. 대부분의 대중영화들이 이런 진부한 요소를 갖고 있고, <아이 캔 스피크> 역시 그렇지만, 이 영화는 ‘신기하게도’ 진부하게 느껴지지가 않는다. 박민재(이제훈)의 구청 근무 장면들은 전형적인 코믹 요소로 배치되어 있지만 과하지가 않다(다른 영화에서와 달리 박철민식 유머가 이 장면들에서 적절하게 통한다는 것!). 나옥분(나문희)의 수선집이 있는 시장의 휴머니즘적인 풍경들도 관습에서 벗어나지 않지만, 그러면서도 역시 지나치지 않을 정도의 효과를 준다. 심지어 부산 ‘서면’이 어디 있는지에 대한 박민재의 ‘아재개그’조차 ‘아재’스럽지가 않고 귀엽다.

장르 속에 갇혀 있으면서도 장르의 진부함을 벗어나는 이 특이함은 일차적으로 시퀀스들이 진정 진부해질 수 있는 그 순간에 발을 떼며 유머러스한 거리를 둘 줄 아는 감독의 능력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좀더 본질적인 이유는 배우 나문희의 연기에 있다. 가령 나는 카메라에 나문희의 얼굴이 클로즈업될 때마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면서도 진실된 감정들이 느껴졌는데, 도대체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지 모르겠다. 배우의 얼굴이 가진 ‘힘’은 논리적 설명을 넘어선다.

어쩌면 이 영화에서 나문희의 얼굴은 그녀가 연기한 영화 속 나옥분의 삶을 그녀가 완벽히 ‘이해’하고, 아니 ‘다시 살아내고 있음’을 드러내는 게 아닐까도 싶다. 그것은 ‘위안부’의 삶을 이해하는 차원이라기 보다는,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게 무언지를 나문희가 알기 때문이다. 위안부라는 경험을 가졌던 여성의 고통이라는 이 영화의 소재는 사실 국가의 보호 바깥에 놓였던 하층민의 삶, 아들의 앞날을 위해 배제되어야 했던 딸의 고통, 말해야만 하는 것을 말하지 않아야 한다고 강요받았던 여성의 침묵이다. 20년 넘게 수천건의 민원을 ‘말하는’ 나옥분의 독한 모습은 기실 자신이 할 수 있는 작은 것들을 완전히 바꿔냄으로써 거대한 부당함을 가리려고만 했던 ‘국가’의 행위에 맞서는 모습이다. 그것은 아픈 경험을 감춘 채 시장통에서 외롭게 사는 한 늙은 여성이 그동안 깨달은 전부이고, 다시는 침묵하며 살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며, ‘위안부’ 문제의 해결이라는 것이 그저 국가간의 행정 문제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정치적 통찰이다. 그런점에서 <아이 캔 스피크>는 위안부 문제에 관한 영화를 넘어, 침묵을 강요당하며 살아온 한국 하층 여성들의 삶 전체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을 때 빛을 발한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