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가스파 노에가 <러브>에서 도달한 인식의 전환
2017-11-16
글 : 김지미 (영화평론가)
감상적인 섹슈얼리티

노골적인 섹스 신으로 화제를 불러모은 이 작품을 앞에 둔 관객이 가장 쉽게 던질 수 있는 질문은 아마도 “왜 이것은 포르노그래피가 아닌가?”일 것이다. 감독은 리허설이나 사전 모의되지 않은, 실제에 가까운 애정행위를 화면에 담았다. 러브 신에서는 액션의 흐름이 끊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3대의 카메라를 동시에 돌리기도 했다. 전작이 없는 신인배우들이어서 그런지 그들의 정사 신은 더 실감 있게 다가온다. 기성배우들이 주는 극적 허구에 대한 안도감이 없기 때문이다. 가스파 노에는 <돌이킬 수 없는>(2002)을 찍기 전 이 영화를 기획했고, 기획안을 듣고 출연 승낙을 했던 뱅상 카셀과 모니카 벨루치는 시나리오를 본 뒤 고사했다. 덕분에 <돌이킬 수 없는>이 먼저 세상에 나오게 됐다. 실제로 연인이었던 그들은 아마도 허구가 실재를 압도할 것에 대한 두려움, 혹은 그 과정에서 육체에 투영될 수밖에 없는 실제의 흔적들이 두려웠는지 모르겠다.

회한이 짙게 깔린 플래시백

영화의 표면적 구조는 수많은 리뷰들이 지적한 것처럼 젊은이들의 ‘순정적 사랑’과 ‘열정적 섹스’처럼 보인다. 감독 지망생인 남자주인공 머피(칼 글루스맨)가 “내가 만들고 싶은 영화는 감상적인 성(sentimental sexuality)을 다룬 영화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사랑하는 동안의 섹스잖아”라며 파티에서 낯선 여자에게 들려주던 포부를 담은 영화 같기도 하다. 알랭 바디우는 “결국 영화는 촬영(prise)과 편집일 뿐”, “그 밖에 다른 것은 없다”며 “한편의 영화는 촬영과 편집에 의해 이념의 지나감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영화는 머피의 영화적 포부를 표면적으로 활용하며 그것을 넘어서는 감독의 이념에 도달한다. 노골적인 섹스 신을 관통하는 카메라의 움직임, 특히 인위적 사운드의 삽입(성욕을 자극하는 신음을 소거하고 감상적인 사운드트랙의 배치)과 회한의 정서가 짙게 깔린 파편적인 플래시백을 따라가다 보면 <러브>(2015)는 사실 감상적 섹슈얼리티의 딜레마와 그 종말을 직면하게 된 젊은 아버지의 혼란스러운 연가(戀歌)임을 알 수 있다.

한국 개봉 버전과 미국 보급판은 오프닝이 살짝 다르다. 한국판은 벨소리가 평온한 젊은 부부의 아침을 깨우는 것으로 시작한다(이것은 일시적인 추측일 뿐 남성주인공의 내레이션은 평온함이란 가시적 착각일 뿐임을 알게 된다). 반면 미국판에서는 암적색톤으로 이루어진 두 남녀(일렉트라와 머피)의 섹스 신 뒤에 한국판의 첫 시퀀스- 젊은 부부(오미와 머피)의 아침- 가 이어 붙는다. 전자가 음향적으로 화면의 평온함을 파괴한다면, 후자는 평온한 이미지에 숨은 억눌린 욕망을 미리 폭로하면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시각적 이미지의 충돌과 사운드의 배신은 이 작품의 편집의 기본규칙이다. 아침의 평온함은 한통의 음성 메시지로 산산조각나고 그것이 환기한 기억들이 파편화되어 제시된다. 퍼즐이 완성되면 관객은 이 가정이 얼마나 위태로운 욕망의 낭떠러지 위에 있는지 알게 된다.

기본적으로 이 작품은 <돌이킬 수 없는>과 쌍둥이처럼 닮았다. <돌이킬 수 없는>은 느닷없는 폭력으로, 상실된 연인을 향한 애절한 마음을 회귀적 구성을 통해 극대화했다. 그들의 사랑이 온전했던 시절을 가시화하는 이미지는 회복될 수 없는 과거에 대한 절망감을 증폭시켰다. <러브> 역시 센티멘털 섹슈얼리티가 완전히 고갈된 현재로부터 그것으로 충만했던 과거로 회귀하는 형식을 취했다. 머피의 간절함은 다양한 플래시백을 통해 설득을 시도한다. 그러나 <돌이킬 수 없는>에서 완벽한 과거가 시간의 역순적 배치에 의해 회복된 것에 반해 <러브>의 플래시백은 오히려 파국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더 적나라하게 노출한다. 오히려 처음의 그 센티멘트는 결코 회복될 수 없다는 사실만 절감케 한다. 그 절망의 심연 한가운데에 남자와 그의 아들, 그리고 감독 자신이 있다.

쾌락은 소진된다

머피는 일렉트라(아오미 뮈요크)를 공원에서 만나 한눈에 사랑에 빠졌고, 마음과 몸을 바쳐 사랑을 나눴다. 그들의 연애는 머피가 만들고 싶었던 영화 그대로였다. “감상적인 섹슈얼리티”, “사랑의 한가운데에 있는 섹스”. 그들은 감정으로 벅차올랐고, 육체를 탐했고, 관계의 영원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머피의 말대로 “영원은 너무 길”었고, 당연히 극한에 있었던 쾌락은 점차 소진되었다. 그들은 감정의 부족분을 자극으로 대체했다. 그리고 강도에 집착한 나머지 감정의 방향을 살피지 않았다. 자극은 마약, 불륜, 외도, 스리섬, 멀티플섹스 등으로 확장되었다. 하지만 서로를 향한 ‘사랑’이라고 믿었던 강렬한 열정은 상처로 되돌아왔고,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더 강한 자극을 구했다. 그들은 점차 ‘사랑’이라는 본래의 목적을 상실한 채 자극에 중독되어갔다. 감독은 머피와 일렉트라의 강렬한 사랑과 혼란스러운 감정을 보여주기 위해 숏의 사이즈를 대체로 클로즈업, 바스트숏, 미디엄숏으로 한정하면서 그들을 화면 안에 타이트하게 잡아두었다. 처음에는 순백과 화사한 오렌지빛이었던 연인의 침상은 관계가 파국으로 치달을수록 질투에 찬 그린과 분노에 찬 레드로 바뀌어간다.

<돌이킬 수 없는>이 회복될 수 있는 과거를 가진 것처럼 보인 이유는 죽음이 그들의 관계를 연인으로 박제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러브>에서 남자는 연인을 깨고 나와 아버지가 되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순정보다는 오히려 영원한 순정의 불가능성에 관한 것으로 읽어야 한다. 섹스는 그것의 목표가 쾌락일지라도 재생산을 미끼로 유혹할 때 가장 에로틱해진다. 그/그녀가 나와 아이를 갖는, 어떤 확정적인 미래를 꿈꾸고 있다고 믿는 찰나가 (그것이 순간적 진실이든, 영원한 약속이든)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감정이 극대화되는 지점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판타지가 현실이 될 때 그 에로틱한 욕망은 오히려 소멸되고 만다는 데서 딜레마가 발생한다. 머피가 일렉트라를 그토록 사랑한다고 믿는 것은 그녀가 그의 아이를 잉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머피가 자신의 아이를 잉태한 일렉트라를 보는 마지막 시퀀스의 판타지는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욕망이며, 바로 그 이유로 인해 완벽한 것으로 오인된 것에 대한 갈망이다(반대로 머피의 오미(클라라 크리스틴)에 대한 강렬한 욕망은 그녀가 그의 아이를 갖는 순간 소멸되었다).

그는 현실로 돌아와야 했다

일렉트라와의 파국을 촉발한 전 남자친구 ‘노에’와 그들의 관계를 완벽하게 단절시킨 머피의 아들 ‘가스파’, 그 둘을 합치면 감독이 된다. 전 남자친구 노에는 누군가의 남편이자 아버지였고, 머피는 가스파를 통해 아버지가 되었다. 이런 작명에서, <돌이킬 수 없는>에서 <러브>로 귀결된 감독 자신의 인식적 전환을 읽을 수 있다. 파국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 머피는 “우리는 서로를 영원히 보호해주자”는 일렉트라와의 유혹적이지만 파멸적인 포옹에서 풀려났다. 어쩌면 첫 장면에서 일렉트라의 엄마로부터 걸려온 전화는 그가 일렉트라를 욕망했던 긴 꿈으로부터 깨어나 현실로 돌아와야 함을 알리는 신호음이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집으로부터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 채 일렉트라의 행방을 쫓았던 길고 긴 하루는, 일렉트라와의 샤워(과거), 아내의 실망어린 얼굴(현재), 아들 가스파의 포옹과 울음(현재) 그리고 다시 일렉트라와의 포옹(과거)으로 끝난다. 그가 겪는 고통의 진짜 원인은 일렉트라와의 이별이 아니라 완벽하게 에로틱한 센티멘트에 도달했던 자아의 상실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 시퀀스에서 옛 애인에게로의 회귀를 갈구하는 머피의 내면이 도달하게 될 귀착지는 일렉트라의 귀환이 아니다. 본질적으로 찰나적일 수밖에 없는 센티멘털 섹슈얼리티에 대한 영속적인 갈망이 도달하게 되는 파국에 대한 인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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