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와 나>는 결혼식을 앞두고 순영(정연주)이 아기(손예준)와 전역을 앞둔 남자친구 도일(이이경)을 두고 가출하면서 시작된다. 도일은 아기가 자신의 아이가 아님을 알게 되고, 아기와 함께 행방이 묘연한 순영을 찾아나선다. 영화는 순영이 어디에 숨었는지 찾는 추리극이 아니다. 순영의 흔적을 좇아가면서 그녀의 과거와 현재를 알아가는 드라마이자 그 과정에서 조금씩 철이 드는 남자 도일의 성장담이다. 중앙대 연극영화과 졸업영화인 단편 <야간비행>(2011)으로 제64회 칸국제영화제 시네파운데이션 부문에서 3등상을 수상하고, <자전거 도둑>(2012), <여름방학>(2012) 등 여러 단편을 연출해온 손태겸 감독은 “이제껏 내 취향을 드러내는 작품을 만들어왔다가 <아기와 나>는 좀더 많은 관객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보여주려고 한 작업”이라고 장편 데뷔작을 내놓은 소감을 전했다.
-제목 때문에 동명의 일본 만화를 리메이크한 줄 알았다. (웃음)
=너무 좋아하는 만화다. 보통 ‘아기와 나’라는 제목을 달면 가족과 관련된 정서를 떠올린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 정서와는 다른 까닭에 관객이 배신당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 제목을 바꾸는 게 어떻겠냐는 의견도 있었다. 한만욱 촬영감독이 “슬레이트에 쓴 순간 이 제목대로 가게 될 거”라고 장담했다. 정말 그렇게 됐다.
-지인이 들려준 실화가 이야기의 출발점이라고 들었는데.
=아르바이트를 함께하고 있는 친구가 내가 영화를 전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했다. 결혼식을 올리지 않은 젊은 부부가 있는데, 어느 날 여자가 아이와 남편을 두고 집을 나간 사연이었다. 생활이 얼마나 힘들었기에 지갑과 휴대폰만 챙겨 도망갔을까. 남편은 아내를 찾느라 정말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하더라. 설상가상으로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도 알게 됐다. 냉정하게 얘기해서 자신의 아이가 아니기에 마음만 먹으면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음에도 그는 아직도 아이를 키우고 있다고 했다. 그렇게 행동할 수 있는 마음이 무엇일까. 극의 형식을 통해 그 감정들을 풀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혹시 아이가 있나.
=미혼이다. (웃음) 후반작업을 할 때 누나가 출산했다. 조카를 돌보는 게 생각했던 것과 많이 달라 아기를 잘 모르고 시나리오를 썼구나 싶었다. 시나리오를 쓰는 과정에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자문을 구했음에도 좀더 조사를 많이 하고 썼으면 좋았겠다 싶다.
-도일이 집 나간 순영을 찾아나서는 사건은 단순하다. 그런데 이 영화는 ‘순영이 왜 집을 나가 어디에 숨어 있는지’보다 ‘순영의 흔적을 좇으면서 그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아가는 과정’이 더 중요한 이야기 같은데.
=얘기한 대로 집 나간 아내의 흔적을 따라가는 서사인데 그건 취향에서 비롯된 구조다. 가령 데이비드 핀처의 <조디악>(2007)은 연쇄살인범을 쫓는 이야기인데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범인이 누구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작품이잖나. 긴 시간 동안 수사하면서 사건 때문에 사람들의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그려내는 이야기가 매력적이었다. <조디악>이 그랬듯이 도일이 순영을 찾기 위해 사람들을 만나면서 사라진 아내의 과거와 현재를 조금씩 알아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게 중요했다.
-그 과정에서 철없는 도일이 성장한다는 점에서 도일의 성장담이기도 하다.
=도일을 딱 나처럼 그려야겠다 싶었다. 나 또한 막내고, 떼쓰기를 좋아했다. 아이가 내 자식이 아님이 판명되면 아버지로서 주어진 책임을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누구나 아픔을 겪으면서 성장하는 법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바꿀 수 없는 건 받아들여야 하고, 그런 삶의 태도를 알아가는 모습을 그리려고 했다.
-도일은 겉으로는 철이 없지만 아이를 끝까지 책임지려는 모습을 보면 아주 막무가내는 아닌데.
=(이)이경씨와 함께 나눴던 얘기도 “얘(도일)가 나쁜 사람은 아니다”였다. 표현 방식이 서툴긴 하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테두리 안에서 잘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친구다. 이송희일 감독의 <백야>(2012)에서 얼굴에 삶의 다양한 층위를 담아낸 바 있는 이경씨가 도일의 내면을 빨리 캐치해주었고, 스스로를 도일에 대입을 많이 해 표현했다.
-아이를 두고 집 나간 순영을 마냥 나쁜 여자로 그려내지 않아 좋았다.
=누가 봐도 욕먹을 만한 행동을 했다고 쉽게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나. 당사자의 정확한 상황과 내면을 잘 모르고 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한 행동과 그 행동의 단서를 이해하려면 시간이 충분히 필요하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영화인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2003)를 보면 같은 사건을 두고 가해자와 피해자의 입장이 각기 다르지 않나. 순영 또한 그럴 만한 사정이 있기 때문에 쉽지 않은 결정을 내렸을 거다.
-정연주 배우의 어떤 면이 순영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했나.
=윤가은 감독의 단편영화 <손님>(2011)의 마지막 시퀀스에서 어려운 상황에 처한 여고생(정연주)의 여러 감정이 뒤섞인 얼굴을 보여주는데, 그 얼굴에 복합적인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 얼굴이라면 왜 아기를 두고 집을 나갈 수밖에 없었는지, 말을 하지 않고 끝낼 거면 왜 그렇게 고생을 했는지, 그런 복잡한 사연을 잘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기 역의 손예준은 어떻게 찾았나.
=아기에 얽힌 에피소드만 해도 책 한권이 나올 것 같다. 예준은 이보림 프로듀서의 사촌의 아기다. 시나리오를 준비할 때부터 그에게 이런 내용의 이야기를 쓸 거라고 공유했더니 이 프로듀서가 지나가는 말로 “촬영할 때가 되면 캐릭터에 맞는 나이가 될 거”라고 얘기해주었다. 예준의 부모님이 영화 촬영에 아주 호의적이셨고 예준이의 성격 또한 무던해 캐스팅할 수 있었다. 첫회차 촬영을 끝내고 예준이를 배웅하고 나니 참았던 눈물이 터져나왔다. 아기와 함께 촬영할 때 끈기가 있어야 하고, 배려를 해야 하며, 인내하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후 촬영 내내 어떻게 하면 아기가 만족스러운 상태에서 촬영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작업했다.
-아이가 있었더라면 영화가 지금과 많이 달라졌을까.
=딱 한번 그런 생각을 한 적 있다. 아무것도 몰라서 이렇게까지 철없고 가정적이지 않은 남자를 그려낼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아마도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고 있었더라면 이 이야기를 쓰지 못했을지도 모르고.
-칸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한 뒤 상업영화 연출 제의가 많았을 텐데 한국영화아카데미로 진학한 이유가 뭔가.
=칸국제영화제 수상은 큰일이었다. <야간비행>이 중앙대 연극영화과 졸업작품이었는데, 그 작품 이전에 한번도 각광을 받아본 적이 없었으니까. 상복과 인복이 있어 상을 받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몇 군데에서 (상업영화 연출) 제의가 들어오니 시나리오가 더 안 써지더라. 많이 부족하니 좀더 배우고, 훈련하기 위해 한국영화아카데미로 진학했다. 이제껏 내 취향을 드러내는 작업을 해오다가 <아기와 나>는 대중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쓰려고 고민한 끝에 내놓은 작업이다. 좋은 훈련과 시간이 되었다. 기회가 또 주어진다면 지금보다 더 현명하게 작업할 수 있을 것 같다.
-차기작은 무엇인가.
=<아기와 나> 덕분에 몇 군데로부터 제안이 있었지만 모두 스쳐 지나갔고, 지금은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작은 이야기를 써보려고 구상 중이다. 마틴 스코시즈가 오랫동안 영화를 만드는 모습을 보면서 그처럼 작업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싶다. 항상 그런 꿈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