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러빙 빈센트> 반 고흐를 향한 ‘애도일기’
2017-11-23
글 : 한창호 (영화평론가)
<러빙 빈센트>가 죽은 고흐를 다시 기억하는 방법

말년의 구로사와 아키라는 자신의 어린 시절 꿈을 그린다. 10대 시절 화가 지망생이었던 그가 꾼 꿈은 ‘사랑하는 빈센트’(Loving Vincent) 반 고흐의 그림 속을 걷는 것이다. 옴니버스 영화인 <꿈>(1990)의 한 에피소드를 통해서다. 구로사와의 영화 속 분신인 어떤 일본인 화가는 전시장에 걸려 있는 반 고흐의 그림을 바라보다, 그 그림들 속으로 들어간다. 스크린은 반 고흐의 마지막 정착지인 프랑스 북부 오베르 시절 풍경화로 바뀌고, 화가는 그림 속을 걷는 ‘황홀한’ 경험을 하는 것이다. 시간이 멈춘 공간인 그림 속에서의 산책은 노감독이 고백하는 죽음에의 명상처럼 비쳤다. 죽음을 얼마 남겨놓지 않았기 때문일까? 구로사와는 반 고흐의 그림 속에서 자신의 죽음을 본다. 풍경화 <까마귀가 나는 밀밭>(1890) 속, 저 멀리 있는 지평선 너머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이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꿈을 다시 꾸다

신예감독 도로타 코비엘라와 휴 웰치먼의 애니메이션 <러빙 빈센트>(2017)는 반 고흐에 대한 또 다른 꿈을 펼친다. 이들은 우선 죽음의 명상보다는 회화의 활기를 소환한다. 구로사와가 스크린 위에 반 고흐의 오베르 시절 그림들을 몇점 소환했다면, 코비엘라와 웰치먼은 세계에 흩어져 있는 반 고흐의 유명한 그림들을 대거 끌어들인다. 반 고흐의 그림들은 유화로 복제되고, 복제된 그림들이 스크린을 가득 메우고 있다. 이를테면 큰 화면에 전시된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1889)을 상상해보시라. 반 고흐의 그림 자체로 스크린을 가득 메운다는 아이디어는 코비엘라와 웰치먼이 구로사와에게 크게 빚진 것이다.

<러빙 빈센트>는 여기에 반 고흐의 자살에 대한 의혹이라는 스토리를 입혔다. 애니메이션은 실제 배우들의 연기 위에 그림을 입히는 일종의 로토스코프(rotoscope) 방식인데,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웨이킹 라이프>(2000)와 비슷한 이미지다. 그런데 영화의 그림들이 전부 반 고흐 작품들의 복제인 까닭에 관객은 영화 내내 화가의 전시장에, 그것도 그림이 확대된 전시장에 들어간 듯 한 환영에 빠지게 된다. 아마 이것이 <러빙 빈센트>가 관객에게 선사하는 가장 큰 쾌락일 것이다.

이야기는 남프랑스 아를에서 시작한다. 고흐가 죽은 지 1년 뒤다. 그의 대표작들은 삶의 마지막 시기인 아를 시절(1888)에서 시작하여, 정신병동에 입원해 있던 생 레미 시절(1889), 그리고 37살에 자살한 오베르 시절(1890)에 이르기까지 3년 동안에 집중돼 있다. 아를에 머물 때, 고흐는 이웃 가운데 우편배달부 조제프 룰랭의 가족들을 많이 그렸다. 가장 친한 이웃인 셈이다. <러빙 빈센트>의 내레이터는 룰랭 집안의 큰아들 아르망이다. 빈센트가 동생 테오에게 쓴 마지막 편지를 아버지는 아직 배달하지 못했는데, 아들에게 대신 전달하라는 임무를 맡긴다. 부친은 한 가지 의문을 덧붙인다. 빈센트는 죽기 불과 6주 전 자신에게 보낸 편지에서 너무나 편안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었는데, 갑작스런 자살이 믿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러빙 빈센트>는 화가의 죽음에 관한 의문을 푼다는 스릴러의 외피를 입혀놓았다.

이것은 오슨 웰스의 고전 <시민 케인>(1941)의 구조와 비슷하다. 케인의 죽음에 관한 비밀을 풀기 위해 내레이터가 케인과 관련된 사람들을 인터뷰하며(그럼으로써 많은 플래시백이 등장하며), 죽음의 비밀에 접근하고 있는 구조를 떠올리게 해서다. <러빙 빈센트>에서도 여러 플래시백을 통해 빈센트의 정체성에 관한 조각들이 하나씩 모이고, 최종적으로는 하나의 정체성으로 단정할 수 없는 복합적인 빈센트의 모습이 그려지는 결말도 비슷하다. <러빙 빈센트>에서 아르망이 만난 사람들은 고흐의 초상화에 등장한 인물들이다. 이를테면 화구상인 탕기 영감, 오베르의 하숙집 딸 아, 오베르의 주치의 폴 가셰 박사, 가셰 박사의 딸 마르그리트 등이다. 이들 가운데 어떤 이는 반 고흐를 ‘악마’로, 또 다른 이는 극적으로 다르게 천생 ‘예술가’로 기억하는 식이다.

신화가 된 반 고흐의 죽음

반 고흐의 죽음이 자살이 아닐 것이란 소수 의견은 이전에도 조금씩 나왔다. 결정적인 전환점은 2011년 퓰리처상 수상 작가인 그레고리 화이트 스미스와 스티븐 네이페가 공동 저술한 <화가 반 고흐 이전의 판 호흐>의 출판이다. 이 평전에서 수많은 자료를 수집했던 두 작가는 반 고흐의 죽음은 자살이 아니라고 주장한다(책은 1천쪽 정도 된다). 거의 매일 편지를 쓸 정도로 메모광이었던 반 고흐가 유서를 남기지 않은 점, 전시회를 앞두고 열심히 작품을 완성하고 있던 점, 종교적 입장(반 고흐는 한때 선교사였다) 때문에 평소에 자살에 반대한 점 등이 주요한 이유로 꼽혔다. 두 작가의 주장은 사고사에 비중을 둔다. 당시 오베르에 머물던 파리 출신의 한량들이 빈센트와 함께 권총을 갖고 놀다 사고를 냈을 것이란 주장이다. <러빙 빈센트>는 이 책의 주장을 적극 참조하고 있다. 더 나아가 <러빙 빈센트>는 살해 가능성까지 제기한다. 누군가 빈센트의 배를 쐈고, 빗맞았기 때문에 사고 이후 이틀이 지난 뒤 빈센트가 죽었다는 것이다.

수많은 인터뷰가 진행됐지만 반 고흐가 어떤 사람인지, 또 죽음의 실체적 사실이 무엇인지, 분명하고 단일한 답은 없다. 아마 그래서 반 고흐는 더 사랑받는 것 같다. 복잡한 정체성, 특히 신화가 돼버린 ‘죽음의 신비’가 그의 삶을 더욱 ‘예술’로 승화시키기 때문이다. 볼프강 모차르트, 프리드리히 니체 또는 제임스 딘처럼 죽음 자체가 신화가 돼버린 하늘의 별 같은 예술가들이 얼마나 많은가? 빈센트는 그 신비의 성좌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빈센트 반 고흐에 관한 전범 같은 전기영화는 세편 있다. 할리우드 고전인 빈센트 미넬리의 <열정의 랩소디>(1956), 할리우드 소수파의 대표인 로버트 알트먼의 <빈센트와 테오>(1990), 그리고 프랑스 작가 모리스 피알라의 <반 고흐>(1991) 등이다. <열정의 랩소디>는 반 고흐와 고갱의 우정과 파탄에, <빈센트와 테오>는 두 형제의 유별난 형제애에, 그리고 <반 고흐>는 화가의 마지막 오베르 시기에 집중하고 있다. 삶의 마지막 시기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러빙 빈센트>는 모리스 피알라의 작품을 적극 참조하고 있다. 말하자면 두 작품 모두 반 고흐의 죽음을 애도하는 셈이다. 허망하고 외롭고 이해되지 않는 쓸쓸한 죽음 말이다.

편지를 전달해야 할 임무를 맡은 아르망 룰랭은 영화의 마지막에서 반 고흐가 남긴 편지를 읽는다. 빈센트는 그가 그렇게도 많이 그렸던 별을 보며 품었던 생각을 써놓았다. 스크린에는 아를에서 그렸던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1888) 속의 수많은 별들이 떨어지고 있다. 편지는 ‘우리는 죽어서 저 별이 되리라’는 상상이다. 아마 화가는 푸른 밤에 외롭게, 높이 떠 있는 별을 보며 수없이 동일시를 했던 것 같다. 그러기에 밤하늘의 별은 이국에서 높고 외로운 별을 보던 빈센트 반 고흐 자신처럼 비치는 것이다.

코비엘라와 웰치먼 감독은 아를 시절부터 오베르 시절까지, 약 3년간 그렸던 빈센트의 그림들을 끝없이 소환해낸다. 마치 그것은 죽음 직전에 볼 수 있다는 삶의 전 과정이 주마등처럼 전시되는 것과 같다. 이 모든 그림에의 오마주는 결국 화가의 죽음에 대한 ‘완결되지 않은’ 애도처럼 보인다. 말하자면 두 감독은 빈센트의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다시 죽은 자를 불러내듯 강렬한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그 사랑의 크기와 진정성은 반 고흐 관련 전기영화의 전범을 만든 세 명장의 열정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러빙 빈센트>는 젊은 영화인들이 쓴 간절한 ‘애도일기’인 셈이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