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의 독립영화를 결산하는 자리이자 앞으로 개봉할 독립영화를 미리 만나는 자리가 바로 서울독립영화제다. 올해로 43회를 맞는 서울독립영화제2017이 11월 30일부터 12월 8일까지 CGV아트하우스 압구정,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 시네마테크전용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다. ‘MADE IN NOW’라는 슬로건에서 짐작 가능하듯, 올해 서울독립영화제는 ‘지금’의 독립영화가 건져올린 동시대의 이야기, 동시대의 감수성에 주목한다. 서울독립영화제2017에서 상영되는 작품은 총 111편. 이중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처음으로 상영되는 프리미어 작품들 위주로 추천작을 뽑았다. 극영화, 다큐멘터리, 장편, 단편 할 것 없이 독립영화만의 패기와 실험정신을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 될 것이다.
<너와 극장에서>
유지영, 정가영, 김태진 / 2017년 / 개막작
개막작 <너와 극장에서>는 ‘극장’이라는 소재를 공유한 세편의 단편, <극장쪽으로> <극장에서 한 생각> <우리들의 낙원>을 엮은 옴니버스다. 유지영 감독의 <극장쪽으로>는 매일 비슷한 하루를 반복하는 직장 여성의 이야기. 아침에 눈을 뜨면 배달 온 우유를 먹고 점심에는 혼자 오므라이스를 먹는 그녀의 일상에 어느 날 기분 좋은 일탈의 기운이 감지된다. “6시 오오극장에서 만나요.” 누가 남긴 건지 알 수 없는 포스트잇을 발견한 그녀는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오오극장으로 향한다. 그러나 누구를 기다리는지 알 수 없는 기다림이 길어지고, 낯선 골목에 들어섰다 길까지 잃어버린다. <극장쪽으로>는 평범했던 일상에 균열을 일으키는 진원지로서 극장이라는 공간을 제시하고, ‘극장에서 만나요’라는 말이 주는 설렘을 새삼 상기시킨다. 정가영 감독의 <극장에서 한 생각>은 스릴러영화를 만든 영화감독 정가영이 극장에서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하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관객의 질문을 받던 중 난데없이 유부남을 사랑했던 과거를 고백하고, 자신이 토렌토 유저라고 당당히 밝히던 정가영 감독은 급기야 무례한 관객을 향해 총을 겨눈다. 자신을 캐릭터 삼아 현실과 영화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방식이 흥미로우며, 전작 <비치온더비치>(2016), <밤치기>(2017)와 마찬가지로 발칙한 도발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김태진 감독의 <우리들의 낙원>은 출납 리스트를 들고 잠적한 회사 후배이자 시네필 민철을 찾기 위해 서울의 거리를 헤매는 은정의 여정을 따라간다. 은정이 결국 민철을 찾게 되는 곳은 서울의 한복판에 위치한 서울아트시네마. 그곳에선 프랭크 카프라의 영화 <우리들의 낙원>(1938)이 상영되고 있고, 카프라의 영화가 시작되면 영화는 끝이 난다. 시네필들의 영원한 ‘낙원’이 실은 우리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귀여운 소동극으로 보여준다.
<카운터스>
이일하 / 2017년 / 본선경쟁
다카하시. 그는 전직 야쿠자다. 지금은 일본 내 혐오데모에 반대하는 카운터스의 상징적 존재가 됐다. 카운터스 내에서도 폭력으로 혐오데모 주동자들과 맞짱 뜨는 거친 남자들을 오토코구미라고 하는데, 다카하시는 오토코구미의 단체장이다. 21세기 한낮의 도쿄 거리에서 “일본에서 한국 여자를 보면 돌을 던져도, 강간을 해도 무방하다”고 외치는 ‘재특회’(재일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 모임) 회원들이 더이상 헤이트스피치를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폭력도 불사하는 거친 남자가 다카하시란 얘기다. 이일하 감독의 다큐멘터리 <카운터스>는 “약자를 구하는 의리 있는 건달” 다카하시를 중심으로, 카운터스가 불러일으킨 일본 사회의 변화를 담아낸다. 코믹스의 히어로 같은 다카하시가 이 영화의 매력 지분을 다수 차지한다.
<해원>
구자환 / 2017년 / 특별초청
구자환 감독은 전작 <레드 툼>(2013)을 통해 국민보도연맹 사건의 진실을 파헤쳤다. 다큐멘터리 <해원>은 <레드 툼>의 심화 버전 같은 작품으로, 국가가 저지른 민간인 학살의 역사를 다시금 조명한다. 해방 이후, 남한 단독 정부가 수립되기까지 한반도의 정세는 불안정했다. 이승만은 반정부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민간인 학살도 마다하지 않았다. 1947년부터 불거진 제주 4·3항쟁과 1948년 여순사건이 바로 학살의 전주곡이었다. 학살극의 주동자는 대부분 친일 출신 경찰과 군인이었다. 영화는 학살 당시 지휘관의 이름을 일일이 공개한다. 더불어 영화는 보도연맹 사건을 비롯한 과거사가 누군가가 임의로 덮을 수 있는 ‘지나간’ 역사가 아니라는 것을 힘주어 말한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진행한 방대한 양의 증언들이 영화에 힘을 싣는다.
<국경의 왕>
임정환 / 2017년 / 새로운 선택
유진은 폴란드에 도착한 첫날부터 사기꾼처럼 보이는 수상한 남자들과 꽃집을 운영하는 북한 사람을 만난다. 이상한 우연이 빈번히 발생하는 유진의 여행길엔 동철이란 남자도 불쑥불쑥 등장한다. 사실 <국경의 왕>의 줄거리를 요약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영화에는 유진과 동철이 구상한 영화 속 영화의 이야기가 자유분방하게 섞여 있는데, 낯선 곳에서 어리둥절한 만남을 반복하는 인물들의 꿈같은 이야기는 논리로 꿰맞춰지지 않는다. 모호함, 산만함, 허술함이 곧 <국경의 왕>의 개성이다. 영화 속 상상과 영화 속 현재가 혼재하는 만큼 배우들도 1인다역을 소화한다. 특히 각각 유진과 동철 역을 맡은, 앞서 <초행>으로 호흡을 맞췄던 김새벽과 조현철의 천연덕스런 연기를 감상하는 재미도 크다. 라오스를 배경으로 한 감독의 전작 <라오스>(2014)와 여러모로 닮은꼴의 작품이다.
<피의 연대기>
김보람 / 2017년 / 새로운 선택
여성은 한달에 한번 생리를 한다. 그것이 자연스런 생리현상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이상하게도 오랫동안 생리는 여성들만의 비밀스런 이야기로 남아 있었다. 최근엔 ‘자유롭게 피 흘리기’라는 캠페인이 세계적으로 퍼져나갔다. 다양한 생리용품을 소개하는 인기 유튜버도 생겨났고, 생리대 무상공급을 공략으로 내건 정치인도 있다. 네덜란드 친구와 탐폰이 좋냐, 생리대가 좋냐는 이야기를 나누다 그것이 시발점이 돼 다큐멘터리 <피의 연대기>를 만든 김보람 감독은 자신의 생리컵 사용 경험담은 물론이고, 한국 여성들의 생리에 대한 인식과 경험을 다양하게 들려준다. 그러니까 <피의 연대기>는 피의 연대기(年代記)이자 여성들의 연대기(連帶記)로서 여성의 몸에 대한 담론을 생성한다.
<말해의 사계절>
허철녕 / 2017년 / 본선경쟁
아흔의 김말해 할머니는 초고압 송전탑이 세워진 경남 밀양시 상동면 도곡마을에 산다. 그리고 한국전력과의 합의를 거부하고 있는 마을의 마지막 인물이다. “하루하루 살아온 걸 일기로 쓰면 책을 모아도 몇권을 모은다 안 카더나. 아무도 내 삶을 몰라준다 싶어.” 글을 모르는 할머니를 대신해 허철녕 감독은 카메라로 할머니의 생애사를 기록한다. 밀양 송전탑 투쟁으로부터 할머니의 삶을 거슬러 올라가면, 보도연맹 사건으로 남편을 잃은 일이며 빨갱이의 자식이 아니란 걸 증명하기 위해 베트남전에 참전한 아들의 이야기며, 굴곡진 한국 현대사가 줄줄이 딸려나온다. 꼿꼿한 마음과 달리 노쇠한 육체가 부각되는 장면들에선 먹먹한 슬픔도 느끼게 된다. 옴니버스 다큐멘터리 <밀양, 반가운 손님>(2014)에 참여한 허철녕 감독의 연이은 밀양 작업이다.
<소은이의 무릎>
최헌규 / 2017년 / 특별초청
교복 치마 대신 체육복 바지가 편한 소은은 농구가 좋다. 하지만 학교 농구부가 인원수 부족으로 해체되면서 소은은 농구를 할 수 없게 된다. 학교는 이참에 팀을 없애버리려 하고, 친구도 부모도 농구가 아닌 다른 길을 찾아보라 한다. 하지만 남몰래 프로 농구선수로서의 꿈을 키웠던 소은의 마음은 쉽게 정리되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소은이 사는 소도시에 영화 촬영차 내려온 영화배우 유진과 유진의 팬이자 소은의 같은 반 친구 용식이 소은의 꿈을 응원한다. 영화는 학원 스포츠물로서의 흥밋거리를 전시하는 대신 소은이라는 굳센 소녀에 오롯이 집중한다. 소은은 출중한 능력 대신 꿈을 가졌고, 운명 같은 조력자 대신 묵묵히 응원해주는 친구들을 가졌다. 소은을 둘러싼 환경은 지극히 평범한데, 그러한 리얼리티가 결국 소은을, 이 영화를 응원하게 만든다.
한국단편의 경향을 읽다
올해 서울독립영화제에 출품된 단편들에는 여성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워 여성들의 일상에 귀기울이는 작품들이 많았다. 더불어 청(소)년 문제와 소수자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도 꾸준히 만들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선 <산나물 처녀> <자유로> <12月4日>은 여성 캐릭터가 돋보이는 작품들이다. 김초희 감독의 <산나물 처녀>는 <선녀와 나무꾼>의 성역할을 뒤바꾼, 귀여운 상상력으로 무장한 작품이다. 평생 함께할 짝을 찾아 미지의 행성에서 지구로 온 여인 순심(윤여정)과 산나물 캐는 여인 달래(정유미)가 하늘에서 목욕하러 내려온 남자들을 만나 짝을 이뤄 살아가는 이야기로, 생활력 강한 미혼 여성들의 솔직한 이야기를 담았다. 윤여정, 정유미, 안재홍의 출연도 반갑다. 황슬기 감독의 <자유로>는 택시운전사 일을 그만두고 딸이 있는 중국으로 갈 계획을 세운 여진이 오랜 친구 주희와 공항으로 마지막 드라이브를 떠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친구에게 손찌검하는 남자를 패대기치는 여진과 엄마의 등골을 휘게 만드는 친구 딸에게 직언하는 주희의 모습이 속시원하게 그려진다. 두 중년 여성의 드라이브 신은 <델마와 루이스>(1991)를 연상시킨다. 김지안 감독의 <12月4日>의 주인공도 두 여성이다. 결혼과 취직보다 글쓰기가 소중한 서른의 재희는 신춘문예 마감일을 앞두고 책방 겸 찻집을 운영하는 시인을 만난다. 두 여성이 나누는 대화는 특별할 것 없지만, 영화는 어느 평범한 날의 따스한 온기를 잘 담아낸다. 이승엽 감독의 <불청객> 역시 일상을 사실적이고 따뜻하게 포착한다. 갑작스레 아들의 집을 방문한 엄마와 그 방문이 당황스런 아들 정호의 이야기는, 아들이 남자애인과 동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엄마가 알게 되면서 절정을 향한다. 하지만 영화는 극적인 순간을 자극적으로 연출하지 않는다. 담백하게 리얼리티를 구축하는 솜씨가 좋다. 신지훈 감독의 <직무유기>는 군대에 잘 적응하지 못한 이등병 이승우가 소대의 부조리와 불만을 고발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오프닝 신은 제외하고) 원신 원컷으로 구성한 작품이다. 개인보다 집단이 우선인 군대에서 비극은 어떻게 발생하고 또 은폐되는지를 보여주는 영화로, 단편적 상황을 통해 전체를 조망하는 연출이 인상적이다. 아이들의 심리에 밀착한 두편의 드라마, 우경희 감독의 <너의 말>, 김다솜 감독의 <알로하>를 보면서는 <우리들>(2016)을 만든 윤가은 감독의 영향력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경험의 공유, 독립영화를 말한다
서울독립영화제2017가 두번의 포럼을 준비했다. 12월 4일 오후 3시30분 CGV아트하우스 압구정 ART1관에서 열리는 토크포럼1에선 제작에서 배급까지 손수 담당했던 독립영화 창작자들의 경험을 듣는 자리가 마련된다. <분장>의 남연우 감독, <불온한 당신>의 이영 감독, <춘천, 춘천>의 장우진 감독, <꿈의 제인>의 조현훈 감독, 제작사 아토의 제정주 프로듀서가 패널로 참석해, 자체 제작 및 배급 전선에 뛰어들었던 경험을 공유할 예정이다. 다음날인 5일 시네마테크전용관 서울아트시네마에선 ‘블랙리스트의 헌법적 죄책’이라는 주제의 강연과 토크포럼2 ‘블랙리스트를 넘어서, 새로운 영화정책을 말하다’가 열린다. 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성 및 관리라는 상징적 사건을 통해 과거를 반성하고, 보수정권 10년 동안 후퇴한 영화정책을 어떻게 바로 세울 수 있을지 논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고영재 한국독립영화협회 대표가 사회자로 참석하고, 박광수 강릉독립예술극장 신영 프로그래머, 이지연 한국독립영화협회 사무국장, 조영각 영화진흥위원회 위원, 백재호 감독 등이 패널로 참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