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민의 오독의 라이브러리]
최양일의 <10층의 모기>와 <막스의 산>
2017-11-30
글 : 박수민 (영화감독)
그 경찰, 기이하다?
<10층의 모기>

수험생들이 큰 시험을 치르고 나니 본격적으로 추운 겨울이 온다. 한국의 모 영화학교는 학생 선발 절차 중 최종 면접이 지원자의 멘털을 깨부수는 걸로 유명했다. 10년 전 나도 면접을 본 후 자취방에 돌아와 식음을 전폐하고 일주일 내내 천장만 바라봤으니까. 이 영화학교의 놀라운 점은 합격했을 때는 자신이 영화천재라 믿으며 위풍당당하게 입학하지만, 졸업하는 시점에는 삶과 예술 양쪽에서 모두 절망의 끝에 도달해 영화를 때려치울까 진심으로 고민하게 만든다는 것. 아무튼, 면접 중 심사위원들에게 들었던 온갖 말들이 지금도 뇌리에 생생한데, 그중 하나가 모 교수님이 내 자기소개서를 읽고서 지적했던 “전형적인 <키노> 세대”라는 표현이었다.

영화는 상상과 다르다

<키노>, 한 시대를 앞서 밝혔던 영화지의 거룩한 이름. <씨네21> 지면에 이 이름을 적자니 묘한 배덕감이 든다. 중2병 걸린 영화애호가 소년에게 키노는 각별한 의미이긴 했지만 거기에 세대라는 개념이 붙을 정도였을까? 그 표현의 의미는 ‘얘야, 넌 그냥 어려서 그 책 좀 들여다봤던 걸 갖고 영화에 대한 굉장히 헛된 꿈을 키웠구나’였을 거다. 뭐, 정말 그랬다. 10대의 나는 <키노>를 통해 영화를 읽었다.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읽으면서 영화라는 매체를 동경했다. 게임 디자이너나 만화가가 되려던 꿈이 망할 영화감독에 밀리고 말았다. 무엇보다 내게 그 잡지는 미지의 영화를 한국에서 가장 먼저 접하는 방법이었다. 나는 책에 실렸지만 아직은 볼 수 없었던 영화들을 상상했고, 보길 갈망한 영화들의 리스트를 만들어 복수하듯 지워나갔다.

그 리스트에 최양일 감독의 영화들이 있었다. 궁금하여 무척 보고 싶었던 작품은 그의 대표작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月はどっちに出ている, 1993)가 아니었다. 나는 <10층의 모기>(十階のモスキト, 1983)와 <막스의 산>(マ-クスの山, 1995), 두 경찰영화가 보고 싶었다. <키노>에서 접한 몇줄 기사와 스틸 한두장으로 상상만 했던 두 영화는 당시 ‘하드보일드’에 대해 오해하고 있던 나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것이 태도라는 사실을 깨닫기 전, 어떠한 유형의 스타일이라고만 추정하던 때였다. 피가 철철 흐르고 우르르 죽어나가면서도 남자들이 비릿하게 웃으면 하드보일드인 줄만 알았다. 그러나 이 두 영화는 그런 스타일이 아니었다. 한 경찰은 선을 넘고, 다른 경찰은 넘지 않는데 둘 다 일개 공무원일 뿐이었다.

당시 기자가 영화를 안 보고 상상으로 기사를 썼을 리는 없고 내가 글을 읽고 멋대로 상상한 모양이지만, 나는 <10층의 모기>를 실제로 보기 전까지 오랫동안 이런 스토리로 알고 있었다. 술, 여자, 도박 등의 빚에 야쿠자 사채까지 끌어다 쓴 형사가 권총도 잃어버리고 그러다 결국 은행까지 턴다. 자신의 아파트 10층 집 안에서 버티며 그를 잡거나 죽이려는 바깥의 경찰 및 야쿠자와 동시에 대치하는데, 경찰 및 야쿠자들은 시시각각 한층씩 올라오며 숨통을 조여오고, 이 초조한 상황에서 형사는 집 안에 있는 한 마리 모기를 보고 “과연, 이게 내 처지로구나!” 한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기타노 다케시가 주인공인 줄만 알았다. 나중에 2011년이 되어서야 극장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었던 영화는 상상과 많이 달랐다.

세상은 변하고 있어

영화는 컴퓨터 매장에서 뜬금없이 시작한다. 주인공은 뜬금없이 컴퓨터가 사고 싶다. 카탈로그를 들고 매장을 돌아보다가 베이식 코드를 입력 중인 한 소년 앞에 서서 묻는다. “너 뭐 하고 있니?” 그러고는 컴퓨터 화면에 입력한 텍스트로 제목이 뜬다. 형사도 아닌 겨우 파출소 주임인 주인공 히로는 이혼한 전처의 위자료 부담에 등골이 휜다. 승진시험은 번번이 낙방이고, 경정도박에선 당최 따본 적이 없고, 전처가 데려간 딸은 하라주쿠에서 불량한 녀석들과 어울린다. 없는 돈을 사채와 돌려막기로 융통하기 시작한 히로는 혼자 사는 아파트에 커다란 컴퓨터를 사들고 온다. 그러고는 띄엄띄엄 ‘I AM POLICEMAN’이라고 친다. 나는 경찰인데 지금 뭐 하고 있는 걸까? 그래서 물음표. ‘I AM POLICEMAN=?’ 실제 삶에선 일본 록의 전설로 불리는 우치다 유야는 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적역이었다. 그는 심각한 마초가 아니라 그냥 딱 하급 공무원의 얼굴을 하고 있다. 밖으로 내보이지 않는, 좀체 모를 감정의 사내가 저지르는 폭력의 무표정. 나는 이런 얼굴이야말로 진정한 경찰의 얼굴, 법 집행자의 얼굴일지 모른다고 느꼈다. 이런 얼굴의 남자가 슬슬 정신줄을 놓기 시작하니 수상하게 설득되었다.

이 “번뇌의 컴퓨터 경찰”은 돈을 마구 빌리기 시작하면서 이상하게 성욕이 증가한다. 그는 주위의 모든 여자들과 하려고 하고, 끝내 한다. 단골 술집의 호스티스와 마담은 물론 슈퍼마켓에서 마주친 펑크족 언니, 동료 여경, 비 오는 날 전처 집을 찾아가선 밉살스런 와이프하고도 한다.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열심히 하는 섹스는 괴이하다. 두번 반복되는 대사가 있다. 한번은 여자를 덮치려는 히로가, 다른 한번은 돈 타러 온 히로의 딸이 한다. “세상은 변하고 있어.” 세상은 변하고 있는데 20년을 살아도 변할 기미가 안 보이는 인생과 직장을 붙잡고 사는 히로는 돈 없이는 변할 방법이 없다. 그런데 실은 돈도 그를 변하게 해주지 못한다. 슬금슬금 쌓여가는 빚과 독촉은 계속되고 히로는 그 무표정으로 나 몰라라 불안하게 버티다가 결국 폭주한다. 폭주는 신나지만 안쓰럽다. 나는 기타노 다케시의 경찰영화 <그 남자 흉포하다>(その男, 凶暴につき, 1988)와 <하나비>(1997)가 이 영화에 많은 빚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막스의 산>

이것이 하드보일드다

<막스의 산>은 선혈이 낭자한 스틸이 오랫동안 잊히지 않았고 인물들이 짓고 있는 심각한 표정이 완전 하드보일드로 보였다. 다카무라 가오루 원작 소설의 제목이 주는 느낌도 묵직했다. ‘막스의 산’이라니. 전공투 이야기가 섞인 만큼 칼 마르크스에 대한 함의가 있을 거라 마음대로 추측했다. 일본식 하드보일드라는 분류가 가능하다면 내가 주목하는 건 인의 없는 세계에서의 비정함보단 일본 경찰의 지극히 공무원적인 냉정함이다. 일본 형사에게선 낭만을 찾을 수 없다. 우치다 도무의 범죄 에픽 <기아해협>(飢餓海峽, 1965)에서도 느꼈지만, 그들은 그저 철저히 수사하는 공무원, 말 그대로 수사관이다. 인간적 연민의 표정은 어쩌다 뜸하게 지어 보일 뿐, 선을 넘는 경우는 비리경관의 사적인 복수극이라도 드물다. 일본식 하드보일드를 후카사쿠 긴지식 야쿠자영화와 기타 경찰영화로 또 나눈다면, 전자가 피가 끓을 때 후자는 피가 얼어붙는 느낌이다. 그래서 진정한 하드보일드는 경찰이 나오는 쪽이라는 생각을 한다.

우리의 경찰영화에서는 사건이 일어나면 처음 제복 입은 어르신들 여럿이 PPT 앞에서 감 놔라 배 놔라 하고는 정작 실제 수사는 한개 팀의 형사 몇몇만 하러 다닌다. 그런데 탐문부터 증거 수집까지 금방 해온다. 수사 체계가 우리와 다른 일본 경찰영화는 일개 소대쯤 되는 수사관들이 우르르 나와 매일 아침 조회 및 상향식 일일결산을 하듯 그날의 수사내용을 보고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우리나라 형사 같으면 지방 소도시 하나쯤은 한둘이서 조사를 다 하는 반면, 이들은 겨우 동 하나를 네 구역으로 나누어 한팀씩 조사하러 다닌다. 그러고는 서에 모여 일어서, 차렷, 경례, 앉아까지 다 한 다음 한명씩 돌아가며 조사내용을 발표한다. 내가 본 일본 경찰영화마다 이 과정을 그냥 넘기질 않았다. 얼마나 융통성이 없냐면, 명백한 증거물인 살인 흉기가 발견되어도 “바로 이거야!” 하고 다음 신으로 넘어가는 게 아니라 카데바까지 꺼내와서는 진짜 맞는지 아닌지 시체에 찍어본 다음에야 “매우 비슷하군” , 한마디 하는 식이다. 또 우리 영화의 형사들은 추격과 몸싸움에 적합한 옷을 입는 반면, 일본 형사들은 꼭 반듯한 정장에 바바리코트를 걸친다. 거기에 서류가방까지 드니 영락없는 시마 사원이나 과장. 범인을 몸으로 잡는다는 느낌이 아니다. <막스의 산>에는 이 정장 세트에 하얀 운동화를 신고 다니는 형사, 고다 경부보가 나온다. 유독 그만 운동화를 신는데 집에서 홀로 신발을 솔질해 씻는 장면도 들어간다. 열심히 뛰어다니는 형사라서? 영화에서 뛰는 일은 전혀 없다. 정장 아래 신은 운동화가 상징하는 건 시스템대로 움직이지만 어느 부분만큼은 타협하지 않는다는 그의 태도다. 감정에 휘둘리는 개인과 냉정한 공무원 사이의 어떤 균형이다.

나로서는 영화 <막스의 산>의 재미가 어린 연쇄살인범이나 표적인 ‘M.A.R.K.S.’ 이니셜의 엘리트 모임이 감추고 있는 비밀에 있지 않았다. 영화의 기이한 매력은 이것들을 수사하는, 하나도 재미없는 형사에게서 나왔다. 범인과 비밀을 숨긴 자들이 감정을 터뜨릴 때, 수사관들은 시종일관 냉정하다. 그들에게도 범죄 이면에 가려진 인간의 가여움이 보이긴 하지만 내색하지 않는다. 관객보다 먼저 형사가 흥분하는 정의감은 여기 없다. 그들은 그저 느릿느릿 하나씩 찾아내어 묻고, 알아내고, 끝내 잡는다. 경찰은 재판관이 아니며 할 일은 그게 전부다. 이 영화는 묵직한 감동이나 슬픔 같은 건 주지 않았다. 결말부 산에서 범인을 발견하고 보여주는 형사의 표정 정도가 감정의 전부였고 그나마도 억제한 상태였다. 이 영화에도 두번 나오는 대사가 있다. 형사가 말한다. “형사도 참 웃긴 직업이야.” 그렇지만 하나도 웃기질 않으니, 나는 이것이 하드보일드라는 걸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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