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로마서 8:37>이 품은 영화적 함의들
2017-12-05
글 : 김소희 (영화평론가)
종교는 영화에서 어떻게 재현되는가

신연식 감독이 여러 번 강조한 것처럼 <로마서 8:37>은 번뇌하는 젊은 전도사 기섭(이현호)의 기도로 시작하고 끝맺는다. 오프닝 시퀀스의 건조한 기도와는 달리, 처절하게 이어지는 클로징의 기도는 직접적이든 혹은 간접적이든 연루된 자의 책임에 집중하는 영화의 주제를 함축한다. 그러나 보다 주목되는 건 기섭의 입에서 발화된 기도가 아니라 기도 뒤에 단정하게 떠오른 활자다. 처음과 끝의 텍스트는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로 동일하다. 이 문장은 기섭의 기도 이후 암전된 검은 화면 위에 조용히 떠오른다. 문장의 출처이자 영화의 제목이 뒤이어 등장하기에 그저 평범한 타이틀 시퀀스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만, 활자로 표현된 성경은 마치 암호처럼 떠오르고 사라지는 동안 잔상을 남겼다. 이제 성경 말씀은 만고불변의 진리에서 해석을 필요로 하는 문장이 된다. 처음과 같은 텍스트가 영화의 내러티브를 통과한 뒤 다시 떠오를 때, 그것은 변화된 해석을 요구한다.

이미지의 계열로써 존재하는 텍스트

신연식 감독은 대개 연출과 각본을 겸했으며, 시나리오작가로 참여한 영화 <동주>로 그해 각본상을 휩쓸었다. 그가 텍스트를 중시하는 감독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여기에서 텍스트를 중시한다는 말을 문예영화 혹은 문학을 지향하는 영화와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감독이 텍스트를 활용하는 방식은 문학을 통째로 영화에 옮겨오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텍스트로 분절한 채 그것을 영화적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신연식의 영화에서 텍스트가 이미지에 가깝다고 느껴지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학적인 영화보다는 이미지적인 요소를 극단으로 밀어붙인 작품이 그의 영화와 적절한 비교가 될 것이다. 이미지주의자이자 영화 스타일리스트라고 이야기되는 이명세 감독은 소설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 <M>(2007)에서 시공간을 뒤섞어 진실과 꾸며낸 것, 꿈과 현실의 경계를 혼란하게 만드는 것으로 자신의 영화적인 세계를 구축한다. 반면 신연식의 세계는 뒤섞이지 않고 잘 정돈되어 있다. 다만 그것의 배열을 통해 정돈된 세계를 상상 속에서 뒤섞을 여지를 남겨둔다.

그러니까 신연식의 세계 속에서 텍스트는 텍스트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의 계열체 중 하나로서 존재한다. 이를 이미지화된 텍스트, 혹은 텍스트의 이미지화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문예영화가 문학 텍스트를 영화적으로 잘 옮겨오는 것에 중점을 둔다면 이미지화된 텍스트는 스스로가 텍스트에서 출발했음을 전면화하는 방식을 통해 텍스트라는 한계를 넘어선다. 텍스트의 전면화를 가장 영화적인 방식으로 선취한 이는 로베르 브레송이다. 브레송이 조르주 베르나노스의 소설 <시골 사제의 일기>를 바탕으로 만든 동명 영화에서 일기장 위에 쓰이는 활자를 전면에 드러내는데, 그것은 어떤 이미지보다 영화적이다. 신연식은 ‘시네마토그래프란 움직이는 이미지들과 소리들을 가지고 하는 글쓰기’라던 로베르 브레송의 신봉자처럼 보인다.

영화는 다양한 성서 말씀을 텍스트로 인용한다. 말씀은 이제 영화에서 전개되는 이야기와 모호한 관련 속에서, 관계적인 언어로 상상된다. 그것은 하나의 시어처럼 인식된다고 말해도 무방하다. <동주>가 윤동주가 겪은 상황 안에서 윤동주의 시를 다시 대면하게 했던 것처럼 <로마서 8:37>의 성경은 이제 해석을 기다리는 아포리즘이 된다. 그렇다면 목사의 타락상을 담은 영화의 내러티브는 성경 말씀을 대중적으로 해설하기 위한 것일까.

영상과 텍스트의 재연 관계

영화의 내러티브를 폭력적으로 축약하기 전에 영화에서 성경 말씀 외에 텍스트로 제시되는 또 다른 언어인 피해자들의 진술이 드러나는 방식에 주목해보고 싶다. 영화는 피해자들의 진술에 앞서 그들의 첫 문장을 텍스트로 보여준다. 이 때문에 피해자들의 진술은 성경 말씀과 병치되며 관객은 둘간의 관계를 상상하도록 강제된다. 말씀과 진술이 나타나는 방식의 차이는 명백하다. 진술은 곧 육성으로 발화되며, 그 순간 활자의 초월적인 힘은 사라진다. 초반에 그것은 변조된 음성으로, 나중에는 한 인물(지민)의 음성으로 서술된다. 지민(이지민)이 자신의 피해 경험을 진술함에 따라 그 상황은 회고적인 영상으로 대체된다. 재현된 영상은 관객에게 즉각적인 불쾌감을 불러온다. 그것은 지민이 서술하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기에 생략되어도 무방할 뿐만 아니라, 세속적이고 천하기까지 하다. 회상 이미지는 관객의 공분을 사기에는 전형적이며, 호기심을 충족하기에도 모자라기에 그 존재 이유를 짐작하기 힘든 명분 없는 이미지다.

그러나 피해자의 언어를 스펙터클화한 재연 장면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기 이전에 말과 글과 재연의 관계를 논하기에 적절한 감독의 다른 작품, <러시안 소설>(2012)을 다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러시안 소설>에서 활자와 영상, 내레이션은 각기 뒤섞인다. 실시간으로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던 상황과 영상은 텍스트가 삽입되고, 삽입된 텍스트가 목소리로 발화됨에 따라 재연이나 회상으로 성질이 변한다. 혹은 목소리가 불쑥 미래라는 시제를 영화안으로 끌고 들어오는 것으로도 보인다. <로마서 8:37>에서 발화는 과거의 활자에 관한 현재화이다. 그렇게 볼 때 서술을 재서술하는 방식의 회상 이미지 역시 현재화의 한 측면이라고 인식할 수도 있다.

진술과 발화, 이미지화라는 맥락을 영화 전체로 확장하면 성경 말씀은 영화 전반에 걸쳐 발화되고 재연된다. 영화의 내러티브는 로마서 8장37절의 말씀을 설명하기 위해 존재한다. 피해자들의 진술 역시 크게는 이 안에 포함된다. 그러나 피해자-여성의 존재는 내러티브를 벗어나 오늘날 종교에 커다란 질문을 던진다. 기섭을 비롯한 전도사 일행은 강요섭 목사에 의한 피해사례를 조사하기 위해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는데, 일행을 향해 한 여성이 묻는다. “(말하면) 믿어줄 거예요? 그다음에는요?” 이 질문은 말해지지 않은 말씀으로서의 성경과 피해자들의 발화되지 못한 말들을 동시에 사유하게 한 다음, ‘믿음 이후’라는 화두를 던진다. 이 질문은 또한 끊임없이 현재화하는 것들에 관한 반성을 촉구한다.

미디어 비판자, 혹은 미디어 자체로의 카메라

영화가 무언가에 관해 비판적으로 인식한다고 여겨진다면 그것은 종교나 일부 종교인들의 행태라기보다는 언론을 포함한 미디어인 것 같다. 영화에서는 이것이 카메라라는 물질 속에 포괄적으로 암시된다. 피해자로서의 지민이 자신이 겪은 일을 진술할 때, 그녀를 마주 대하고 있는 것은 진술을 있는 그대로 담기 위한 카메라다. 카메라가 놓인 위치는 두명의 상임 위원들 사이 정중앙에 놓인다. 영화에는 부러 원근법 구도를 강조한 장면이 종종 등장하는데, 그 구심점에 인물이 놓일 때 그는 최고의 권력자이며 모든 이를 압도하는 힘을 지닌 인물로 비친다. 같은 맥락에서 적대적인 표정의 교회 결정권자들 사이 정중앙에 카메라가 놓일 때, 그것은 카메라의 권능을 암시하는 것일까. 적어도 그 순간 카메라는 힘 있는 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미디어를 비판하는 이상, 영화 역시 비판의 화살을 피할 수 없다. 지민의 진술에 따라붙은 과거 재연 영상의 모호한 성격은, 객관성을 위시한 카메라 권력에 의해 종종 저질러지는 폭력적인 개입을 반성하기 위한 하나의 잉여다. 감독은 성경의 진리를 일종의 해석의 문제로 치환시킨 것만큼이나 급진적으로, 자신의 카메라에 담긴 영상 역시 비판적으로 바라봐 줄 것을 당부한다. 누군가를 회개시키기 위해 스스로 죄에 연루될 수밖에 없는 주인공 기섭과 멀지 않은 위치에서 영화는 그 영화를 보게 될 누군가를 회개시키기 위해 스스로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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