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만토바와 베르가모, 포강 유역의 곡창지역
2017-12-07
글 : 한창호 (영화평론가)
베르톨루치와 올미의 ‘두 도시 이야기’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1900>. 만토바 인근의 농촌이 배경이다.

르네상스의 도시 만토바(Mantova)가 유명해진 데는 주세페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가 한몫했다. 화려한 궁전을 배경으로 ‘여자의 마음은 갈대’라며 여성 편력을 자랑하는 ‘만토바 공작’을 통해서다. 이탈리아의 수많은 도시들 가운데서도 만토바를 오페라의 주요 배경으로 삼은 데는 도시의 퇴폐적일 정도로 화려한 과거가 돋보이기 때문일 테다. <리골레토>는 16세기 배경의 오페라인데, 당시 만토바의 곤차가(Gonzaga) 가문은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과 더불어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영주였다. 곤차가 집안이 거주하던 ‘공작 궁전’(Palazzo Ducale), ‘테 궁전’(Palazzo Te) 등은 지금도 만토바의 영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말하자면 화려한 오페라의 배경으로 등장한 만토바는 실제로 부와 권력을 가진 패권도시였는데,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주변에 펼쳐진 광대한 평야 덕분이었다. 포(Po)강 유역에 펼쳐진 끝없는 평야, 곧 파다나(Padana)의 대표 도시로서 만토바는 북부 농업의 중심지였다.

<1900>, 베르톨루치의 ‘붉은 깃발’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1900>(1976)은 이곳 파다나 배경의 역사극이다. 오페라 제목 <리골레토>는 주역 광대의 이름인데, 그와 같은 우스꽝스러운 복장을 한 어느 농부가 들판에서 “베르디가 죽었다”고 통곡하자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곧 영화의 출발은 1901년이고, 그 끝은 1945년 2차대전 이후의 해방까지다(그리고 짧은 에필로그가 붙어 있다). 베르톨루치는 20세기 전반부의 역사를 곡창지대인 이곳 파다나의 농부들의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소수의 지주들이 땅을 소유하고 있고, 소작농들이 거의 노예처럼 일할 때다. <1900>은 베르디가 죽은 1901년 1월 27일, 같은 날 태어난 지주의 아들 알프레도(로버트 드니로)와 소작농의 아들 올모(제라르 드파르디외)의 극명하게 갈린 계급의 운명을 따라, 국가의 운명까지 성찰한 5시간짜리 대서사극이다.

어릴 때는 친구처럼 자랐던 두 남자가 성인이 되며 각자의 운명을 따라가는데, 그러면서 이탈리아의 ‘20세기’(이 단어의 이탈리아식 표기는 ‘1900’이고, 이것이 영화의 원제목이다)가 주로 농민들의 시선에서 그려진다. 청년 시절 ‘순진한’ 알프레도는 재산 지키기에 급급한 잔혹한 부친과 부딪히곤 했다. 부친은 돌풍 때문에 수확이 반으로 줄자, 입에 풀칠하던 소작농들의 볼품없던 수입도 반으로 줄이던 ‘잔인한’ 주인이었다. 그런데 알프레도는 자신이 지주가 되자 파시스트의 지원도 모르는 척 받아가며 유산을 움켜쥐고 있는, 부친과 다를 바 없는 어른으로 변해간다. 그러는 사이 소작농의 아들 올모는 공산주의자로 성장하며, 지역의 농민운동을 주도하는 리더로 커간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펼쳐지는 포강 유역의 푸른 평야는 마치 이탈리아를 살아 있는 낙원으로 착각할 정도로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촬영감독은 베르톨루치의 오랜 협력자인 비토리오 스토라로). 하지만 머지않아 ‘낙원’은 피로 물든 비극의 땅으로 변해갈 것이다. 지주들은 만토바의 ‘은총의 교회’(Santuario delle Grazie)에 모여, 농민들을 통제하기 위해 파시스트의 협력을 받기로 모의하고, 교회의 신부는 이들의 합의를 두둔하고 나서며 ‘피의 역사’는 시작된다. 베르톨루치는 지주-파시스트-교회를 한편에, 그리고 농민들을 맞은편에 내세워 어쩌면 승부가 이미 결정난 불공평한 운명을 극화하고 있다.

어떤 농민은 말한다. “어릴 때부터 가족 일을 도우며 일찍부터 노동을 시작하고 10대가 되면 지주에게 착취당하는데, 어른이 되니 파시스트들이 총을 쏜다”는 것이다. 이름 없는 농민의 이 말은 영화가 발표되던 1976년 그때도 큰 메아리를 울리며, 많은 관객의 가슴에 눈물이 흐르게 했다. <1900>이 갈등의 한축으로 내세운 지주(자본가)-파시스트(정치가)-교회(지배적 이데올로기)의 삼각구조는 지금도 누군가에겐 한탄의 대상일 것이다.

에르만노 올미의 <나막신 나무>. 포강 유역의 베르가모가 배경이다.

<나막신 나무>, 올미의 ‘순교극’

베르톨루치는 <1900>에서 ‘붉은 깃발’을 든 농민들을 보여주며 하층민의 계급의식을 찬양했다. 곧 의식화된 농민들이 베르톨루치 드라마의 주역이다. 이에 비해 네오리얼리즘의 적자 에르만노 올미는 <나막신 나무>(1978)를 통해 또 다른 농민상(像)을 그린다. 올미는 철저하게 패배하는 농민들, 운명과 대결하기보다는 운명에 인종적인 수동적인 농민들의 일상에 초점을 맞춘다. 역시 파다나의 곡창지역인 베르가모(Bergamo) 근처가 배경이다(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

베르톨루치가 르네상스의 미켈란젤로처럼 화려하고 박력 있다면, 올미는 바로크의 네덜란드 화가들처럼 섬세하고 성찰적이다. <나막신 나무>의 시대적 배경은 <1900>의 바로 전인 1897년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다. 역시 지주 집에 매여 사는 소작농 가족들의 이야기다. 6km를 나막신을 신고 걸어서 통학해야 하는 소년, 가장이 죽는 바람에 밤낮없이 빨래를 하며 여섯 자녀를 키우는 세탁부 엄마, 결혼을 앞둔 처녀 총각, 그리고 맨날 싸움질을 해대는 성질 사나운 가족들이 큰 이야기를 끌어간다.

그런데 이들의 이야기보다 더 비중 있게 다뤄지는 것은 소작농들이 매일 반복해야 하는 노동의 고단함이다. 다큐멘터리 작가 출신답게 올미는 농부들이 새벽에 일어나 말의 등에 무거운 농기구를 매다는 과정들, 세탁부가 겨울에도 냇가에 앉아 찬물에 계속 빨래를 하는 일상, 부모들의 일을 돕는다며 사실 놀기에 더 바쁜 아이들의 소동 등을 마치 역사를 기록하듯 세세하게 촬영하고 있다. 그건 볼거리의 대상일 수 없다는 단호한 태도 같은 게 화면 속에 심어져 있다. 올미는 베르톨루치의 <1900>을 의식하고 <나막신 나무>를 만든 것 같다. 이를테면 <1900>과 <나막신 나무> 모두에서 돼지 도살 장면이 등장하는데 베르톨루치의 그것이 장대한 스펙터클이라면, 올미의 그것은 거친 노동의 숙명에 대한 성찰인 식이다.

베르톨루치의 농민들이 ‘파업’의 설렘에 몸을 떨 때, 올미의 농민들은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내일의 양식을 걱정하며 한숨짓는다. 만약 이승의 삶에 행복이란 게 있다면, 그건 가족 중에서 처음 시작한 어린 아들의 학업, 동생들을 고아원에 빼앗기지 않기 위해 세탁부 엄마를 도와 밤낮으로 일하는 15살 아들의 헌신 등 노동으로는 당장 환원되지 않는 미래의 희망 같은 것이다. <나막신 나무>는 그런 희망마저 타자(곧 지주)에 의해 결정되는 농민의 운명을 악착같이 따라간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어린 아들의 ‘나막신’을 만들기 위해 지주의 ‘나무’를 베었다는 이유로 졸지에 길바닥으로 쫓겨나는 가족의 모습은 ‘붉은 깃발’만 없을 뿐 베르톨루치의 계급의식을 충분히 상기시키고도 남는다. 말하자면 올미는 자칫 선동으로 비칠 수 있는 정치적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도, ‘나막신을 신어야 하는 운명’의 불공정함을 순교의 종교화처럼 그리고 있다.

베르톨루치는 유명 시인의 아들이었고, 10대 때 시인으로 등단한 영재였으며, 파졸리니의 조감독을 통해 화려하게 감독으로 데뷔한 영화계의 스타이다. 반면에 올미는 노동자의 아들이었고, 자신의 부모처럼 10대 때부터 공장에서 일하며 공부했다. 그때 우연히 동료 노동자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다가 다큐멘터리 작가가 됐다. 그리고 어떤 유명 감독의 도움 없이 스스로 학습하며 장편영화 감독으로 데뷔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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