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조용한 열정>, 시인이자 여성이었던 에밀리 디킨슨의 예술적 성장과 생애
2017-12-12
글 : 김금희 (소설가)
내면을 완성한다는 것

2천편에 달하는 시를 썼지만 생전에는 단 일곱편만 발표한 미국의 19세기 시인 에밀리 디킨슨의 삶을 다룬 <조용한 열정>을 보러 가는 길에 나는 지하철에서 내려 오랫동안 걸어야 했다. 피아노 한대가 놓여 행인 중 누구라도 연주할 수 있는, 버스 이외의 차량을 통제해 수많은 버스킹이 ‘안전하게’ 상시적으로 열리는, 어느 슬프게 운명한 시인의 단골 다방이 남아 있는 거리였다. 그런가 하면 종합병원의 장례식장을 지나야 하는 길이기도 했는데, 그때 나는 그 건물에 당당하게 자리한 스타벅스에 눈을 뗄 수 없었다. 창가 자리에서 누군가들이 책을 읽거나 노트북을 들여다보면서 일종의 생활을 변함없이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느낄 수 없는’ 무언가를 말한다는 것

<조용한 열정>은 에밀리 디킨슨(신시아 닉슨)의 삶을 여성, 종교, 가족, 지적 몰두, 도덕과 윤리 같은 맥락에서 해석해 들어가는 영화다. 평생 미국 매사추세츠의 작은 마을 애머스트를 벗어나지 않았던 그가 한 인간으로서 얼마나 위태로운 정신적 위기를 극복해나갔는지를, 공들인 미장센과 대사를 통해 ‘드라마틱한 내면적 플롯’으로 구성해낸다. 영화는 마치 시의 리듬이 그러하듯 평생 디킨슨이 붙들었을 삶의 화두들을 반복하고 그 분투의 치열함을 점점 가중시켜가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그리고 생의 중요한 장마다 디킨슨의 작품을 직접 인용해 보여주면서 영화를 더욱 시적으로 만든다. 모든 전기(傳記)를 대할 때 우리는 그 재현이 품고 있을 한계를 고려하는데 그런 경계가 실제 인물과 얼마나 맞고 틀리느냐는 논의로 그칠 때 텍스트를 통해 교환하려고 하는 감정과 이해의 부피는 한없이 볼품없어지고 만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영화를 보고 난 뒤, 조용히 끓어넘치는 디킨슨의 예술적 투혼에 감동하면서도 무언가 전달받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지울 수는 없었다.

영화에서 디킨슨은 종교가 모든 일상을 통제하는 시대에 맞서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로 살기 위해 분투한다. 교회에 나가자는 아버지의 제안을 거부하고, 하나님에게 구원받고 싶냐는 교사의 물음에 “나는 죄를 ‘느낄’ 수 없어요. 자각하지 못하는 죄를 어떻게 회개하죠?” 하고 항변한다. 세속의 종교적 규율 밖에서 진정한 신의 ‘구원’을 찾으려는 이러한 내면 투쟁은 조용하지만 아주 절박하다. 이를테면 디킨슨 스스로 이렇게 말하듯이, “소리 내 싸우는 건/ 아주 용감하다// 하지만 더 용감한 건/ 내면에서 싸우는 슬픔의 기병대.”

이러한 디킨슨의 탐구는 그 시대의 주된 이데올로기, 기독교, 가부장제, 노예제도에 대한 반성과 저항으로 이어지는데 그 과정이 설득력을 갖추면서도 디킨슨이라는 인물을 ‘플랫’하게 만든다는 인상은 지울 수가 없다. 디킨슨 삶에 대한 조명이 그러한 이데올로기들의 태양 아래 집중되면서 입체화가 어려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디킨슨에 대한 여러 중요한 의문들을 지닐 수밖에 없는데 한 예로 디킨슨의 아버지(키스 캐러딘)는 대체 어떤 가장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영화는 디킨슨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라는 목사의 말을 거부해 아버지와 언쟁을 벌인다든가, 접시가 더럽다고 하는 아버지에게 접시를 직접 깨 보이며 “이제 더럽지 않죠”라고 응수하는 일화를 보여주지만 정작 성장 과정에서 아버지의 세계를 판단하는 준거점이 되었을 디킨슨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관계에 대해서는 자세히 전달하지 않는다. 디킨슨이 가부장제에 반하려는 여성이었다면 그런 판단에 무엇보다 어머니의 삶에 대한 목격이 있었을 것이다. 영화에서 디킨슨의 어머니는 우울증을 앓으며 거의 방에서 나오지 않는 폐쇄적인 인물로 설정되어 있지만 그런 인물이 마땅히 지녔을 고통을 세밀하게 전하기보다는 오히려 어떤 낭만성 아래 형상화한다. 그녀가 병상에 누워서도 예쁘게 장식하고 있는 레이스 보닛처럼. 이러한 어머니의 위치가 아쉬운 또 다른 이유는 영화가 여성에게 가해지는 억압과 고통, 그것의 극복과 연대 같은 주제들을 다룰 수 있는 여지를 많이 품고 있기 때문이다. 가부장제 아래에서 결혼을 선택하지 않은 채 살아가는 디킨슨, 결혼을 했으나 그것이 행해야 하는 의무에 고통받는 오빠의 처 수잔(조디 메이), 체제의 존속에 연연해하는 남성 사회를 야유하며 도리어 그것을 선택적으로 이용해 자기 삶을 꾸려가려는 친구 버펌(캐서린 베일리)까지 주제의 실현은 이미 다양한 인물을 통해 암시되어 있지만 더 세공되지 못한 채 평면화에 그친다.

내면은 한없이 넓어진다

그럼에도 <조용한 열정>은 분명 예술가, 정확히는 예술을 행하는 인간의 내면을 훌륭하게 전달하는 영화다. 어떤 역할에 고정되어 있는 인물이라도 여러 번의 변주를 통해 그 내면을 그리면 중첩의 효과를 통해 전달력이 극대화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예술에의 추동이 이는 내면은 과연 영화 속 디킨슨의 것처럼 상처와 분노, 슬픔, 사랑에의 갈구와 윤리적 갈등, 죽음의 공포와 구원에 대한 갈망, 절대자에 대한 회의와 예술적 염결주의 등으로 들끓는다. 그래서 때로 예술가는 자신이 완성해가는 세계에 환희하고 확신하면서도 비슷한 강도로 그것에 헌신하는 자신의 삶을 모멸하고 부정하고 싶어 한다. 왜냐하면 지금 그 예술가가 보고 있는 세계란 사실 ‘완성’이라는 것이 가능하지 않은, 마치 공기처럼 한없이 경계가 넓어져 그것을 채울 수 없음에 매번 좌절하게 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디킨슨이 죽음이 가까워오는 시기에 흰옷을 입고 이층 자신의 방에만 칩거하는 것은 그의 내면이 자연과 신 그리고 예술이라는 무한의 세계로 넓어지는 것과 아주 대조적이다.

모두가 잠든 밤, 어두운 응접실에서 시를 쓰기 위해 앉아 있는 디킨슨에게 수잔은 “너에게는 시가 있잖아”라고 속삭인다. 그러자 디킨슨은 “너에겐 삶이 있잖아, 나는 일상을 가졌을 뿐이고”라는 말로 돌려준다. 지금 여기에 있는 육체로서는 완성할 수 없고 느낄 수도 없는 어떤 세계를 아는 이들은 이미 “인생이 하찮고 어떤 특정한 사랑을 빼앗”겼기에 “굶주리는 데에 익숙”하다. 수잔이 그런 디킨슨의 운명에 눈물을 흘린 바로 그 순간 나는 예술가의 고통에 찬 내면이 타인에게 전달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마음이 조용히 움직였는데 거기에는 그러한 이해를 마치 나 자신이 받은 듯한 감동이 있었다. 이제 영화는 디킨슨이 자기 방보다도 더 좁은 관 속으로 옮겨져 죽음을 맞는 장면을 보여준다. 여기서도 시가 낭독되는데 죽음의 여정을 상상하며 쓴 그 작품에는 “아이들이 뛰노는 학교”, “풀과 곡물의 땅”, “어느 집의 처마와 이슬” 같은 그가 일상이 아니라 비로소 삶이라고 명명한 구체성의 실감을 나눠가진 시어들이 함께한다. 카메라는 공중으로 올라 마치 그를 내려다보듯 프레임을 맞추지만 적어도 디킨슨의 시에서는 죽음마저 그를 마중 나와 다정한 “친절”을 갖춘다.

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도 장례식장 앞을 지나쳤다.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담배를 피우거나 커피를 홀짝거리면서 어떤 시시한 농담을 하며 웃었을 때 나는 노르웨이의 시인 하우게가 디킨슨을 기리며 쓴 짧은 시를 떠올렸다. 오히려 그것이 에밀리, 어느 밤 혼자 책상에 앉아 있어야 하는 내가 떠올릴 시인의 얼굴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세 편 썼어, / 그가 말했다. / 시를 세다니. / 에밀리는 시를 / 상자 안에 던져버리곤 했지, 난 / 그녀가 몇 편인지 헤아리는 모습은 상상조차 못하겠어. / 그저 차 포장지를 펼쳐 / 또 한 편을 썼지. / 그게 옳아. 좋은 시란 / 차 냄새가 나야 해. / 아니면 거친 흙이나 새로 쪼갠 장작 냄새든._(<세 편 썼어>, 올리브H. 하우게 지음, 황정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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