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가족 밖으로 나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세 번째 살인>이 던지는 질문
2017-12-13
글 : 임수연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변하지 않았다

<세 번째 살인>은 일견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작품 세계에서 돌출된 돌연변이처럼 보인다.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2011),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13), <바닷마을 다이어리>(2015) 등으로 이어지는 최근작이 대체로 가족을 다룬 홈드라마였고, 법정 스릴러에 도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태풍이 지나가고>(2016) 이후 당분간 가족영화를 만들지 않겠다고 밝힌 그에게 <세 번째 살인>은 새로운 챕터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이면서, 세상을 그리 낙관적으로만 보지 않던 초창기의 태도를 상기시킨다. 가족에 대한 이야기도 여전히 중요한 축을 담당한다. <세 번째 살인>이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필모그래미에서 갖는 의미를 짚어보았다.

<세 번째 살인>은 아주 명료하게 시작해 지극히 모호하게 끝나는 작품이다. 오프닝에서 누군가의 후두부를 스패너로 수차례 내려친 후 시체를 태우는 남자는 30년 전 살인죄로 수감된 전적이 있는 미스미(야쿠쇼 고지). 새빨간 불길이 드리워 더욱 섬뜩한 그의 얼굴에는 어떤 변명의 여지도 없어 보인다. 더군다나 그는 체포되자마자 모든 죄를 자백했다. 분명하게만 보였던 사건에 조금씩 미스터리가 스며드는 것은 사건의 진실에 관심 없는 변호사 시게모리(후쿠야마 마사하루)가 개입하면서부터다. “이해와 공감 같은 건 변호에 불필요하다”며 법정에서 의뢰인에게 유리한 판결을 받아내는 것에만 몰두하는 시게모리의 목표는 강도 살인이 아닌 살인 및 절도로 낮춰 판결을 받는 것이다. 하지만 미스미와의 접촉 횟수가 늘어나면서 시게모리의 평정심은 한껏 흐트러지고, 진실의 행방은 더욱 묘연해지며, 결국 영화는 누구도 정답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마무리된다.

<걸어도 걸어도>(2009)를 찍은 뒤 재범을 저지른 범죄자의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다는 감독은 당시 “처음에는 사람을 죽이고 싶어서 죽였지만 두 번째는 사람을 좋아해서 죽인 범죄자”에 대한 스토리를 구상했다가 벽에 부딪혀 시나리오를 완성하지 못했다. 이후 변호사들과 만난 식사 자리에서 그는 이야기를 완성할 연결고리를 찾게 된다. 그가 만난 법조인들은 “법정은 진실이 규명되는 곳이 아니라 이해 조정을 하는 곳”이라고 전했고, 한 변호사는 “일본 법정 시스템에서 반전은 없다”고 단언하기까지 했다. 공판을 하려면 증인을 불러서 어떠한 증언을 할지 정리를 해야 하는데, 이때 검찰측도 변호인측도 속셈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러니 영화에서처럼 “갑자기 뒷문이 열리면서 새로운 증인이 뛰어들어와 결정적인 증언을 하는 그림은 나올 수가 없”(‘에이가닷컴’)다. <세 번째 살인>의 시게모리는 현실에 비추어보면 특별한 인물이 아니다. 그는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보고 들었던 법정의 민낯 그 자체를 대표한다.

유동적인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아역배우들의 사실적인 연기를 카메라에 포착하던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스타일은 취재 방식에도 적용됐다. 그는 현직 변호사 및 검사들을 취재하고 실제 재판을 방청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실제 상황을 몇번이고 시뮬레이션했다. 변호사들의 도움을 받아 변호사가 구치소에서 용의자를 접견하는 모의접견을, 변호인·검사·판사·범인·증인으로 나뉜 모의재판을 실시해 이곳에서 나온 리얼한 반응과 언행을 시나리오에 녹여냈다. 촬영현장에서도 현직 변호사들의 검토를 받으며 “변호사는 이런 프로세스로 사고하지 않는다”, “경력 있는 변호사도 저렇게 당당하게 발언하지 않는다”는 등의 의견을 수렴해나갔다. 그 결과 “아주 불완전한 사람들이 모여 사법을 맡고 있는데 판결은 절대적이라는 것에서 오는 근본적인 두려움”(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에이가닷컴’과의 인터뷰)이 <세 번째 살인>의 핵심이 됐다.

진실에 접근할수록 흐려지는 진실

하지만 <세 번째 살인>은 단지 사법 체계의 불완전함을 꼬집는 사회 비판 드라마에 그치지 않는다. 법정이라는 공간이 가진 모순은 결국 그 대비를 통해 인간의 한계를 비춘다. 무언가를 진실로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렇다고 착각하는 것. 진실에 관심이 없다가 점차 진실에 집착하는 시게모리의 감정적 변화는 그런 불완전한 인간의 속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시게모리는 미스미와의 세 번째 접견에서 처음으로 감정적으로 흔들린다. 유리를 사이에 두고 손을 맞대고 있으면 체온이 전해져서 “대화하는 것보다 상대방을 이해하기 좋다”는 미스미는 시게모리에게 딸이 몇살이냐고 묻고, 시게모리는 눈물을 글썽인다. <세 번째 살인>의 아버지들에게 ‘딸’은 강력한 정서적 공명을 불러일으키는 ‘치트키’에 가깝다. 별거 중인 시게모리는 아버지의 관심을 끌기 위해 고의적으로 말썽을 피우는 14살 딸의 아버지고, 미스미는 딸이 6살 때 살인죄로 감옥에 들어갔다. 대체로 딸과의 관계가 평탄치 않은 영화 속 중년 남성들은 일부 일상적인 장면에서 거의 비슷하게 평범한 인물로 묘사되며 경계를 흐린다. 홋카이도 루모이는 문어가 유명하다고 핀잔을 주는 시게모리, 접견실에서 핫팩을 만지작거리는 세츠(요시다 고타로), 그리고 감옥에서 새에게 먹이를 주려고 애쓰는 미스미 사이의 거리는 멀 수도 가까울 수도 있다.

<세 번째 살인> 촬영장에서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시게모리는 피해자의 딸 사키에(히로세 스즈)가 14살 때부터 아버지에게 강간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진실에 관한 다른 가설을 세운다. 미스미는 자신의 딸과 그랬던 것처럼 홋카이도의 눈밭에서 사키에와 즐거운 시간을 보낸 적이 있고, 시게모리는 미스미가 사키에의 복수를 대신 해주었다고 믿기 시작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미스미는 시게모리의 가설을 “좋은 이야기”라고 표현한다. 사키에로 대표되는 딸에게 아버지들이 갖는 마음의 부채는 ‘이야기’의 동력이자 장님 코끼리 만지듯 얻는 파편화된 정보를 손 쉽게 엮는 검증되지 않은 이음새다. 사형선고를 받은 미스미가 살인을 저지른 이유는 영원히 미궁 속에 남을 것이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 부성애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보여줬던 후쿠야마 마사하루는, 부성애라는 공통분모 때문에 타인에게 가까워졌다고 믿고 타인을 알게 됐다는 환상의 허구까지도 마침내 절감한다.

법정에서는 모두 거짓말만 한다

<세 번째 살인>에는 총 7번의 접견 장면이 등장한다. 원래 시나리오에서 5번이었던 접견 장면은 대본 리딩을 한 후, 그리고 촬영을 하는 과정에서 계속 분량이 늘어났다. 처음에는 카메라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다는 이유로 주목하지 않았지만 막상 후쿠야마 마사하루와 야쿠쇼 고지가 촬영한 분량을 검토해본 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이 부분이 가장 재밌다. 이건 접견실의 영화”라고 생각했다. “법정에서는 모두가 거짓말만 한다. 여러가지가 부딪히는 곳이 법정이 아니라 접견실이 되는 편이 사실적이고 재미있을 것 같았다”고 부연했다. 처음에는 손, 문, 천장의 불빛 등 많은 것을 카메라에 담았지만 편집 과정에서 모두 사라졌다. 두 사람의 얼굴에 집중하는 편이 더 흡인력 있다는 판단에서다.

접견실의 투명한 유리는 두 사람의 얼굴을 한데 겹치는 역할을 한다. 유리에 비친 상대의 표정을 피사체에 일부러 겹치게 촬영하는 숏이 극중 자주 활용된다. 때문에 세월의 풍파가 느껴지는 아쿠쇼 고지와 멀끔한 후쿠야마 마사하루의 완전히 다른 외모는 접견실 장면에서만큼은 이따금 닮아 보인다. 미스미와 시게모리의 상이 노골적으로 한데 중첩되는 마지막 접견 장면은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바닷마을 다이어리>에 이어 세 번째로 고레에다 히로카즈와 작업을 한 다키모토 미키야 촬영감독의 아이디어다. 한편 두 사람의 얼굴이 겹치는 이미지가 아버지라는 공통분모에서 기인한 인간 군상의 유사함을 보여준다면, 아예 옆모습만을 담은 클로즈업숏은 시네마스코프 비율 안에서 두 사람의 다른 온도를 탁월하게 담아낸다. 결국 인간끼리 별다르지 않거나 아주 다르거나 타인은 완벽한 이해의 영역에 들어올 수 없다는 체념이 좁은 접견실 안의 이미지로 구현된다. 이것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작품에서 본 적 없는 촬영방식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주연의 작품들, <황야의 무법자>(1964)와 <석양의 건맨>(1965) 같은 마카로니 웨스턴 영화들을 참고했다”는 그의 영화가 새롭게 뻗어나간 영역이다.

<세 번째 살인>의 서늘한 시선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몰랐던 일면이 아니다. 그는 <아무도 모른다>(2003)에서 누구에게도 보호받지 않은 아이들을 그리며 감히 울지도 선뜻 희망을 내비치지도 않았고, <걸어도 걸어도>에서 화합할 수 없는 어떤 가족관계를 세밀하고 냉정하게 포착했다. <세 번째 살인>은 인간이 타인을 이해한다는, 진실에 가까워졌다는 환상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데서 오는 서늘함을 그린다. 그 착각은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가장 잘 그리는 소재, 가족을 기반으로 둔 공감대에서 비롯되기에 더욱 쓰라리다. 동시에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영화를 찍는 새로운 방식을 찾아나가고 있다. 가족 드라마 바깥으로 이식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고유 유전자가 아주 흥미로운 결합체로 재탄생했다.

<세 번째 살인>의 삭제 장면

재판에서는 누구도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는 분석을 반영하기 위해,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후쿠야마 마사하루가 연기한 중요한 장면을 사후 편집했다. 판결 전 시게모리가 자신의 본심을 담은 최종 변론을 펼치는 5분가량의 장면은 완성본에서 사라졌다. “재판에서는 누구도 진실을 말하지 않는 게 더 무섭지 않겠냐. 그리고 이것이 없는 편이, 그 변호사에게 앞으로 살아가면서도 영향을 미칠 짐이 될 것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히로세 스즈가 나이를 먹고 성장해가는 모습을 계속 카메라에 담고 싶다.”

<세 번째 살인>의 사키에는 누구보다도 의도가 불분명한 표정을 짓는다. 종종 가해자처럼 서늘한 눈빛을 보여주다가도, 시게모리가 미스미의 살인에 대한 새로운 가설을 세우고 믿게 만들 만큼 상처를 꾹꾹 눌러 참는 표정을 한다. 사키에를 연기한 히로세 스즈는 <바닷마을 다이어리>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과 호흡을 맞춘 적이 있다. 원래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아역배우에게 따로 대본을 주지 않기로 유명하다. “아역배우에게 시나리오를 주면 대사는 물론 감정까지 연습해온다. 대사를 처음 아는 순간이 상대배우가 말을 할 때가 되어야 한다. 이는 바람직하지 않다. 하지만 <바닷마을 다이어리> 당시의 히로세 스즈는 이미 상대의 대사를 듣고 말할 줄 아는 배우였다. 그래서 난 그가 아역배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바닷마을 다이어리> 때는 대본을 주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그를 믿고 시나리오를 줬다. 하지만 그가 현장에서 대본 보는 모습은 한번도 못 봤다.” 히로세 스즈는 내년에 20살이 된다. “히로세 스즈가 나이를 먹고 성장해가는 모습을 계속 카메라에 담고 싶다”(<TV LIFE>)고 고백한 만큼,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다른 작품에서 그가 또 등장할 모습을 기대해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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