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메리언 C. 쿠퍼, 어네스트 B. 쇼드색 / 출연 페이 레이 / 제작연도 1933년
이 영화를 처음 본 것은 초등학교 1학년 때, 지금은 방송 통폐합으로 없어진 TBC에서 토요일 심야에 방송되던 <주말극장>을 통해서였다. 그날 영화를 보고 형연할 수 없는 충격에 휩싸여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던 것이 아직도 기억에 선하다. 아마도 이 영화는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몰입해서 감상한 최초의 장편영화일 텐데, 돌이켜보면 내 취향의 원형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이 영화를 통해 만들어졌다는 생각을 나이가 들수록 하게 된다.
<킹콩>이 담고 있는 그로테스크, 어두움은 물론이고 어린 내가 당시로서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실은 원치 않았던- 비극적인 슬픔이 나의 취향으로 각인되어버린 것이다. <내일은 죠>(일명 <도전자 하리케인>), <백경>(감독 존 휴스턴, 1956)- 역시 거대 괴물이 나온다- 모두가 어린 시절 내가 가장 ‘감동적으로 본’ 만화 혹은 영화였고, 초등학교 고학년 때 줄줄이 보게 된 이소룡 영화중에서 <정무문>은 단연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결국 주인공은 죽어야 했다. 슬퍼야 했다. 세상은 비극적이라고 킹콩이 한 꼬마에게 가르쳐준 것이다.
이런 취향의 나를 가장 괴롭히는 줄거리는, 예를 들자면 <킹콩>의 정반대편에 있는 <미녀와 야수> 같은 내용이다. 여기에 제아무리 장 콕토 영상에, 필립 글래스 음악이 더해진다고 한들 나는 그런 내용에 몰입할 수가 없다. 세상에 마법에 걸려 야수가 된 왕자님은 없으며 설령 그런 존재가 있다고 한들 세상은 그 마법을 풀어주지 못한다. 야수는 끝까지 야수일 뿐이다. 그래서 야수와 미녀는 서로 사랑할 수 없다. 기껏해야 미녀가 야수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연민과 동정뿐이다. 그래서 야수는 슬프다.
<킹콩>이 DVD로 발매된 뒤 나는 이 영화를 지금도 가끔씩 본다. 여전히 이 영화의 화면이 공포스러운 것은 대공황 시대의 시커먼 뉴욕 하늘 아래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 꼭대기에 올라간 킹콩이라는 설정 그 자체다. 어린 시절 나는 이 괴물에 동화되어 그의 죽음에 가슴이 아팠지만 언제부터인가 그 장면을 보면 그를 저 절망의 꼭대기에 올려놓은 수많은 욕망, 수많은 무관심 중 하나란 사실에 가슴이 짓눌린다. 왜 그는 찬바람 부는 옥상 위로, 철탑 위로 올라가야 했을까. 그때 나는 안온한 땅 위에서 무얼 하고 있었나. 한겨울에 <킹콩>을 보자니 마음이 더욱 아리다. 무겁다.
황덕호 재즈평론가. KBS 클래식FM <재즈수첩> 진행. <씨네21>에서 ‘황덕호의 시네마 애드리브’를 연재했고 <그 남자의 재즈일기> <당신의 첫번째 재즈 음반 12장> 등을 썼으며, <빌 에반스> <재즈> 등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