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손에 커피포트와 커피잔이 놓인 쟁반을 들고 다른 한손으로는 목발을 짚은 아름다운 여인이 거실로 들어온다. 소파에 앉아 있던 남자가 벌떡 일어서서 여인을 도우려 하자 여인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힘으로 대접하겠다는 의지를 보인다. 남자는 약간 부끄러워하면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는다. 커피포트에 불빛이 어른거린다. 거실 전면 창밖의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불길한 불빛이 반영된 것이다. 여자와 남자가 창밖을 본다.
일렁거리는 불길한 불빛은 네개, 다섯개, 여섯개로 늘어나고 거실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다. 한손으로 횃불을 들고 중세시대 사형 집행인 복면과 복장을 한 괴한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남자와 여자가 있는 집을 향해 달려오고 있다. 남자는 총을 들고 거실 베란다로 달려나간다. “여기는 사유지다. 당장 나가라”라고 소리친다. 어둠 속에서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고 생각하는 순간, 남자의 가슴에 화살이 박힌다. 비명을 지르며 베란다로 나온 여자의 가슴에도 어둠 속에서 날아온 화살이 박힌다. 여자의 목발이 바닥에 떨어진다. 정체불명의 괴한들이 타고 있는 오토바이는 핸들이 석궁으로 된 무시무시한 물건이다. 괴한들은 횃불을 던져 집을 불태우고 살해된 남녀를 12궁도가 그려진 돌림판에 매달아놓고 사라진다. 영화를 만화로 번역한 것 같은 첫 장면이었다. 첫 번째 칸에는 커피포트에 비치는 횃불이 그려지고, 그다음 칸에는 그것을 발견한 남녀. 다음 칸은 거실 창으로 보이는 작은 횃불 하나. 다음 페이지로 책장을 넘기면 첫번째 칸에 작은 네개의 횃불. 그다음 칸은 좀더 커진 네개의 횃불. 그다음 칸은 횃불보다 더 강렬하여 불빛을 집어삼킨 오토바이 헤드라이트. 옆 페이지에는 페이지 전체를 가득 채운, 복면을 쓰고 오토바이를 몰고 있는 괴한. 다시 다음 페이지로 책장을 넘기면 오토바이를 탄 괴한 6명이 저택을 향해 달리는 박력의 전장 페이지.
박력이라는 것이 폭발했다
어린 시절 헌책방에서 처음으로 구입했던 일본 단행본 만화책 <와일드 7> 14권. ‘목에 로프’ 상권 첫 장면의 박력은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그 당시 나는 이 만화가를 알고 있었다. 그 해 여름 소년잡지 <어깨동무>의 별책부록으로 나온 만화(추측건대 <비밀탐정 JA>의 복제판)가 있었는데, 그 만화의 그림체와 똑같았기 때문이다. 무슨 일인지 별책부록으로 나왔던 그 만화는 1회만 나오고 그다음에는 아무런 해명 없이 사라졌다. 뭐 당시 자주 있는 일이어서 만화가 꽤나 폭력적이라 그런가보다 했다가 그 작가가 그린 다른 만화를 오리지널로 만나게 된 것이다.
만화 속의 액션이라고 해야 스포츠 만화나 로봇 만화의 액션 장면을 본 것이 전부였던 나는 페이지를 넘길수록 영화의 액션 장면보다 더 박력 있고 멋있는 액션 장면들이 펼쳐지는 이 만화에 홀딱 빠져들고 말았다. 여섯명의 괴한들은 ‘사자좌 그룹’이라 불리는 폭주족들이고 그들은 자신들을 배신한 조직원을 처형한 것이다. 그들은 곧 체포되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석방된다. 정계의 거물이 뒤를 봐주고 있는 것이다. 풀려난 사자좌 조직원 세명이 오토바이를 몰며 수산시장에서 방약무인, 난리를 피우고 있지만 아무도 그들을 제어하지 못한다. 그들은 냉동식품을 하차하느라 정차한 냉동 탑차의 짐칸으로 오토바이를 몰아 점프해 올라타는 장난을 하고 있다. 난리를 피우는 그들 뒤로 ‘혼다CB750’이 소리 없이 다가온다.
하얀 경찰 헬멧, 오토바이 순찰대의 검은 가죽잠바에 하얀색 승마바지를 입은 경찰 복장의 사내인데 어딘가 이상하다. 고글로 눈을 가린 젊은 남자는 경찰 옷을 입었지만 분위기도 다르고 경찰 표식이 제복 어디에도 붙어 있지 않다. 난리를 피우던 사자좌 폭주족에게로 다가가는 오토바이 경찰. 그가 자신을 “와일드 7”이라 소개하자 기세등등하던 폭주족들은 사색이 되어 달아난다. 그는 법망을 빠져나간 범죄자들을 처형하는 불법 비밀경찰 ‘와일드 7’ 중 한명이며 이 만화의 주인공인 히바. 세명 중 둘을 쫓는 히바. 폭주족은 달아나다가 달리고 있는 탑차의 화물칸 문이 열린 것을 보고 오토바이를 탄 채 점프하여 올라탄다.
화물칸 안에는 지게차가 있었고 폭주족은 지게차의 날카로운 포크에 몸이 관통되어 죽는다. 곧 뒤따라온 히바는 탑차의 화물칸 문을 닫고 운전석의 여자와 인사를 교환하고 나머지 한명을 쫓는다. 물론 운전석의 여자 역시 와일드 7 중 한명이다. 도로 위에서 벌어지는 추격전. 폭주족은 오토바이를 버리고 인파 속으로 들어가 히바의 추격을 따돌린다. 폭주족은 전철에 올라타 자리에 앉아 추격자를 완전히 따돌렸다고 생각하며 긴장을 풀고 담배를 꼬나문다. 그가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자 달리는 전차 옆으로 선로를 따라 달려오는 오토바이가 보인다. 전차와 나란히 달리는 오토바이. 와일드 7 히바다. 폭주족과 눈이 마주치자 히바는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권총을 꺼내든다. 혼비백산한 폭주족은 고개를 숙이고 전차 안의 사람들 사이로 도망친다. 전철역 플랫폼 의자에 앉아 있는 폭주족. 그는 이제 추격자를 완전히 따돌렸다고 생각한다. 자신을 와일드 7이라 밝힌 놈들은 미친놈들이다. 어떻게 전철의 선로 안으로 오토바이를 몰고 따라올 생각을 하는지. 헛웃음을 지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힘든 하루였다. ‘자, 그만 쉬고 일어날까’ 하는데 전철역 안에서 오토바이 소리가 들린다. 선로를 따라 오토바이 한대가 플랫폼으로 들어오고 있다. 와일드 7 히바다.
기세등등하던 악당이 졸지에 독수리 앞의 병아리 꼴이 되어 허겁지겁 사람들 사이로 숨으려 하지만 이미 히바의 총구가 그를 겨누고 있다. 히바의 총이 불을 뿜는다. 히바는 무전기를 들어 ‘처리완료’라 보고하고 선로를 따라 사라져버린다. 사악한 악당들을 졸지에 초라한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더욱더 사악한 악당.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이 악당들은 자신들과 비슷한 악당들을 처형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사이코패스들이다.
영화에도 담지 못한 만화만의 액션 신
<와일드 7>은 소년화보사의 만화 주간지 <소년 킹>에서 1969년부터 1979년까지 10년간 연재된 액션만화다. 법으로 처리할 수 없는 범죄자들을 처형하는, 범죄자들로 조직된 비밀조직 와일드 7의 이야기는 단행본 만화로 150여권이 나왔고, 와일드 7의 배후인 검사의 배신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는 최종장으로 연재를 끝낸 후에도 독자의 요청에 의해 <신 와일드 7>으로 다시 연재를 시작했던 인기작이다.
당시 최고의 드림 오토바이 혼다 CB750을 몰고 범죄자들을 처형하는 장쾌한 액션은 이후 할리우드와 일본, 홍콩의 액션영화와 일본 만화들에 <고르고 13>과 함께 많은 영향을 끼쳤다. 70년대 초,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말파소 프로덕션은 <와일드 7>의 광팬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더티 해리2: 이것이 법이다>는 <와일드 7>에서 의상과 스토리, 분위기를 가져온 것이 너무나 명백한 영화다.
또 다른 이스트우드의 영화 <건틀릿>의 마지막에서 고속버스 내부에 철판을 덧대어 경찰들의 총알 세례를 견뎌내고 통과해 죄수 호송에 성공하는 시퀀스는 모치쓰키 미키야의 만화 <비밀탐정 JA>에서 주인공이 버스의 내부에 철판을 덧대어 ‘시티 오브 다크니스’ 홍콩 구룡성채의 한복판을 흑사회 갱들의 총알 세례를 받으며 통과하는 장면과 똑같다.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에서 만들어진 <와일드 7> 영화판은 장황하기만 하고 겉은 요란하나 내면은 초라한 액션 신만 난무하는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모치쓰키는 60년대 할리우드영화에서 보았던 긴장감 넘치는 액션 신을 만화로 옮기려 노력하고 오로지 만화만이 할 수 있는 멋진 액션 신을 만들어냈는데, 정작 일본영화는 일본 만화를 영화로 옮기는 것에 대해 별다른 고민을 안 하고 만드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