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여고 동문들이 자신들이 입었던 옷에 얽힌 기억을 더듬어가는 책 <황홀한 앨범: 옷으로 본 한국의 현대여성 1946-2015>에는 양장점 ‘파랑새’의 디자이너 백희득에 관한 대목이 있다. 뻣뻣하고 서먹하게 굴어서 늘 엄마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던 그이가 어린 자신에게 어떤 디자인이 좋은지 의견을 물었다던 일화. 백희득의 옷을 입으면 “더이상 주변에 잘 보일지 어떨지 걱정하지 않고 자신 있게 움직일 수 있었다”고 회고하는 이는 중요한 업무가 있을 때마다 입었던 녹색 슈트 사진을 꺼내놓았다.
KBS2 드라마 <흑기사>에는 첫사랑 정해라(신세경)를 기다리기 위해 슬로베니아의 고성을 사들인 남자(김래원)가 있다. 하지만 판타지가 겹치는 쪽은 해라에게 옷을 지어 입히는 샤론 양장점의 디자이너 샤론(서지혜)의 존재다. 아무래도 성을 사버린 남자보다는 이쪽이 실용적이고, 옷이 심리에 끼치는 영향력에 공감하기 때문이다. 보통 자기 처지에 얽매여 있던 여주인공은 상황이 나아진 후에도 사랑할 자격, 행복해질 자격을 고민한다. 극 바깥에 있는 시청자의 용인을 구하는 셈인데, 내 것이라 여겨지는 옷을 입고 자신감을 얻은 해라는 구차한 이 과정을 훌쩍 뛰어넘는다. 변화된 상황에서 새롭게 필요를 느끼는 자기 욕망을 중심에 두고 뻔뻔하고 산뜻하게 움직인다. 과거의 연적이 환생한 해라를 잘 입혀가며 ‘디스’하고 남자를 되찾을 궁리를 하는 200살 먹은 디자이너 샤론도 전형적인 인물은 아니다. “전생엔 내가 위너였네.” “이번엔 내가 뺏을게요.” “그러세요.” 밤새워 인삼주 잔을 부딪치는 두 여자의 대화를 듣고 있으면 성도, 성을 산 남자도 어쩐지 하찮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