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흑백영화를 다시 보는 일은 영혼에 좋다. 교회에 가는 것보다 훨씬 영적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 스크린과 관객 사이는 제단이나 강대상 아래만큼이나 치열한 영혼의 격전장이다. 카메라가 인간의 영혼을 찍을 수 있을까? 무드는 만들 수 있지만 공기(空氣)까지 영화에 담는 일이 가능할까? 나는 어느 시대 몇몇 작가에겐 그것이 가능했다고 답하고 늘 이 영화를 말한다. 혼자만의 송구영신(送舊迎新) 예배를 위한 영화, 데이비드 린의 <밀회>(1945)다.
처음에 우리는 알지 못한다. 쉬지 않고 떠들어대는 어느 부인 앞에서, 열차 대기실에 선 여인 로라(세실리아 존슨)와 사내 알렉(트레버 하워드)이 왜 어색하고 불편한 얼굴을 하고 있는지 자초지종을 모른다. 알렉은 로라의 어깨를 한번 잡아주고 그곳을 떠난다. 짧은 한번의 행위, 아주 잠깐이지만 심상찮은 순간을 클로즈업으로 잡아주자 그때까지만 해도 그냥 실시간이었던 영화에 어떤 특별한, 다른 성질의 시간이 만들어진다. 영화의 러닝타임은 실시간이지만 영화가 다루는 시간은 결코 실시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여기서 처음 알았다. 영화의 어느 순간은 시간이 아주 빨리 흐르고, 또 어느 순간은 아주 느리게 흐른다. 알렉이 로라의 어깨에 손을 얹는 순간, 시간은 잠시 그 찰나에 머문다. 수다쟁이 부인이 초콜릿을 사는 사이 로라는 잠깐 사라진다. 관객에게 보여주지 않는 이 부재의 순간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에서 로라의 정신은 온통 다른 곳에 가 있다. 수다쟁이 부인이 떠들어대는 동안 아무런 대꾸 없이 그저 멍하니 눈만 뜨고 있던 로라는 갑작스레 울음을 터뜨린다.
행복할 때 시간은 빨리 흐른다
집에 돌아온 여인은 남편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일종의 고해성사를 시작한다. 남편이 아닌 한 남자와 연애를 했고, 방금 전 그 연애가 종말을 고했다. 거실 소파에 앉아 로라는 알렉과의 최초의 조우와 이후 시작된 연애를 회상한다. 소파에 앉은 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 소파에 앉은 로라가 남편이 아니라 그때의 시간을 보는 놀라운 장면. 생각으로 풍덩 뛰어들었다 그 생각에서 건져지는 모습이 영화에 찍혀 있다. 나는 이 장면을 언어로 어떻게 통역해야 할지 모르겠다. 마치 영화 스크린을 보듯이 알렉과 키스하던 과거를 보고 있던 로라는 “여보?” 하며 자신을 부르는 남편의 목소리를 듣는다. 누군가가 극장에서 당신을 불러 감상을 방해한다. 두 번째의 “여보”에서 로라 앞에 있던 과거의 스크린은 걷혀 현재의 거실로 돌아온다.
영화에서 가장 로맨틱한 순간은 로라가 알렉에게서 그가 연구하는 병(病)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다. 여자가 사랑에 빠졌음이 확실해진 순간 남자의 대사는 온갖 병명을 열거하느라 하나도 낭만적이지 않다. 하지만 로라의 눈은 말 그대로 반짝반짝 빛난다. 나는 구로사와 아키라가 그렇게 했듯 분명히 배우 눈을 반짝이려 거울을 썼을 거야, 속으로 생각한다. 아무튼 이 장면에서 두 배우, 아니 로라와 알렉은 불륜으로 일탈 중인 중년이 아니라 세상에서 서로를 처음 발견한 소녀와 소년이다. 누구나 그렇듯 연애를 하면 세상에는 오직 둘뿐이고 연애에 있어 가장 행복한 부분이란 일상의 아주 소소한 것들과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같이 나누는 일이다. 극장 장면에서 일견 쓸데없어 보이는 영화 예고편을 보여준 건 연애의 시간에 쌓이는 그들만의 역사를 보여줌과 동시에 그 제목 ‘열정의 승리’(Flames of Passion)로 둘의 상황을 역설하기 위해서다. 그들의 현실에선 결국 열정이 승리하지 못하니까. 행복한 순간에는 영화의 시간이 빨리 흐른다. 로라는 기차에서 알렉에 대한 생각을 하던 중 순식간에 목적지에 도착한다.
그러나 둘의 만남은 사회적으로 명망이 있는 각자의 중산층 가정을 지켜야 하는 의무감과 타인의 시선에 대한 두려움으로 숨겨야 하는 관계가 된다. 이와 대조적으로 열차 대기실의 기관사와 여주인 커플은 모두가 보고 들을 수 있는 공간에서 질척한 농을 섞어가며 대놓고 연애를 즐긴다. 처음에 로라와 알렉 커플은 하층민의 천박한 로맨스를 구경하듯 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이들의 자유롭고 솔직한 연애에 비해 로라와 알렉의 관계는 그 대단치도 않은 사회적 명망에 금이 갈 정도로 부끄러운, 더욱더 숨겨야 하는 연애가 되어간다. 그들은 밖에서 마음놓고 키스를 할 수도 없고,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저녁도 제대로 즐기지 못하며, 격정에 휩싸여 들어간 둘만의 장소에서도 일을 이루지 못한 채 뒷문으로 도망쳐나와 비를 쫄쫄 맞으며 공원 벤치를 전전하거나 자신을 이해한다는 친구에게서 경멸을 발견해야 할 뿐이다. 그들은 연애 때문에 잠시 정신이 나가기는 했지만 로라가 말했듯 “영국은 정신 나간 사람에게 친절하지”만은 않았다.
지옥이 시작되었다
연애는 지옥과 구원 사이 어떤 한 지점이다. 연애는 당사자들에게 구원이었다가 한순간에 지옥으로 돌변한다. 수치심이라는 지옥을 겪은 둘은 최후의 지옥, 이별을 맞이한다. 하나 그들에게는 둘만의 근사한 이별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기차역, 알렉이 지금 기차를 타고 떠나면 그는 아프리카로 갈 테고 로라는 이제 영영 다시는 그를 만날 수 없다. 모든 것을 팽개치고 그를 잡아야 할까? 이 운명의 순간, 이별이 당도한 열차 대기실에 로라의 친구인 수다쟁이 부인이 나타나 초를 친다. 영화는 시작 장면으로 돌아온다, 아, 여기가 바로 끝이었구나. 슬프지만 그래도 근사해야 할 이별이 완벽하게 망가지는 상황이 관객이 처음 본 바로 그 장면이었다. 마지막 희망은 수다쟁이 부인이 초콜릿을 사던 순간 로라의 부재다. 그들의 이별에 남겨둔 마지막 기회가 이제 밝혀진다. 로라는 알렉을 만나 작별 인사를 전했을까? 적어도 최후의 키스 정도는, 아니 마지막으로 알렉의 얼굴이라도 본 걸까? 그러나 야속하게도 기차는 떠난 뒤였다. 로라가 동전을 주었던 거리의 악사가 부르던 노래 <세상은 돌고 도네>처럼 기차는 항상 같은 곳을 갔다가 되돌아오지만 떠난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로라는 지옥으로 떨어졌다. 지옥이란 연인이 떠나버리고 이 세상엔 나와 내 고통만이 남아 영영 단절되는 것이다.
가장 완벽한 구원
영화는 여기서 끝나도 충분했다. 그랬으면 내가 신성에 위배될 영혼 타령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전혀 예상치 못한 결말이 남아 영화를 완성한다. 회상, 아니 고해성사가 끝나고, 지옥에 혼자 떨어져 울고 있던 로라에게 시종일관 십자말풀이나 하는 한심한 양반이었던 로라의 남편이 다가온다. 그리고 뜬금없이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어디론가 멀리 간 것만 같았는데 나에게 돌아와줘서 고마워.” 이 순간 영화의 은총이 관객에게 내려온다. 지옥에 떨어졌다고 생각한 순간 영화는 구원으로 데려가준다. 이토록 무심하기에, 그래서 완벽한 구원.
그 대사는 잠시 정신을 놓고 있다가 다시 정신을 차린 것 같은 아내에게 무심하지만 친절하기 짝이 없는 남편이 해준, ‘영혼 없는’ 자상한 말일 뿐이다. 그러나 감히 판단하건대, 이것은 로라에게 지금 필요한 완벽한 구원이었다. 도덕적으로 올바름을 따지는 그런 방식의 구원이 아니기에 이것은 정말로 구원이다. 영화를 보고 로라가 부정한 여인이라며 주홍글자를 새기라고 소리 지를 인정머리 없는 관객은 없을 것이다. <밀회>는 이미 수십년 전 영화지만, 한순간 욕망에 빠진 여인에게, 남편에게 무릎 꿇고 죄를 빌라고 할 정도의 낡은 인식으로 사랑을 논하는 작품이 아니다. 이 영화는 연애의 지옥과 구원, 인간에 대한 긍정, 그리고 우리의 비천하고 가녀린 영혼에는 언제나 마땅히 구원의 은총이 존재할 수 있다는 믿음의 이야기다.
영화의 원제인 ‘잠깐의 조우’(Brief Encounter)는 로라와 알렉의 만남을 뜻하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우리의 영혼이 구원의 은총과 잠시나마 조우한 순간을 의미하는 건 아닐까. 스크린 앞에 선 사제는 침묵의 기도로 송구영신 예배를 마무리한다. 오독으로 점철된 이 가난한 칼럼과 만나준 독자 여러분께 2018년이 기쁜 한해가 되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