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알몸이 되는 건 연기의 가식을 벗는 것” 헬렌 미렌
2002-04-17
글 : 백은하 ( <매거진t> 편집장)

1946년생, 올해 나이 쉰여섯, 그러나 헬렌 미렌은 여전히 섹시하다. <고스포드 파크>의 추레한 하녀방 안에 붙어 있던 사진 속 그레타 가르보처럼, 헬렌 미렌은 가장 낮은 곳에 던져져 있다 해도 자신만의 도도함을 잃지 않고 그곳을 무시할 수 없는 어떤 곳으로 만들어내는 재주를 지녔다. 연극무대와 스크린에서 인정받는 연기파 배우이지만 37년 동안 여전히 뜨거운 여인으로 자리잡은 그는, ‘지적인’ 혹은 ‘섹시한’이란 물과 기름 같은 형용사를 동시에 품은 독특한 아우라의 배우다.

<요리사, 도둑, 그의 아내 그리고 그녀의 정부>의 야수파 회화 속에서 튀어나온 듯 강한 이미지로 혹은 <조지왕의 광기>의 귀족적 이미지와 <이집트 왕자>의 기품있는 여왕의 목소리로 헬렌 미렌을 기억하고 있는 관객이라면 <고스포드 파크>에 들어서는 순간 분주한 파티장 어딘가에서 그를 찾을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예의 바르지만 굽실거리지 않고 냉정하지만 사려깊은 가정부 윌슨으로 등장, 위층의 흐늘거리는 귀족들보다 훨씬 기품있고 단호한 품새로 아래층 하인들의 공기를 아우른다.

일레나 리디아 미로노프, 이 보드카 냄새 폴폴 풍기는 본명은 볼셰비키혁명 이후 영국에 정착한 러시아 귀족 출신의 할아버지로부터 얻었다. 런던 필하모닉의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할 만큼 음악적인 재능을 보였지만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택시운전대를 잡았던 아버지와 집시의 피를 이어받은 노동계급 어머니 사이에서 1946년, 영국 런던 치스윅에서 태어난 소녀는 6살 때부터 배우를 꿈꾸었다. 영국국립청년극회에서 공연한 <클레오파트라>(1965)의 연기를 인정받아 로열셰익스피어 극단에 들어가게 되었고 1967에는 <헤로스트라투스>로 스크린에 데뷔했다. 하지만 촉망받는 연극배우에서 섹스심벌로 그리고 영화배우로,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고 자신의 두손으로 굳게 키를 쥐고 나아간 항해였지만 미렌의 인생은 그다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그의 말대로 “침체되어 있었던 뭣같은 날들”의 연속이었다.

“검은옷 입었을 땐 담배피우지마, 꼭 창녀처럼 보이잖아.” “검은색이 아니에요, 푸른색이에요.” 피터 그리너웨이 감독의 <요리사, 도둑, 그의 아내 그리고 그녀의 정부>(1989)에서 ‘도둑’ 남편의 모욕적인 언사에도 ‘그의 아내’ 조지아는 그저 담담하고 엉뚱하게 옷의 색깔을 정정한다. 이 짧은 대화는 절묘하게 헬렌 미렌을 바라보는 세상과 자신의 시각 차이를 대변한다. 모두들 그녀의 성적매력에 방점을 찍었다면 미렌 스스로는 자신의 연기색깔에 방점을 찍어나갔으니까. 하지만 미렌은 대부분 연기파 배우들이 자신의 지퍼를 단단히 붙들어 매고 있는데 비해 스테이지에서도 스크린에서도, 늘 옷을 훌훌 벗어던졌다. “난 알몸이 되는 걸 즐겨요. 특히 못생긴 젊은 여자, 매력적인 노인들 할 것 없이 누드로 누워 있는 해변을 좋아하죠. 하지만 카메라 앞이나 세트에서 옷을 벗는 건 끔찍한 일이에요. 일종의 고문이죠. 다만 그것은 내 일이기 때문이에요. 단지 연기에 있어 가식을 벗어던지는 과정일 뿐이라고요.” 우연히 미렌의 손금을 보았던 한 인디언은 “40대에 이르러야 인생이 풀리겠군”이라고 말했고 그 예언은 정확하게 맞아들어갔다. <칼>(1984), <죠지왕의 광기>(1994)로 칸영화제에서 두번이나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것을 비롯해 각종 영화제와 평단은 그의 노출이 아닌 연기에 주목해나갔다.

치명적인 독극물 같은 매력을 품어내던 젊은 배우는 어느새 분노와 위엄과 질투와 광기, 쾌활과 슬픔 그리고 신념 같은 인간사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주무를 수 있는 ‘지천명’(知天命)의 나이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 검버섯이 피고 목과 얼굴에 주름이 셀 수 없을 만큼 팬다 해도 평생을 두고 자신의 연기와 삶에 당당했던 헬렌 미렌의 허리만큼은 영원히 꼿꼿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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