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영화를 보면서 가장 눈에 들어왔던 디자인은 영화 <로건>(2017)에 나오는 자율주행 트럭이다. 스토리의 전개에는 로건(휴 잭맨)이 운전하는 리무진이 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지만 더 인상적인 디자인은 자율주행 트럭이다. 영화에서 배경이 되는 2029년은 자율주행이 상용화된 상태이고, 운전자주행 자동차와 자율주행 자동차가 도로에 공존하고 있다. 자율주행 트럭은 로건과 자비에 교수(패트릭 스튜어트)가 돌연변이 소녀 로라(다프네 킨)를 데리고 미국 중서부 고속도로를 횡단하는 장면에서 나온다. 자율주행으로 달리는 대형 트럭 하나가 로건의 픽업트럭 앞으로 무리하게 끼어들고 이를 급하게 피하던 로건이 역방향으로 주행하는 장면이다. 로건의 트럭을 무시하며 거칠게 밀고 들어오는 자율주행 트럭의 모습은 시대에 뒤처져 소수자로 변해버린 운전자 자동차의 모습을 보여준다.
관습적인 선택으로부터 벗어나라
<로건>에서 미래의 자율주행 운송트럭은 운전석 공간이 사라진 형태다. 마치 컨테이너가 도로 위를 달려가는 느낌을 주고 있다. 감정 없는 자율주행 트럭이라는 영화 속 성격을 극대화하는 이 인상적인 트럭의 형태는, 곰곰이 생각해보면 논리적인 설계의 결과물이다. 운전자가 필요 없는 절대적인 자율주행의 조건에서 굳이 동력장치를 앞에 배치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기기 때문이다. 자율주행 자동차의 미래를 예상하는 자동차 디자인의 대부분이 좌석의 방향 같은 문제에 집중하는 것과 비교하면 <로건>의 자율주행 트럭은 ‘운전석을 삭제해서’ 새로우면서도 낯선 형태를 만들어내고 있다.
<로건>의 영화미술에서 이와 비슷한 접근은 자비에 교수가 숨어 지내던 폐공장 디자인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로건과 자비에 교수의 은신처는 멕시코 외딴 장소에 위치한 낡은 공장과 쓰러진 철재 물탱크다. 폐공장을 은신처로 사용하는 것이 영화의 공간디자인으로 자주 나오는 시도라면, 쓰러진 물탱크는 새로운 아이디어다. 산업 구조물을 활용해서 거주공간으로 사용하는 것이 이제는 유행으로 변해버린 현상이라면, 물탱크가 옆으로 누웠을 때 만들어지는 공간을 생각해내는 것은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2012년 여수세계박람회는 항구의 산업용 부지를 이용해서 건설되었다. 박람회 부지에는 시멘트 저장고로 사용하던 2개의 콘크리트 사일로가 있었다. 박람회를 위한 대부분의 건물들이 새롭게 건설된 반면, 2개의 사일로는 재활용이 결정되었다. 그리고 이 산업용 구조물을 건물로 변환하기 위해 설계공모전이 진행된다. 1차, 2차 두 단계로 나누어서 진행된 공모전에서 1차에서 뽑힌 5팀 중 한팀은 나머지 팀들과는 다른 접근의 계획안을 제안했다. 4팀이 사일로를 치장하는 데 집중하고 있는 반면에 일러스트레이터로도 유명한 건축가 오영욱의 안은 사일로 2개 중 하나를 쓰러트리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이렇게 쓰러트리는 것을 통해서 원통형의 사일로는 우리가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맨홀을 사용해서 건물을 만든 것과 같을 것인데, 오영욱의 계획안에서 사일로는 바다 방향으로 열려 있다. 쓰러진 사일로와 서 있는 사일로는 한쌍을 이루고 있다. 최종 당선작은 오영욱의 안이 아니었다. 아마도 심사위원들은 콘크리트 사일로를 쓰러트리는 계획에 불안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관습적이고 안정된 선택은, 우리가 새로운 공간을 가질 기회를 놓치게 했다.
<로건>은 울버린 같은 슈퍼히어로도 늙고 병든다는, 단순하지만 생각의 전환이 필요한 아이디어로 시작된다. 슈퍼히어로영화의 관습적인 길과는 다른 길을 택하고 있다. 엑스맨 영화의 뮤턴트들도 늙고 병들어가는 존재라는 사실은 영화를 현실 세계로 내려오게 한다. 이제 자비에 교수와 로건은 자신의 능력을 잃어가고 있는 중이다. 로건의 자연치유능력이 약해진 후 생겨난 몸의 상처들과 나이 든 자비에 교수의 나약한 모습은 이를 잘 보여준다. 몸의 변화뿐만이 아니다. 생활인으로서의 로건은 힘겹게 리무진 운전사로 일하고 있다. 이유는 다르겠지만 다른 나이 든 은퇴자들처럼 로건도 돈을 모아 바다에서 생활할 수 있는 요트를 구입할 계획을 갖고 있다. 영화미술 측면에서도 나이 든 뮤턴트라는 사실은 낡은 폐공장의 모습과 쓰러진 물탱크로 표현되고 있다.
그들은 왜 북쪽으로 가는가
<로건> 속 공간구조를 살펴보면 영화는 북미 대륙의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로건>의 카지노 호텔방 텔레비전에도 나오는 <셰인>(1953)과 같은 서부영화들이 동부에서 서부로 향하는 영화라면, <로건>은 북쪽으로 향하고 있다. 로건 일행은 멕시코의 폐공장 은신처에서 시작해서, 캐나다 국경에 면한 노스다코타주의 산불 감시탑까지 연결되는 길을 이동한다. 그사이에는 텍사스의 주유소, 오클라호마시티 카지노, 캔자스주의 옥수수 가족 농장이 나온다. 그중에서도 캔자스주의 가족농장은 서부영화, 특히 <셰인>을 바로 연상시키고 있다. 하지만 다른 점이 있는데, 서부시대와 달리 이 흑인가족의 농장을 차지하려는 세력은 옥수수를 사용해서 음료를 만드는 거대기업이다.
영화 <로스트 인 더스트>(2016)에서 이미 한번 언급한 것처럼 서부 개발의 기폭제가 되었던 홈스테드법은 서부의 변화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62년에 제정된 홈스테드법은 동부 13개주 밖 서부에서 최소 5년 이상 정착하고 개간하려는 의지가 있는 사람들에게 국가의 공유지 땅을 무상으로 분배하는 법이다. 이 법에 따라 미국 토지의 약 10%에 해당하는 크기의 땅이 독립 자영농의 소유가 되었다. 따라서 서부시대를 배경으로 한 많은 영화들은 토지 소유에 관한 분쟁들을 이야기로 만들어낸다. 토지보다는 난민이나 소수자의 인권 문제가 더 중요한 오늘날 미국의 현실은 영화의 여정을 남쪽에서 북쪽 캐나다로 향하게 하고 있다. <로건>의 공간구조가 남쪽에서 북쪽으로 향하는 로드무비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면 이야기의 구조는 로건 자신의 복제에 관한 것이다. 멕시코에 위치한 한 기업이 뮤턴트들의 유전자를 이용해서 돌연변이 아이들을 만들어낸다. 이곳을 탈출한 아이들 중 로라는 로건의 유전자를 이용해서 만들어졌다. 그리고 탈출한 아이들을 추적하는 기업의 킬러는 로건의 복제품이다. 이를 통해서 로건은 로라와는 아버지와 딸이라는 관계가, 로건의 복제킬러와는 ‘자신의 딸을 구하기 위해 자신과 싸우는 울버린’의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있다.
영화는 로라가 로건의 무덤을 만들고 떠나는 것으로 끝이 난다. 로건은 돌연변이 아이들이 캐나다로 탈출할 수 있도록 돕는 과정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로라는 로건의 무덤을 떠나기 전 십자가 +를 쓰러트려 X로 만들고 떠난다.
<로건>은 영화미술도 흥미로운 영화다. 훌륭한 아이디어를 갖고 있다. 자율주행 트럭과 물탱크 은신처, X로 변한 십자가는 개별적으로 봐도 좋은 디자인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영화와 건축이 아이디어만으로 만들어지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