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강철비> <신과 함께-죄와 벌> <1987> 세편의 한국영화에 대하여
2018-01-24
글 : 김영진 (영화평론가)
상품, 예술, 계몽의 자리
<강철비>
<1987>

올겨울 세편의 한국영화가 이례적인 경쟁구도를 형성했다. 제작비 100억원 이상의 대작들이 겨울 시장에서 한주 차이로 맞붙었음에도 관객의 고른 선택을 받은 것은 꽤 드문 일이다. 먼저 <신과 함께-죄와 벌>(2017년 12월 20일 개봉)이 지난 1월4일 천만 관객을 돌파하면서 역대 20번째 천만 영화가 됐고, 1월 18일 현재 1300만 관객까지 기록한 상태다. 같은 시기, 가장 먼저 개봉한 <강철비>(2017년 12월 14일 개봉)가 440만 관객, 가장 늦게 개봉한 <1987>(2017년 12월 27일 개봉)도 610만 관객을 돌파하면서 흥행세를 이어가고 있다. 지난 1138호에서 이들 세 영화에 대해 김소희·송형국·안시환 평론가가 대담을 나눴던 것에 이어 이번호에서는 김영진 평론가의 비평을 싣는다. 세 영화 모두 얼마간 자신에게 미흡했다는 그의 비평과 함께하시길.

<신과 함께-죄와 벌>

<신과 함께-죄와 벌>(이하 <신과 함께>)을 상영하는 극장 객석은 오열의 바다였다. 너나 할 것 없이 훌쩍거리는 소리가 객석 곳곳에 퍼져나가 미처 울 준비가 안 되어 있던 사람들도 울게 했다. 영화가 끝나자 관객은 언제 그랬냐는 듯 빠른 속도로 자리를 떠나 나갔다. 아마 울었던 자신의 얼굴을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1987>의 극장 객석 분위기도 비슷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울었다. 울었던 사람들은 쉬이 객석을 떠나지 않았다. 관련 화면들이 계속 나오고 있어서 크레딧이 화면에 흐르는 동안에도 뭔가 나오지 않을까 궁금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신과 함께>와 <1987>을 두고 관객이 흘린 눈물의 질적 비교를 하자는 게 아니다. 영화를 보는 우리가 어떤 심정으로 눈물을 흘렸든 그 눈물이 값싼 감상주의로 매도될 수는 없다. 어떤 상황에 대해서도 공감한다는 것은 폄하될 반응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스스로 재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관객 속에 섞여 울컥했던 나의 눈물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그게 지난 연말 개봉한 한국영화 대작 3편에 대해 쓰지 않으려 했던 이유이다.

<신과 함께-죄와 벌>

<신과 함께>, 기능적으로 배치된 고통의 이미지

<신과 함께>를 보며 흘리는 눈물은 불구의 어머니의 형상을 통해 준비된다. 처음 주인공의 가난한 어머니가 말 못하는 존재로 나왔을 때 이 어머니가 결국 영화의 절정부에서 말을 하게 될 것임을 예감할 수 있었다. 정확히 어머니는 그렇게 한다. 꿈의 형태를 빌려 염라대왕이 주재하는 재판에서 관객을 방청인으로 놓고 그렇게 한다. 이 장면을 달리 표현하자면, 말을 하느냐 못하느냐는 단 하나의 차이와 어머니 역 예수정 배우의 육체적 감각의 도움으로 얻어진 눈물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이것들은 쉽게 언어적 환원으로 가둘 수 있다. 말 못하는 가난한 어머니의 이미지 기저에는 곰곰이 음미할 다른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다. 노동과 질병의 이중고를 버티며 이승에서의 삶이 고통 그 자체였던 어머니의 육체적 형상이 주는 범상한 반복의 이미지뿐이다. 자식들에게 미안해하는 심정을 마침내 말로 표현하는 어머니와 자식들의 죄책감이 화음을 이루며 지독한 가난의 불행을 전시한 끝에 환생이라는 선물을 얻게 되는 <신과 함께>의 결말은 이 영화가 보여준 지옥도가 풍경의 들러리였다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자백한다. 이 영화에서의 지옥도는 풍경으로서 존재할 뿐, 또는 롤러코스터의 배경으로 존재할 뿐, 등장인물들은 그 안을 제대로 가로지르지 않는다. 선한 인물들이 자신들이 감당할 수 없는 불행의 질곡에 갇혀 남들만큼 안정된 삶을 보장받지 못했다는 개별적인 스토리가 있는데도 이것들이 쉽게 범주화되는 것은, 이 영화가 우리의 공감을 최대한 끌어낼 수 있는(보편적이라고 쓰고 동시에 상투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불행의 전형을 착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용화 감독이 연출한 모성의 멜로드라마는 진실한 것이 아니고 장식된 것이다. 광고에서 찬양되는 것처럼 필사적으로 지켜야 하는 모성의 상투형을 이 사회의 불행한 사회구조와 연관지어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동시에 이 조작술은 안전하기도 한데, 선한 마음을 가진 인물들을 그리는 선한 영화의 외관에 대해 시비를 걸 사람은 거의 없다.

다만, 이런 것을 생각해볼 수는 있겠다. 이 영화가 끌어안고 있는 여러 메타적 삶의 의미들, 이승과 저승의 경계가 무너져 서로 이어져 있고 누군가가 우리의 선악에 대해 심판을 하며 죽음이 삶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이고 거기서도 우리가 왜 사는가에 대한 윤리적 질문은 영원히 계속되어야 한다는 당위가 <신과 함께>의 서사적 환원성 앞에서는 속절없이 무너진다. 저승의 이미지를 첨단 CG 기술로 구현함으로써 진화한 한국영화임을 스스로 포장하고 있으나 모든 것이 결말의 눈물을 위해 봉사하고 있는 것이어서 화려하지만 의미가 없고 이미지가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역경에 굴하지 않고 자신들의 삶을 살아낸 영웅들이지만 그들의 영웅성을 빛나게 하기 위해 전형성으로 필터링된 서사 구조는 결말을 향해 조바심을 내며 달음질친다. 그들의 고통은 이미지를 통해 구현되지 않으며 그들의 고통을 더 극대화할 저승에서의 이미지도 기능적으로 배치돼 있다. 그들은 그들 자신으로서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세속의 상투형으로 꾸며진 기능들을 위해 존재하고 있다.

<1987>

관행적인 구조를 급차용한 <1987>의 후반

<1987>은 관객의 눈물을 자아내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기까지, 적어도 중반부까지는 단정한 서사를 구축하고 있다. 카메라가 불쑥불쑥 인물들에게 다가가며 역사적 상황의 진실을 캐려는 공격적인 의지를 가장하기는 하지만 모자이크식으로 상황을 축조하며 등장인물들이 한 조각의 진실을 밝혀주고 차례로 퇴장하는 구성은 한국영화에서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카메라가 입회하고 있으나 그것이 서사의 진전을 위해 인물의 감정을 강요한다는 인상이 들지 않는 경지에서 <1987>은 역사를 다룬 영화가 가닿을 수 있는 성취에 이를 뻔한다. 한 시기의 역사가 영웅서사에 기초하지 않고 다양한 인물들이 동시발생적으로 겪는 사건을 축으로 한 페이지씩 넘어간다. 이 조각들의 리듬을 단단하게 꾸미기 위해 카메라가 자기 존재감을 드러내는데 그렇다 해도 재현의 진실성을 훼손하는 정도는 아니다.

영화의 중반부를 넘어가면서 장준환 감독의 연출은 조금씩 조급해지며 박 처장(김윤석)이 고문가해자의 진실을 알린 교도관(유해진)을 심문할 때 그 조급증은 절정에 이른다. 카메라는 두 사람의 얼굴을 극단적으로 클로즈업하고 박 처장이 어린 시절 빨갱이에게 당한 경험을 회상할 때 그의 비극적 파토스는 유난히 강조되며 동시에 심문받는 피해자의 콧물, 눈물 자국이 선명한 얼굴이 화면에 부각된다. 전체를 부감하는 것에서 개인의 감정에로 초점을 이동시킨 서사는 여주인공 연희(김태리)가 이한열(강동원)의 죽음을 알게 되는 후반부에서 한 개인의 각성과 진화를 거리의 시민들과 등치시키면서 승리의 서사로 바뀐다. 순수한 청년의 불우한 죽음에 공명하는 시민들이 광장으로 쏟아져나올 때 화면은 문득 기록 화면으로 바뀌고 인물감정에 집중했던 서사를 진실감으로 고양시킨다. 지금까지 본 모든 것이 허구가 아닌 실화에 기초했다는 증명처럼 붙여진 마지막 기록 화면들은 역사적 사건의 재현을 화면의 이미지가 아니라 서사의 환원성에 의존해 처리했던 대중적 장치를 감추기 위한 보완물이다.

영화 표현의 이상향은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이미지로 뭔가를 표현하는 데 있다. 앙드레 바쟁이 ‘<카비리아의 밤>, 또는 네오리얼리즘 끝으로의 여행’이란 비평 에세이에서 영화가 인물들이 단지 존재하기만 하는 공간을 만들어주었을 때 서사가 정지되는 순간이 현대영화의 본질이라고 했던 지적은 오늘날 자주 망각되고 무시된다. <신과 함께>가 화려한 이미지들로 의미 있는 순간들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장식 이상의 기능을 하지 않는다면, <1987>은 실제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재현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자유롭지 않은 한편으로 실제의 역사를 더욱 뭉글뭉글한 것으로, 인물의 매력을 통해 전달해야 한다는 장치로 윤색한다. 이 영화의 화면들에는 강박적으로 있었던 일들을 보여줘야 한다는 태도와 그것이 초래할 건조함으로부터 뭔가를 윤색해 대중영화의 외관을 갖춰야 하는 또 다른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염려가 교차한다.

이 영화의 초·중반부가 역사와 정치를 관습적인 픽션의 규칙에 종속시키지 않고도 실재하는 현실의 느낌을 스크린에 불러오는 데 성공할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을 자아내게 했다면, 이 영화의 후반부는 미스터리 구조를 추적극과 유사 로맨스 구성으로 환치시킨 후 주인공 연희에 초점을 맞춘 강력한 자기 동일시를 불러일으킨다. <1987>에서 좋은 사람들은 매우 좋고 나쁜 사람들은 매우 나쁘다. 옛날 서부영화에서처럼 명확한 정의와 타락의 구분을 세우고 그 각각의 경계 내에 캐릭터들을 배열한다. 경찰 고위간부를 비롯한 독재권력의 하수인들의 캐릭터 면면이 강고한 악의 형태를 대변한다면 결과적으로 그에 맞서는 사람들은 일부의 선의로 전체의 선의를 완성해가는 조력자들이다. 특별한 이념적 시각이 드러나지 않지만 고지식하고 원칙론자인 검사가 고문치사당한 학생의 진실을 은폐하려는 상부의 방침을 무시하고 부검을 강행하는 것을 비롯해 박종철 학생의 사망을 목격한 담당 의사나 부검의, 기자들이 자기 본분에 충실함으로써 부당하게 권력을 전횡한 이들에게 맞서는 쾌감은 이한열의 죽음이라는 또 다른 죽음 앞에서 상실감을 느끼는 개인의 슬픔과 그 슬픔이 집단화하며 더 큰 항쟁으로 터지는 승리의 서사로 이어진다.

이는 <1987>이 관객으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하는 핵심이다. 승리하였으나 그것이 일시적인 승리였다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그 승리를 위해 희생당한 사람들에게 갖는 부채감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승리했다는 역사적 사실에 안도하는 자기 동일성으로 환원되는 서사는 정치와 역사를 대중영화로 자리잡게 한다. 여기서 정치는 안전한 수준에서만 전경화되며 픽션의 내부에서 극적인 진동을 만들어낸 다음, 결론 부분에선 일시적 승리로 끝나는 역사적 현실을 적시하는 것으로 신중하게 관객의 감정을 통제한다. 좋은 캐릭터와 나쁜 캐릭터를 따로 얘기하는 것은 쉽다. 이것은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정치를 소비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정치에 대한 이런 대중의 성향을 업고 권력의 일상적이고 불평등한 배분이 광범위하게 이뤄진다. 특정 시기의 제도 권력이 나쁜 것이라는 항의만으로 진실의 복합성이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이런 단면적 항의에 걸친 분노, 상실감, 연민, 공감의 감정적 필터로 걸러내지 못하는 현실의 층위는 훨씬 복잡하다. 우리의 현대사는 민주와 반민주의 대립구도에서 이후로도 빠져나오지 못했고 20년이 지난 지금 그다음 단계를 밟고 있다. 추상화된 민중의 선한 의지를 강조하는 것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복잡한 현실이 <1987>에선 선악의 대결로 재배치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7>은 정서적으로 격앙된 반응을 일으키며 동시에 강력한 정치적 진술을 들었다는 느낌을 주게 한다. 한국 사회는 이미 민주와 반민주의 대립구도로만 비추기에는 너무 복잡한 사회가 됐지만, 이 영화는 현 시점에서도 대중이 분열되지 않은 감정을 갖고 올바른 정치적 진술로 받아들이게 한다는 점에서 현재의 영화이다. 좋은 쪽으로나 나쁜 쪽으로나 우리 사회의 수준을 증거하는 영화이고 정치적 메커니즘의 진실을 감정적 자기 동일시로 바꿔 받아들이게 하는 영화이다. 픽션의 관행적인 규칙에 의존하지 않고도 현장에 입회한 듯한 시네마 베리테 스타일로 만들 수 있는 것은 한국의 영화산업 조건에서 불가능할 것이다. 그 대신 이 영화는, 정치는 일상생활이며 우리가 타인들과 관계 맺는 방식이라는 것을 매우 관행적인 로맨스영화의 구조를 급차용해 웅변한다. 타인들과 관계 맺는 방식을 통해 <1987>은 우리가 어떻게 누군가에게 권력을 사용하도록 위임했는가를 현재형으로 묻는다.

<강철비>

<강철비>가 남긴 이미지의 정취

규모와 만듦새에 비해 상대적으로 앞선 두편의 영화에 비해 덜 주목 받은 <강철비>는 두 영화에 비해 명시적으로 표현되지 않은 것들을 통해 심층적인 것에 도달한다는 이상을 추구한다. 이 영화는 북한 1호가 생명이 위독한 상태로 남한에 오게 되는 급박한 상황을 축으로 전개되는 가상 드라마인데도 역설적으로 현실을 환기하게 만드는 흡인력이 있다. 북한 핵발사를 둘러싼 한반도의 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는 와중에 주인공인 청와대 외교수석 곽철우(곽도원)가 미국 CIA 요원을 서울 시내 복판에서 만나는 장면에서 두 사람은 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평화롭게 일상을 영위하는 서울 시민들을 바라본다. 한국인의 일상적인 눈으로는 지각되지 않는 현실의 위험성을 극단적인 드라마로 꾸민 이 영화는 일부 납득할 수 없는 설정과 남과 북이 핵을 나눠 가진다는 동화적 결말에도 불구하고 남과 북이 언제든 공멸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주는 위기감을 몇몇 장면들에서 재현한다. 개성공단에서 벌어지는 북한 쿠데타 장면이 주는 당혹감과 참혹함의 느낌은 북한 정예 공작요원 엄철우(정우성)의 물리적 표상을 통해 지속적으로 긴장을 유지한 채 이어진다. 정우성은 암으로 소멸해가는 몸으로 임무를 수행하는 자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전사로서의 강인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출 수 없는 개인으로서의 연약함을 인상적으로 표현한다. 그의 몸은 이 영화에서 적지 않은 고난에 처하지만 훼손되는 과정에서도 자기 연민으로부터 자유롭다. 그의 육체적 존재가 주는 인상점은 강력한 자기 동일시를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대신 그의 존재감은 어떤 북한 사람에 대한 연민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그 자체로 즉자적인 반응, 상징적으로는 한반도의 절체절명의 위기를 몸으로 대변하는 느낌을 준다. 이 영화는 예상할 수 있는 주인공의 장엄한 죽음으로 끝나지만 급박한 사건의 막간에 배치된 소소한 순간들, 이를테면 남과 북의 곽철우와 엄철우가 수갑을 찬 채 국수를 먹는 장면은 일상적 정경에 정치적 이상을 압축해놓는다. 순전히 상상만으로 만들어낸 이런 사소한 장면은 어떤 명시적 메시지보다 생기가 있으며 다시 보고 싶은 정취를 불러일으킨다.

나는 주류 영화의 서사는 이미지를 보여주기 위한 맥거핀이라고 생각해왔다. <신과 함께>에서 이미지는 상투적이지만 강력한 서사를 보완하는 장식물이다. <1987>은 정직하되 모범적이며 확장성이 없는 이미지를 보여준다. 그에 반해 <강철비>는 극적으로 미미한 순간들의 대유법적 효과를 성취할 가능성을 제시한다. 좋은 영화는 서사적 기능을 다하고서도 그걸 넘어서는 이미지들을 갖고 있다. 요즘 한국의 대다수 주류영화에서는 정반대의 현상이 벌어진다. 이미지는 서사의 환원성, 자기 동일성을 확인하기 위한 맥거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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