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존 머스커, 론 클레멘츠 / 목소리 출연 린 어벌조노이스, 버디 해킷, 조디 벤슨, 팻 캐럴 / 제작연도 1989년
지금은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있지만 20대 중반까지도 나는 이 일이 내 직업이 되리라는 걸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고등학생 때부터 20대 중반까지 나의 관심사는 음악, 소설, 영화(라이브 액션)뿐이었으니까. 소설은 그 취향이 매우 협소해서 한국의 단편소설에만 한정돼 있었고 음악도 당시 유행하던 헤비메탈이나 프로그레시브 록 같은 장르는 손도 대지 않는 편식이 있었지만 영화는 장르를 불문하고 닥치는 대로 섭취했는데, 대학을 다니는 동안은 매주 <씨네21>을 전철역 가판대(!)에서 구입해 앞 표지부터 뒤 표지까지 모조리 읽기, 비디오가게(!!)를 뒤져서 비평가들이 추천하는 영화 찾아보기, 극장을 순례하며 개봉영화 섭렵하기 등 나름 시네필 생활을 하던 시기였다.
당시는 장르영화뿐만 아니라 예술영화도 꽤 많이 개봉했었기 때문에 영화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가진 대학생의 지적 허영심을 충족시키기에 더없이 좋은 시절이었다. 그 많은 영화 중 1991년 12월의 어느 날, 종로의 코아아트홀에서 본 디즈니의 <인어공주>를 주저 없이 ‘내 인생의 영화’로 꼽은 것은, 그날이 지금 나의 아내가 된 그녀와 첫 데이트를 한 날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디즈니의 <인어공주>는 초등학생 이후 애니메이션에 대한 흥미를 잃었던 나를 애니메이션 감독의 길로 인도한 두번의 놀라운 경험 중 첫 번째 경험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디즈니표 뮤지컬답게 영화에서 기억에 남는 장면들은 모두 노래하는 장면들이었고, 그 노래들을 다시 듣기 위해 O.S.T 비닐(!!!)음반을 구입해서 닳도록 듣기도 했다. 에릭 왕자와 에이리얼의 데이트 장면에서 흘러나온 <Kiss The Girl>이나 우르술라의 <Poor Unfortunate Soul> 같은 넘버도 좋지만 압권은 역시 <Part Of Your World>와 <Under The Sea>였다. 영화의 초반에 관객을 영화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담당한 <Part Of Your World>는 바닷속 생활의 행복을 노래하는 <Under The Sea>의 대척점에서 지상 세계를 동경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인간이 되고자 하는 에이리얼의 무모해 보이는 도전이 단지 ‘에릭 왕자에게 한눈에 반해서’라는 빈약한 동기로 설득력이 부족해질 수 있었던 이야기에 힘을 실어준다. 이 곡은 아름다운 선율과 화성만으로도 충분히 즐길 만하지만 무언가를 간절하게 소망하는 어린 소녀의 순수한 마음에 울컥한 기분이 들기까지 했던 것은 그 소망의 끝이 어떤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으로 완전히 무장해제된 이후 영화에 완전히 몰입해서 <Under The Sea>가 끝나는 순간, 극장 내의 다른 관객과 함께 우레와 같은 박수를 치는, 요즘은 보기 드문 광경을 연출할 수 있었던 것은 <Under The Sea>라는 골게터가 워낙 정확한 슈팅을 하기도 했지만 <Part Of Your World>의 택배 크로스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으리라 생각한다.
이 글을 쓰면서 실수하지 않기 위해 영화를 다시 보다 보니 전에는 없던 불만이 하나 생겨버렸다. 에이리얼이 에릭 왕자를 만나고 난 후 이 노래를 다시 부를 때와 달리 도입부에서는 지상 세계에 대한 동경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에 가사도 ‘Part Of Your World’가 아니라 ‘Part Of That World’로 되어 있지만 노래 제목은 여전히 <Part Of Your World>인 것. 이성에 대한 사랑보다 꿈에 대한 열망이 훨씬 숭고하게 느껴지는 건 이제, 늙었다는 뜻이겠지?
이달 감독 레트로봇의 대표이사 겸 애니메이션 감독. <또봇> 시리즈를 제작, 연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