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장이독자에게]
[주성철 편집장] <누에치던 방>과 <초행> 그리고 <공동정범>, 포스트 촛불 시대의 한국영화
2018-01-26
글 : 주성철

포스트 촛불 시대의 젊은이들은 어디로 가는가. 최근 인상적으로 본 한국 독립영화 세편에 대해 말하려 한다. 먼저 1월 31일 개봉하는 이완민 감독의 <누에치던 방>과 지난해 12월 7일 개봉한 김대환 감독의 <초행>은 바로 그 포스트 촛불 시대의 한국영화라 부르면 어떨까 싶다. 물론 지난해 3월 10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에 이르기까지 들끓었던 촛불혁명이 제작 초기 단계부터 이들 영화에 영감을 제공한 것은 아니다. <누에치던 방>은 촛불혁명 이전에 완성해서 탄핵을 예상하기 힘들었던 2016년 가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됐고, <초행>은 촬영하던 중 광화문 촛불집회 장면을 카메라에 담게 되어 2017년 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됐다. 그리고 김일란, 이혁상 감독의 <공동정범>은 촛불혁명이라는 뜨거운 기억의 반대편에서 세월호와 함께 우리의 영원한 트라우마로 남을 용산참사의 기억을 다시금 불러낸다.

<초행>은 광화문 촛불집회에 나간 주인공 커플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영화 내내 “모르겠어”, “나 너무 무서워”라고 말하던 그들, 그러니까 엄마처럼 되지 않으려는 딸과 아빠처럼 되지 않으려는 아들이 만나 이제 막 부모(물론 결혼할지 안 할지 알 수는 없지만)로서 지금껏 겪지 못한 거친 사회에 발을 내딛게 될 조심스러운 초행과, 촛불혁명 이후 새롭게 전개될 대한민국의 초행을 겹쳐놓는다. 거기에는 남자의 부모가 이혼하며 그 나이 든 이들이 앞으로 각자 걸어갈 초행까지 겹쳐진다(게다가 아버지가 동네에 시멘트공장이 생기면서 그간 해온 어업에 종사하지 않고 난생처음 공장의 경비로 일하게 되는 초행까지 있다). 이래저래 희망과 불안이 교차하는 지금의 한국을 충실히 기록한 영화다.

<누에치던 방>에서는 세미나를 함께하는 사람들이 집회에 나가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에 대해 토론하는 장면이 있다. 여기서 주인공 미희(이상희)는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게 힘들고, 별로 한 게 없는데 나한테 고맙다고 하니까 부끄럽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가만히 서 있었다”고 말한다. 어쩌면 많은 다른 이들의 심정이기도 했을 것이다. 마치 이창동 감독의 <시>(2010)에서 시 강좌 수강생들이 저마다 카메라를 보고 자기 얘기를 하던 것처럼 집회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들을 나누는데, 그것이 지금 시점에서 보자면 마치 지난 촛불집회에 대한 후일담처럼 다가온다. 그날 이후 우리는 충분히 대화를 나누었는가, 질문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공동정범>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지난 1140호 ‘허지웅의 경사기도권’에서 허지웅 작가는 “국가 폭력은 서로 돕는 자들을 불신하게 만드는 방법으로 공동체를 무너뜨린다”고 썼다. 그 얘기를 곱씹으며 바로 떠오른 영화는 김동원 감독의 <내 친구 정일우>(2017)였다. 그가 거의 30년 전 만든 <상계동 올림픽>(1988)의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상계동 철거민들과 함께했던 고 정일우 신부를 떠올린다. “천국은 가난할수록 가깝다”며 철거민과 함께 ‘문도 담도 없는 마을’을 꿈꿨지만, 당초 계획했던 공동주택은 짓지 못했고 철거민들은 투쟁 중 사분오열하며 제 몫을 찾아 떠났다. <공동정범>의 인물들처럼, 함께 공동체를 꿈꿨던 이들이 언젠가부터 서로 만나지 않게 됐고 그 기억 자체를 떠올리고 싶어 하지 않았다. 가난뱅이가 세상을 구할 거라던 상계동의 꿈은 실패했고, 올림픽과 함께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정일우 신부는 “생명이 흐르는 강물 같은 것이라면 상계동 주민들은 강물 옆의 나무 같은 존재들이다”라고 말했다. <공동정범>의 그들도 그런 존재들이다. 하지만 국가 폭력은 다시 한번 서로 돕는 자들을 불신하게 만드는 방법으로 공동체를 무너뜨렸다. 그렇게 포스트 촛불 시대, 2018년 1월 절정의 한파와 함께 한국영화의 힘든 초행을 떠올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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