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 빛으로 타오르는 웨스트 할리우드의 크리스마스이브. 포주이자 애인인 남자 대신 마약 소지 혐의로 감옥살이를 하고 나온 신디(키타나 키키 로드리게스)를 맞아주는 것은 단짝 알렉산드라(마야 테일러)다. 두 트랜스우먼의 생계 수단은 매춘이다. 알렉산드라의 실수로 남자친구가 바람피운 사실을 알아챈 다혈질 신디가 종일 상대 여자를 수소문하며 폭주하는 동안, 가수 지망생 알렉산드라는 저녁 공연을 홍보하는 전단을 돌린다. 여기에 알렉산드라의 단골인 아르메니아계 택시 기사 라즈믹(카렌 카라굴리안)의 사연이 더해진다. 2015년 선댄스영화제에서 아이폰 5S로 촬영한 와이드 스크린 영화라는 화제성을 넘어 높은 완성도로 찬사를 모은 <탠저린>은, 세번의 크리스마스가 지나서야 한국 개봉관에 도착했다. 신작 <플로리다 프로젝트>가 2017년 칸을 시작으로 호평받으며 바쁜 시상식 시즌을 보내고 있는 숀 베이커 감독은 기자의 질문에 동영상으로 답변을 보내왔다.
-시나리오를 본격적으로 쓰기 전에 스토리나 캐릭터를 찾아 특정 지역에 가서 시간을 보낸다고 들었다.
=최근 몇 작품은 내가 속하지 않은 세계에 관한 영화여서 외부자로서 리서치가 필요했다. 가장 대상을 존중하는 리서치 방식은, 그들이 사는 곳에 직접 가보고 아무것도 모름을 인정하는 데에서 출발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해당 지역과 그곳에서 일어나는 현상, 거기 사는 주민들을 소재로 픽션을 쓸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길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저널리스트가 그러하듯 사람들에게 다가가 가능한 한 인터뷰를 많이 했다.
-이 영화가 첫 작품이었던 두 주연배우와 여전히 연락하고 지내나? <탠저린>을 포함해 영화 작업은 당신에게 새로운 친구를 만들어주었나.
=지금도 소식을 주고받는다. 마야 테일러는 <다이어트 랜드>라는 작품에 캐스팅됐다. 영화는 새로운 장소에서 좋은 스탭과 일하며 낯선 커뮤니티와 접하는 경험이다. 우리는 은연중에 본인과 계급이나 인종이 비슷한 사람들과 서클을 형성하는 경향이 있는데, 영화를 통해 그 테두리를 벗어나 친구를 만들 수 있었다.
-사회적 약자인 인물들에게 접근할 때 공감(empathy)하되 연민(sympathy)하지 않는다는 원칙에 충실한 것 같다. <탠저린>도 두 트랜스우먼의 하루를 따라가는 도중 그들이 매일 마주하는 지난한 현실을 드러내지만 고발하거나 해결책을 제시하려 하지 않는다. 극중 모녀를 염려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제한돼 있는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바비(윌럼 더포)는 그런 면에서 감독의 분신 같기도 하다. 캐릭터를 다루는 윤리적 원칙이 있다면 무엇인가.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바비는 모럴의 보루 같은 존재긴 하다. 그러나 캐릭터를 만들 때 가장 윤리적인 방식은 캐릭터가 윤리적으로 모범이 될 필요가 없음을 아는 거다. 작가 자신을 다루듯 인물을 다루며, 살아 있는 그대로의 인간으로 묘사해야 한다.
-<탠저린>의 테마를 둘 꼽는다면 우정과 배신이다. 극중 신디와 알렉산드라의 하루는 이 주제와 밀착돼 있다. 그러나 택시 기사 라즈믹의 사연이 이 영화에 꼭 필요하다고 여긴 까닭은 무엇인가.
=라즈믹을 연기한 배우 카렌 카라굴리안은 내 모든 영화에 출연한 행운의 부적 같은 존재다. 그가 없었다면 어쩔 뻔했는지. (웃음) <탠저린>을 준비하며 나와 함께 브레인스토밍을 하던 카렌이 말하기를 로스앤젤레스에는 대단히 큰 아르메니아인 이민 공동체가 있는데 미디어에서는 거의 조명하지 않으며 그중 다수가 택시를 운전한다고 했다. 택시 기사와 매춘 여성은 쉽게 접촉하게 되고 라즈믹의 스토리라인이 메인 스토리를 받쳐주게 된다. 로스앤젤레스에는 대중문화에서 제대로 대변되지 않는 서로 다른 배경을 지닌 다양한 소외된 민족들이 살고 있는데, 이같은 이야기 구조로 상이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같은 이야기와 관심으로 연결되는 광경을 보여줄 수 있었다.
-스토리텔러로서 가진 자보다 못 가진 자가 이야기의 주체로 더 흥미롭다고 생각하는지.
=사실 그들이 소재로서 더 흥미롭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다만 덜 재현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할리우드는 오랫동안 특정한 계층의 사람들을 주로 묘사해왔다. 이야기를 쓰고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도 상대적으로 특권을 누리는 집단이다. 영화는 비싼 예술이고 그 세계에 진입하려면 일정한 교육과 커넥션을 요한다. 필름메이커가 되는 이들은 상대적으로 유복한 상황이기에 자연히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한쪽으로 치우치게 됐다. 보편적인 욕망과 꿈을 가진, 기복이 있는 삶을 마이너리티 그룹과 하위문화에 속한 인물들을 통해 이야기하는 데 끌릴 뿐이다.
-사회·경제적으로 소외된 캐릭터의 삶을 이야기하다보니 당신의 작품엔 매춘, 가짜 브랜드 상품 제작 등 불법적 경제 세계가 자주 묘사됐다. 영화 작업을 통해 얻은 지하경제에 관한 통찰이 있나.
=지하경제는 쉬지 않고 변화하기 때문에 내게 인사이트가 있는지 모르겠다. 지금 지하경제는 웹으로 이동하고 있어 눈에 보이지 않는데 내 영화들은 거리에서 이뤄지는 가시적 거래에만 초점을 맞췄다. 흥미롭긴 했다. 우리는 자본주의를 예찬하는 자본주의사회에 살지만 현실에서는 배경, 교육, 성별, 인종으로 인해 공평히 성취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이 생존하는 방식이 지하경제다.
-<탠저린> 후반의 ‘도넛 타임’에 모든 인물이 모여 비밀과 거짓말을 폭로하는 클라이맥스는 멋진 불협화음이다. 우선 이 도넛 가게를 중요한 로케이션으로 고른 과정이 궁금하고 다음으로는 혼란스러운 블로킹과 겹치는 대사를 어떻게 연출했는지 알고 싶다.
=도넛 타임은 할리우드와 웨스트 할리우드의 경계에 있는 가게로, 실제 거리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허브다. 이 장소를 로케이션으로 확보하지 못하면 <탠저린>을 만들 수 없다고 프로듀서에게 말했다. (웃음) 다행히 이틀 밤 동안 내부 촬영을 허락받았고 셋쨋날에는 외관만 찍었다. 줄곧 아이폰 두대로 촬영하다가 그 장면만은 좁은 공간에서 다양한 앵글을 커버하다보니 결국 한대로 촬영했다.
-<탠저린>과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크레딧에 똑같은 이탤릭 필기체 폰트를 썼는데, 관련해서 들려줄 이야기가 있는지.
=감독들이 한 폰트를 꾸준히 사용하는 걸 좋아한다. 우디 앨런, 카펜터 등이 그렇게 한다. 나는 좀 늦게 네 번째 장편 <스타렛>(2012)부터 오프닝 타이틀 시퀀스를 벽을 배경으로 띄우는 방식을 쓰기 시작했고 말한 필기체 폰트는 <탠저린>부터 쓰고 있다. 드디어 내 스타일을 찾았다!
-베토벤의 <코리올란 서곡>부터 덥스텝까지 다채롭고 예측 불가한 음악들을 <탠저린>에 사용했다. 뮤직 슈퍼바이저에게 어떤 요청을 했나.
=솔직히 <탠저린>은 음악이 영화에 쓰일지 안 쓰일지 몰라서 프로듀서에겐 음악 예산은 잡지 말라고 했다. 실제로는 소셜 미디어를 통해 아주 저렴하게 음악을 썼다. 사운드 클라우드에서 아직 계약하지 않은 오리지널 뮤직 중 마음에 드는 음악을 찾아 약간의 비용을 치르고 사용했다. 늦은 밤 오랫동안 웹을 헤맸지만 만족스러운 과정이었다.
-라스 폰 트리에, 마이크 리, 켄 로치 같은 감독을 영화적 영향을 준 감독으로 언급한 바 있다. 유럽 동시대 감독이 주된 영감인가? <탠저린>을 보면서는 미국 고전 스크루볼 코미디와 멜로드라마 중 좋아하는 작품이 궁금하기도 했다.
=언급된 인물 외에 루벤 외스틀룬드, 울리히 사이들도 중요한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시아영화에도 관심이 많다. 현재 내게 큰 영향을 주는 감독은 <오아시스> <시> <밀양>의 이창동 감독이다. 소노 시온 감독도 이제야 어울리는 관심을 모으고 있다고 본다. 요즘은 이탈리아의 스파게티 웨스턴, 지알로 호러에도 빠져 있다. 장인적 측면이 좋다. 미국 스크루볼 코미디는 좋아하진 않는데 다음 작품이 스크루볼 코미디가 될 것 같아서 좀더 친숙해져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