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호의 트립 투 유럽]
[트립 투 이탈리아] 바티칸과 영화
2018-02-01
글 : 한창호 (영화평론가)
로셀리니의 낙관과 모레티의 비관
페데리코 펠리니의 <달콤한 인생>에 등장한 바티칸 장면. 오른쪽의 아니타 에크베리가 성직자와 비슷한 의상을 입고 있어 펠리니는 ‘신성 모독자’라고 공격받았다.

로마는 성지다. 성베드로 대성당을 비롯한 수많은 교회들, 지하 무덤들(Catacombs) 그리고 기독교인들을 죽였던 콜로세움 같은 순교지들이 성지 로마의 역사를 한눈에 알게 한다. 그 가운데 바티칸은 성지 로마의 중심이다. 베드로 성당, 베드로 광장, 사도 궁전, 바티칸 미술관 등이 몰려 있어 연중 내내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아마 누구라도 (종교에 관계없이) 원형의 베드로 광장에 들어서면 어머니의 품 같은 아늑하고 편안한 느낌을 받을 것 같다. 광장을 내려다보며 베드로 성당이 긴 팔을 둥글게 벌려 이곳에 들어서는 모든 사람들을 안아주는 형상을 띠고 있어서다. 베드로 성당 하나만으로도 로마는 가톨릭의 성지답다. 당연히 바티칸은 수많은 영화에 등장한다. 하지만 늘 성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는 건 아니다.

로셀리니, 바티칸의 희망을 보다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무방비 도시>(1945)가 발표되며, 네오리얼리즘과 함께 파시즘에 대항하던 이탈리아의 레지스탕스도 유명세를 얻었다. 로셀리니는 <무방비 도시>에서 레지스탕스의 세 축으로 공산주의자 지식인, 노동자 그리고 이들을 돕는 성직자를 꼽았다. 최종적으로 지식인은 고문 끝에 죽고, 노동자는 나치에 끌려가고, 성직자는 총살당한다. <무방비 도시>는 그 허무한 비극성 때문에 역설적으로 더 큰 사랑을 받았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로셀리니가 레지스탕스의 범주 속에, 설사 조력자의 위치라 할지라도 사회의 또 다른 주요한 축인 자본가는 포함시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로셀리니는 로마에서 극장업을 하던 유명한 부자의 아들이다). 말하자면 좌파가 주도한 이탈리아 레지스탕스 역사를 인정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된 것은 성직자였다. 로셀리니는 성직자를 공산주의자, 노동자와 더불어 파시즘의 희생자로 그렸다. 그런데 목숨을 걸고 나치 그리고 파시즘과 싸웠던 레지스탕스의 입장에서 보면 이건 쉽게 수용할 문제가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말해 이들에게 성직자는 파시스트의 조력자였지 레지스탕스의 조력자는 될 수 없었다. 하지만 로셀리니는 성직자도 희생자로 그림으로써 해방된 이탈리아의 주역에 ‘바티칸’을 포함시켰다. 이것이 전후의 화합을 희망하는 대의(大義)의 낙관주의인지 영리한 절충주의인지는 사람마다 다른 평가를 내릴 것이다.

성직자가 문제가 되는 건 1929년 파시스트와 이탈리아 교회 사이에 맺어진 악명 높은 ‘라테란 조약’ 때문이다. 이 조약을 통해 이탈리아 교회는 파시스트 정부를 지지했고, 대신 지금의 바티칸을 교황령으로 얻었다. 그때는 안토니오 그람시 같은 정치인들이 파시즘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감금되고 결국 죽임을 당할 때인데 말이다. 교회는 바로 그 정부를 인정했다. 이후 공산주의자, 노동자, 농민이 주축이 된 ‘레지스탕스’ 그리고 이에 맞서 자본가, 교회의 지지를 등에 업은 ‘파시스트’, 이들 양 진영의 대결구도가 형성된다(이 테마를 천착한 작품이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1900>이다). <무방비 도시>의 신부가 말한 것, 곧 ‘정직한 것이 신의 뜻’이라는 의미와는 사뭇 다르게 교회는 처신했다. <무방비 도시>의 마지막 장면은 성직자의 총살형(순교)이다. 그 비극을 바라본 소년 레지스탕스들이 낙담한 채 로마 언덕을 걸어 내려가는데, 저 멀리 바티칸의 베드로 성당이 보인다. 로셀리니는 그 모든 영욕을 덮고, 바티칸을 역사의 목격자로 해석했다. 로셀리니는 교회가 다시 민중의 친구로 되돌아올 수 있기를 바랐던 것 같다.

교회는 가진 자들의 편이라는 주장은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가 예리하게 제기한 바 있다. 원래 교회는 예수와 그의 헐벗은 사도들에 의해 발생했는데 말이다. 파졸리니의 두 번째 장편 <맘마 로마>(1962)는 가난한 집안의 딸로 태어나 팔려가다시피 노인과 결혼했고, 결국 매춘부로 길에 쫓겨난 여성(그의 별명이 ‘맘마 로마’)의 삶을 다룬다. 맘마 로마의 소원은 하나뿐인 아들이 자기와 달리 부끄럽지 않은 직업을 갖고 사는 것이다. 오직 그것을 위해 엄마는 ‘무시당하면서도’ 교회에 가서 기도도 열심히 한다(그 교회는 유독 부자 신도들에게 친절하다). <맘마 로마>에서도 바티칸은 영화의 결말부에 등장한다. 불행한 삶에 절망한 맘마 로마는 집의 창문에서 투신하려 하는데, 친구와 이웃들이 달려와 가까스로 그의 죽음을 막는다. 그때 창문 저편엔 바티칸의 베드로 성당이 보인다. 교회를 바라보는 맘마 로마(안나 마냐니)와 가난한 이웃들의 절망한, 원망 가득한 눈빛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J. J. 에이브럼스의 <미션 임파서블3> 속 바티칸 침투 장면. 나폴리 인근 카세르타에 있는 ‘왕궁’에서 촬영됐다.

모레티, ‘교황은 없다’

바티칸은 로마 서쪽, 테베레강 건너편에 있다. 그 일대는 로마에서도 부촌으로 꼽힌다. 뭐랄까, 큰 사원 아래 형성된 사하촌(寺下村) 같다. 베드로 성당과 그 주변의 부유한 경관은 시각적 아름다움은 물론 경제적 여유까지 느끼게 한다. 그런데 바티칸이 영화에 비친 모습은 파시즘 시절의 ‘흑역사’ 때문인지 ‘어둠’과 관계를 맺을 때가 적지 않다. 대표적인 게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대부3>(1990)다. 마피아의 두목(알 파치노)이 성전이자 교황의 거주지인 ‘사도궁전’(Palazzo Apostolico)에서 고위 성직자와 협상을 벌이는 것이다. 개봉 당시에도 이런 설정은 큰 논란을 불러왔는데, 사실 파시즘 시절의 역사를 기억한다면 허구 속의 상상은 결코 비현실적인 이야기는 아닌 셈이다. <대부3> 이후, 바티칸은 범죄의 배경으로 더 자주 등장했고, 최근 작품으로는 <미션 임파서블3>(감독 J. J. 에이브럼스, 2006)가 있다. 여기서도 무기밀매상(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이 사도궁전에서 열리는 바티칸의 파티에 들어가서, 성전을 자신의 밀매 장소로 타락시킨다.

그런데 바티칸 배경 장면은 대개 다른 곳에서, 혹은 스튜디오의 세트에서 촬영된다. 바티칸이 영화 촬영을 허가해준 경우는 홍보용 다큐멘터리 제작 이외에는 거의 없다. <대부3>는 세트에서 그리고 <미션 임파서블3>는 나폴리 인근 카세르타(Caserta)에 있는 ‘왕궁’(La Reggia)에서 촬영됐다. 특히 ‘카세르타의 왕궁’은 ‘이탈리아의 베르사유 궁전’이라 불릴 만큼 거대하고 화려해서 영화의 배경으로 자주 등장한다. 왕궁의 외관은 바티칸의 미술관을 닮았고, 그 내부도 웅장하고 화려하다.

페데리코 펠리니도 바티칸을 별로 긍정적으로 그리지 않았다. 로셀리니의 조감독 출신인 펠리니는 스승처럼 정치적으로는 중도파인데, <달콤한 인생>(1960)에서는 종교의 중심 바티칸을 보기에 따라서는 조롱하듯 묘사했다. 도입부에서 예수의 동상을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고 등장시키는 것부터 교회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더 나아가 펠리니는 ‘황색저널’의 기자(마르첼로 마스트로이안니)와 ‘육체파 배우’(아니타 에크베리)의 데이트 장면 배경으로 베드로 성당을 이용해 성전을 졸지에 세속적인 육욕의 장소로 만들어버렸다. 게다가 에크베리는 성직자 복장을 닮은 의상을 입고 있어서 이들의 데이트 장면은 이탈리아의 ‘카사노바’와 교회의 ‘성직자’가 수작을 부리는 것처럼 보였다. 펠리니는 ‘신성모독자’로 공격받았고, 바티칸은 일부의 비웃음을 샀다.

바티칸에 대한 가장 회의적인 시각, 가장 비관적인 시각이 드러난 작품은 난니 모레티의 <우리에겐 교황이 있다>(2011)일 것이다. 과거처럼 바티칸의 권위를 찬양하거나 혹은 조롱하는 게 아니라 아예 냉소적인 태도로 무시하는 듯 보여서다. 그건 무관심에 가깝다. 믿음, 사랑, 평화 같은 바티칸에 덧붙여진 그 모든 가치들을 장 보드리야르의 개념을 빌리면 ‘시뮬라시옹’이라고 보는 것이다. 원래 그런 건 없는데, 있는 척(시뮬라시옹)한다는 지독한 냉소다. 모레티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새로 선출된 교황이 그 직무를 수행할 수 없다며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으로 자신의 깊은 회의주의를 드러냈다. 그래서 제목은 반어법이며 ‘교황은 없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성지 로마의 심장에 있는 바티칸, 모레티에 따르면 ‘그런 건 없다’는 것이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