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염력>이 트라우마를 소환하는 방식, 주변에 일으키는 물결에 관하여
2018-02-20
글 : 송경원
아직 준비가 안 됐다, 어쩌면 영원히

나는 실사영화 감독으로서의 연상호를 그리 미덥게 바라보지 않는다. <부산행>(2016) 때 한 차례 언급한 바 있는데 영리한 연출자 연상호를 얻은 대신 애니메이터 연상호는 딱 그만큼 희미해진 게 아닌가 싶었다. 애니메이션으로 구현될 때 흥미롭던 것들이 실사 영역에서는 전형적이고 편편한 형태로 비쳐졌기 때문이다. <염력>을 보고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정확히는 연상호 감독이 어떤 방식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영상으로 결과를 구현하는지 파악하는 데 3편의 애니메이션과 2편의 실사영화가 필요했던 것 같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연상호는 작가의 자질을 갖추고 있다고 본다. 작가란 매번 이상적이고 통일된 형태의 결과물을 뽑아내는 존재가 아니다. 그건 잘 훈련된 기술자에 가깝다. 모름지기 작가라면 일종의 매개가 되어야 한다. 제 몸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육화된 반응으로 토해낼 필요가 있다. 때론 그 형태가 보는 이의 기대를 배반하기도 하고 자신의 의도를 정확히 구현하지 못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염력>은 연상호가 세계가 반응하는 방식을 선명하게 드러낸 영화이자 의미 있는 실패작이다.

영화를 보고 글을 쓰는 작업의 운명이라는 게 대부분 그렇지만 이번에는 특히 주관적인 감상을 전제로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려 한다. <염력>을 둘러싼 혹평에 굳이 반론을 제기할 마음은 없다. <염력>은 단순하게 직진하면서도 마디마저 헐거운 영화다. 연상호는 아버지-화해의 서사를 벌써 세 편째 반복 중인데(<사이비>(2013), <부산행>, <서울역>(2016)) <염력>은 그중에서도 과할만큼 통속의 서사를 도식적으로 적용한다. 코미디의 타이밍은 종종 엇박자를 치고 전반적인 극의 호흡이 완급 조절이나 뚜렷한 굴곡 없이 내달린다. 용산참사 같은 예민한 소재를 에둘러가는 요령도 없다. 아니, 애초에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인다. 이 영화는 거리를 둔 은유와 풍자 대신 불편할 만큼 직접적인 이미지를 불쑥 들이민다. <염력>에 쏟아지는 아쉬운 목소리들은 대체로 타당한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흥미로운 건 이러한 분석들은 <부산행>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는 점이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 <염력>은 흥미로운 부분과 투박한 지점까지 <부산행>과 별반 다를 바가 없는 영화다. 하지만 두 영화를 대하는 대중의 반응은 확연한 온도차가 있다. 무엇이 이토록 다른 결과를 가져왔을까. 이 글은 거기서부터 출발해보려 한다.

무엇을 바라건 반드시 기대를 배신한다

초능력을 소재로 한 오락영화로서 <염력>이 주는 즐거움은 대체로 만족스러웠다. 이 영화의 헐거운 드라마는 극을 따라가는 데 방해가 될 정도로 울퉁불퉁하진 않았고 투박한 액션이나 CG 역시 내겐 B무비 특유의 납득 가능한 조악함으로 다가왔다. 정작 나를 당황시킨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염력>은 용산참사를 겪은 집단의 트라우마를 정면으로 들이받는다. 이 영화는 그때 그 비극의 물리적이고 강력한 힘이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매우 단순한 형태로 제시한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도 내가 이 이야기를, 일련의 이미지들을 정면으로 마주볼 준비가 되어 있는지 걱정이 됐다. 단순히 그날의 기억을 복기한다거나 비유를 동원해 사건을 재구성하는 게 아니라 이걸 하나의 오락으로 개조하여 소비하는 게 허락될 것인지에 대한 마음의 짐이 있었다. 크레인에 매달린 사람에 대고 직사로 물대포를 쏘는 이미지는 지나치게 과격하고 직접적이라 보는 순간 영화 속 가상의 무대인 ‘남평상가’에 머물지 못하고 용산참사 또는 광화문 시위 현장 앞, 그러니까 현실로 끌려나와버린다.

대개 영화가 트라우마를 돌아보는 방식은 두 가지 방식으로 정리된다. 하나는 트라우마의 해결. 대중상업영화들이 주로 택하는 이 방향은 가공의 상황을 통해 해결하지 못한 것들을 대신 해소해준다. 가령 베트남전을 소재의 일부로 활용한 <포레스트 검프>의 경우 휴먼 드라마라는 틀 안에서 역사의 상처를 개인의 역경으로 치환하여 치유한다. 서부극처럼 더럽혀진 영웅을 소환하여 악을 응징한 후 떠나가는 이야기도 있다. 이 경우 대개 적대적인 세력, 다시 말해 악역이 분명하게 지정되며 이를 물리적으로 제거하는 것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안긴다. 두 번째는 상처가 생긴 상황을 되돌아보고 구조적 문제를 환기시키는 영화들이다. 이 영화들은 일부러 불편하여 외면했던 것들을 꺼내어 시대의 풍경을 제시하고 질문을 유도한다. 해결되지 않는 엔딩을 통해 각자가 가상의 이미지와 현실과 대조하는 사이 큰 그림을 볼 수 있도록 돕는다. 9·11 이후 나온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나 <데어 윌 비 블러드> 같은 영화가 여기에 해당한다고 본다.

<염력>은 둘 중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이상한 영화다. 아마도 이성적으로는 첫 번째 부류에 속하고자 했던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 트라우마에 대한 해소도 실패하고 상처를 어루만지지도 못한다. 이유가 뭘까. 나는 그것이야말로 감독 연상호의 특질이라고 느낀다. 애니메이션 때부터 꾸준히 자신의 몸으로 축적해둔, 한국 사회를 감각하는 연상호의 자리가 빚어낸 결과라 해도 크게 엇나간 짐작은 아닐 것이다. <염력>은 용산참사로 대표되는 공권력의 폭력과 부당한 압력에 대해 뒤늦게 꺼내든 반작용이다. 때리니까 아프고 건드리니까 되갚아주고 싶은 마음. 거기서부터 출발한 상상. 이 영화는 한국 사회에서 한 개인에게 거대한 힘이 주어졌을 때 무엇이 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1차원적인 대답이다. 동시에 무엇을 할 수 없고 무엇을 바꿀 수 없는지를 아는 자의 낙담이기도 하다. 만약 <염력>이 아예 장르에 투항해 물리적 실체가 있는 악을 설정하고 응징하는 서사로 갔다면 쾌감도 명료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연상호는 자신이 보고 겪은 현실 인식으로부터 달아나지 않는다. <돼지의 왕>(2011), <사이비>, <서울역>이 축적해온 한국 사회라는 거대한 압력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었던 것 같다. 그 순간 초능력 활극 <염력>은 변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분노와 좌절에 관한 고백으로 변모한다.

<염력>의 구성은 얼핏 서부극을 연상시킨다. 외부인이었던 아버지가 남평상가에 등장해 이들을 수호한 후 죄를 뒤집어쓰고 다시 남평상가를 떠나는 이야기. 차이가 있다면 아버지가 물리쳐야 할 적의 물리적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철거 크레인이나 경찰, 깡패들은 적이 될 수 없다. 민 사장(김민재)은 꼬박꼬박 영수증 정산을 하는 생계형 수행원이고 홍 상무(정유미)는 스스로 자각하듯 한국 사회라는 시스템의 1등급 노예이자 대변인에 불과하다. 때문에 거대한 물리적 힘을 획득했음에도 그 힘을 어디로 어떻게 휘둘러야 할지 모를 때의 좌절감과 답답함은 점점 증폭된다. 종국에는 힘에는 힘으로 저항한다는 1차원적인 상상이 결국 환상에 그치고, 실체는 없지만 더욱 거대하게 느껴지는 압력만 명료해지는 것이다.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상업영화의 모든 클리셰를 따와서 진행하다가 종국엔 연상호가 늘 그래왔던 부조리에 도달하는 이상한 행보.

그렇다고 <염력>이 구조적 부조리를 뚜렷하게 환기시키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적어도 감독 자신은 이 영화가 어디까지나 즐거운(모순적이지만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다) 코미디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코미디 장르의 전형 아래 토핑처럼 시사적인 요소들을 박아넣었다면 그것도 가능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연상호의 현실 인식은 이미 결정되어 있고 스스로도 거기서 벗어날 수 없는 것 같다. 초월적인 능력이 생겨도 결국 화목하게 치킨 장사를 할 수밖에 없는 헬조선식 군고구마 엔딩은 그에 따른 부산물이다. 해피엔딩으로 위장된 일종의 패배 선언이랄까. 석현(류승룡)이 민 사장에게 한방 날리고 내뱉는 “이겨서 좋냐?”는 말 정도가 아마도 우리가 세상을 향해 내뱉을 수 있는 전부일 것이다. 그 불편한 진실을 봉합된 가족, 아버지와 딸의 화해라는 도식적인 풍경으로 쉽고 빠르고 무리하게 덮는 건 거의 관객을 무시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왠지 모를 불쾌함의 정체. 이건 차라리 장르영화가 꾸미는 위악적인 환상, 해피엔딩을 향한 조롱이며 교훈을 남기는 우화라기보다는 자조적인 블랙코미디에 가깝다. 결과적으로 <염력>은 <사이비>처럼 부조리한 상황을 깊이 있게 파고들어 시스템의 위악을 고발하지도 못하고, <부산행>처럼 코미디, 액션이 버무려진 장르적 쾌감을 제공하지도 못한 채 양쪽 모두의 기대를 배반하는 어정쩡한 자리에 머물고 만다.

연상호 코드, 부조화를 향한 일관된 비딱함

그럼에도 나는 <염력>의 실패를 긍정한다. 연상호의 작가적 특질 때문에 발생한 실패라고 믿기 때문이다. <염력>을 보면서 불현듯 <클로버필드>(2008)가 겹쳐 보였다. <클로버필드>가 괴수에 의한 재난 상황을 1인칭으로 재현하는 방식은 9·11 이후 미국의 공포를 건드린다. 다만 그 이미지들은 현실에 관한 성찰이라기보다는 재난의 감각 그 자체에 대한 모사다. 나는 <염력>에서 이와 유사한 기시감을 느꼈다. <염력>에는 용산참사로 상징되는 한국 사회의 트라우마가 상징적 형태로 묘사된 이미지가 있다. 정확히는 시스템의 폭압과 부서지는 개인의 육체, 그 감각을 이미지화한다. 시위 장면을 말하는 게 아니다. 바로 석현이 경찰서를 탈옥한 후 도심을 가로질러 남평상가로 날아가는 장면이다. 석현의 능력에 맞설 빌런이 없는 이 영화에서 석현은 자신의 힘에 휘두르는 과정에서 상처를 입는다. 이리저리 도약하며 건물과 땅에 처박히는 석현의 육체는 마치 권력에 저항하는 시위 장면을 연상시킨다. 만화가 굽시니스트는 충돌 자체가 시위의 본질이라고 말했다. “시위라는 쐐기는 물리량을 가져야 한다. 정권의 강권은 경찰 차벽이라는 실체로 드러나야 하고, 소수의 항의는 그 벽에 부딪치는 뼈와 살로 체화되어 드러나야 한다.”(<본격 시사인만화> 2015년 11월 27일 ‘시위이이잉’) 내겐 이 장면이야말로 한국 사회에서 시위라는 행위를 이미지라는 물질로 옮겨놓은 것처럼 느껴졌다. 둔탁하게 깨지고 구르는 석현의 육체는 사회라는 거대하고 단단한 힘과 개인의 바람이라는 이기적이고 소박한 힘들이 충돌하는 순간의 뭉개진 고통을 형상화한다. 초능력이라는 소재와 연상호의 현실인식이 결합한 독특하고 유일한 장면이다. 유사한 도약 이미지를 선보인 <핸콕>이나 <맨 오브 스틸>과 비교해보면 얼마나 ‘한국적’인 장면인지 대번에 드러난다. 이 이미지 하나만으로도 <염력>은 다시금 논의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연상호의 영화에는 봉준호의 ‘삑사리’와는 또 다른, 한국 사회를 함의하는 코드를 발견할 수 있다. 미흡하지만 굳이 여기에 이름을 붙인다면 ‘삐딱함’ 정도가 적절할까. 봉준호의 삑사리가 시스템의 어긋남을 드러내는 특유의 박자에 가깝다면 연상호의 ‘삐딱함’은 부조화의 요소들을 기계적으로 뭉친 후 그 안에서 삐죽 튀어나온 모양을 통해 불만족(혹은 잠재적 분노)을 드러내는 방향성이다. 봉준호의 ‘삑사리’가 상상된 재현을 현실 영역으로 끌어내릴 때, 연상호의 ‘삐딱함’은 현실을 우화의 영역으로 추어올린다.

어쩌면 기대를 배신한다는 건 연상호의 오랜 강박이 아닐까 싶다. 그는 <돼지의 왕>에서 관습적으로 소비되던 한국 애니메이션의 전형을 깨고 불편한 이야기를 불쑥 내밀었다. <사이비>에서는 애니메이션의 본질이라고 오랫동안 받들어져온 작화, 표현기법, 움직임, 이른바 애니메이션다운 것들을 따르지 않고 실사영화 같은 리얼리즘 드라마를 전면에 내세워 묘한 부조화의 색다른 감흥을 자아냈다. <부산행>도 마찬가지다. 실사를 다룰 때의 연상호는 실사와는 가장 거리가 먼 판타지적인 상상력으로부터 이야기를 출발시킨다. 익숙한 듯 낯선 영화들은 그렇게 탄생해왔다. 다만 이 모든 결과물들이 철저히 그의 통제에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는 관습이나 대세에 저항하고 비틀어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지점을 찾아나가고자 하지만 이 반응의 결과물은 그때그때 다른 형태로 발현된다. <부산행>은 예상 밖의 즐거움으로 남고 <염력>은 조악한 불쾌함으로 기억되는 것처럼 말이다. 여기서 내가 끝내 긍정하고 싶은 건 다름 아닌 그 반골기질, 압력에 저항하는 본능적인 고집이다. 작가가 시대를 반영하는 매개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미덕이기도 하다. 작가란 이를테면 시대의 물결을 거스르며 서 있는 꼿꼿한 작대기다. 그 주변에 생기는 파장을 통해 우리는 거기에 시대라는 흐름이 존재하는 것을 감지한다. <염력>을 저주받은 걸작으로 기억하자는 게 아니다(연상호의 필모그래피 안에서도 소품 정도라고 생각한다). 다만 <염력>이란 작대기 자체에 대한 호불호를 잠시 젖혀두고서라도 그 주변의 물결의 형태에 대해서 좀더 다양한 이야기가 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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