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영화]
니키 리의 <천녀유혼> 장국영이 죽어도 인생은 계속됐다
2018-02-21
글 : 니키 리 (아티스트)

감독 정소동 / 출연 장국영, 왕조현 / 제작연도 1987년

1988 경상남도 거창_ 너무나도 작은 읍내였다. 그런 읍내에 차이밍량의 영화 <안녕, 용문객잔>에 나오는 딱 그런 극장이 있었다. 나는 야간자율학습을 땡땡이치고 자주 혼자 극장에 가곤 했다. 대학 입시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그 극장에서 <천녀유혼>을 만났다. 난 이상하게도 귀신과 사람의 인연을 다루는 영화에 항상 끌린다. 그럴 때 귀신의 미련과 회한은 징하게 슬프다. <천녀유혼>을 보고 일주일을 야간자율학습 시간 내내 책상에 엎드려 끙끙 앓았다. 그러고는 친구 신미혜에게 이렇게 말했다. “장국영을 만나야겠어. 중국어과를 갈까 아니면 국어국문학과를 가서 <스크린> 기자를 할까? 장국영을 만나려면 어느 쪽이 더 쉽겠니?”

1991 경기도 안성_ 사진과는 안성에 있어 서울까지 스쿨버스를 타야만 했다. 어느 날 한 선배가 나에게 자기 차로 서울에 같이 올라가자고 했다. 차를 타고 가는데 선배가 어색했는지 조용히 카세트테이프를 밀어넣었다. 아는 남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장국영이었다. 선배는 <천녀유혼> 영화 전편을 카세트테이프에 녹음을 해서 듣는다고 했다. 우리는 고속도로에서 같이 영화를 들었다. 한남동에 도착해서 떡볶이를 먹었다. 한밤중에 바다도 같이 보러 갔다. 서해안 바닷가에서 선배는 과거와 현재, 미래가 시간성에 있지 않고 공간성에 있다고 느껴진다고 했다. 대학 졸업 후 선배는 파리로 나는 뉴욕으로 유학을 떠났다.

1994 뉴욕 차이나타운_ 차이나타운은 신세계였다. 좋아하던 홍콩영화에 나왔던 음식들을 먹어봤다. 멀기만 했던 장국영이 가까이 있는 거 같았다. 이름이 예쁜 극장도 있었다. 로즈메리 극장. 거기서 <천녀유혼>을 또 봤다. 장국영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로즈메리 극장은 1998년에 문을 닫았다.

1995 뉴욕_ 선배의 죽음을 들었다. 29살. 마지막으로 얼굴을 봤을 때 나에게 마패같이 생긴 목걸이를 선물로 줬었다. 선배는 “이게 너를 지켜줄 거야”라고 말했다. 유학 시절에 만난 친구와 함께 회사를 설립했다는 얘기도 했다. 그 회사가 다음커뮤니케이션이고 선배의 이름은 박건희다. 지금은 가족분들이 박건희 문화재단을 설립해 후배들을 돕고 있다. 나는 가끔씩 선배의 묘소에 다녀온다. 선배의 말대로 과거, 현재, 미래가 공간성에 있다면 지금 이 공간 저 어디쯤에 선배가 있었으면 좋겠다. 같이 <천녀유혼>의 노래를 들으며 차를 타고 서울로 가고 있겠지. 나는 선배가 너무나 그립다.

2003 04 01 뉴욕_ 집에 들어오니 전화 메시지가 남겨져 있었다. 고등학교 친구 신미혜였다. 장국영이 죽었다고 했다.

2013 서울 이태원_ 이태원의 글램 라운지는 핫했다. 테이블에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만나 알게 된 홍콩의 영화 제작자와 친구들이 있었다. 내 옆에 앉은 사람은 유난히도 말이 없었다. 얼굴에 쓸쓸한 기운이 감돌았다. 알고 보니 그 사람은 장국영의 애인이었다. 장국영이 죽은 지 10년이 된 해였다. 애인이 힘들까봐 친구들이 한국으로 데리고 온 거였다. 나는 가만히 그 사람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장국영의 애인이 내 눈앞에 앉아 있었다. 이 사람은 얼마나 장국영이 그리울까.

2017 모스크바_ 러시아에서 ‘내 인생의 영화’ 원고를 쓰고 있다. 나는 유태오라는 배우와 결혼해서 남편을 따라 모스크바에 와 있다. 남편은 빅토르 최 역할을 맡아서 <여름>(Leto)이라는 러시아영화를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감독과 찍고 있다. 조지아 와인 한병을 사놓고 홀짝거린다. 호텔 창밖으로는 눈발이 끊임없이 날린다. 와인과 날씨 탓에 이 글을 써놓고 보니 내 인생의 영화가 아니라 내 인생이 되어버렸다. 다들 내 인생의 영화 원고를 쓰다보면 어느새 자기 인생을 훑고 지나가게 되나보다. 어쩌겠나.

니키 리 아티스트, 감독. 다큐멘터리 <A.K.A. Nikki S. Lee>(2006) 연출. 현재 장편 극영화를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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