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토피아로부터]
여자들의 우정을 그리는 방식
2018-02-22
글 : 권김현영 (여성학자)
일러스트레이션 : 마이자 (일러스트레이션)

고대 그리스에서 우정이란 인간 사이의 공적 상호작용이 도달할 수 있는 지고(至高)의 것으로 찬미되었다. 훌륭한 정치공동체란 곧 좋은 우정을 나눌 수 있는 곳을 의미했다. 그렇기에 우정은 언제나 남자들의 것이었다. 몽테뉴는 여자들은 영적 교감을 나누기에는 너무 얄팍하고, 그렇게 견고하고 질긴 관계의 압박을 견딜 만큼 강하지 않다며 여자들 사이 우정의 깊이를 공개적으로 부정하기까지 한다. <여성의 우정에 관하여>라는 책을 쓴 메릴린 옐롬에 따르면 18세기 이후 점점 우정의 공적인 얼굴은 남성에서 여성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사적 영역에서 고립되었던 여성들은 공적 영역에 나오자마자 열렬하게 우정을 맺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여자들이 더 우정에 헌신하며, 그렇기 때문에 여자들 사이의 우정은 남성 사회를 위협한다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래서일까. 여자들의 우정에 대한 영화는 보통 빛나는 학창 시절을 회고하거나 대도시의 화려한 삶을 공유하는 이야기였다. 여자의 우정이라고 밝고 빛나고 찬란하기만 할 리는 없다. 오랫동안 여자들의 우정에 대한 의심어린 시선은 우정의 다른 면을 보지 못하게 했다. 남자들은 가장 친한 친구의 등에 칼을 꽂아도 “고마 해라 많이 먹었다 아이가”라고 말하며 한때 죽고 못 살던 친구를 배신하는 인간의 페이소스를 보여주었지만, 여자들이 싸우고 배신하는 이야기는 그저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증거를 하나 추가하는 일에 불과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친구의 죽음, 부재 혹은 멀어짐은 여자들의 인생에서 때로 연애보다도 치명적이다. 영화 <누에치던 방>(2016)은 여자들의 잃어버린 우정에 대한 영화다. 주인공 미희(이상희)는 연애, 결혼, 출산, 직업, 집을 포기했다고 알려진 세대의 자화상처럼 보인다. 하지만 미희가 찾아다니는 건 저런 목록들이 아니다. 미희는 고등학생 때 친했다가 갑작스럽게 멀어진 친구를 애타게 찾는다. 마치 자신이 원래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기억하려는 사람처럼. 그건 나중에 미희와 특별한 우정을 나누는 성숙(홍승이)도 마찬가지다. 성숙은 20년 전 단짝으로 지낸 친구가 갑자기 죽은 이유를 지금도 찾고 있다. 이 기묘한 영화는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방식으로 여자들의 우정에 대해, 그것도 부서진 관계에 대해 다룬다.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이반 일리치는 오늘날 공동체적인 삶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각자가 가꾸는 우정의 결과이며, 사회는 이렇게 맺어지는 우정의 정치적 결과만큼만 좋아질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해받는 것 따위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던 미희는 성숙 앞에 앉아 비로소 따져 묻는다. 그리고 그 힘으로 부서진 관계를 찾아가 기어이 복원되지 않는 우정을 직면한다. 영원한 우정을 맹세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이제 더이상 같이할 수 없는 위치를 직면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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