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민 감독의 첫 번째 장편영화 <누에치던 방>은 하나의 전제에서 시작하는 영화다. 주인공 미희(이상희)는 어느 날 지하철 안에서 우연히 마주친 여고생(김새벽)을 따라 지하철에서 내리고 그녀를 쫓아서 성숙(홍승이)의 아파트까지 가게 된다. 미희는 성숙에게 무작정 고등학교 단짝친구라고 말한다. 그런데 성숙은 아무런 의심도 없이 그녀를 받아준다. 이런 전제가 없다면 이 영화는 성립할 수 없다. 이제부터 영화는 그녀들의 만남을 통해 그녀들의 주변 사람들(미희와 헤어진 남자친구를 성숙이 만나고, 성숙과 함께 사는 익주를 미희가 만나게 되는)과 서로 엮이면서 잠실이란 공간을 중심으로 새로운 관계를 형성해나간다. 영화는 따뜻한 톤의 색채(과거)로 학교 운동장을 돌아 교문을 나가는 전세버스(유영의 영결식 차량)의 부감숏으로 시작한다. 그런 다음 앞 장면과는 대조적으로 차가운 느낌의 색채(현재)로 2호선 지하철 안의 여고생(김새벽)의 모습으로 연결된다. 이처럼 영화는 시작하자마자 서로 다른 색채의 톤을 보여준다. 이는 앞으로 영화에서 다른 톤의 이미지를 통해 과거와 현재가 서로 교차할 것이란 것을 미리 알려주는 장면이다. 등장인물들은 현재를 살아가고 있지만 그들은 과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미희는 고등학생 때 단짝 친구 근경에게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한 후 연락이 끊긴 지 10년이 넘었다. 성숙은 고등학생 때 단짝친구 유영(김새벽)을 먼저 저세상으로 보냈다. 감독은 등장인물의 과거와 현재를 꿈과 회상을 통해 자연스럽게 넘나드는 독특한 구조를 만들어낸다.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장면은 영화의 후반 미희가 근경(옛날 친구)을 만나기 위해 자신을 창고에 가뒀지만 성숙(현재 친구)을 위해 스스로 창고에서 나오게 되는 아이러니한 장면이다. 이 장면은 연속적인 이중의 꿈(미희와 여고생의 만남, 미희의 장례식장)구조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감독이 굳이 복잡한 이중의 꿈(상상)구조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려고 한 것은 무엇일까?
이제 꿈 장면으로 가보자
먼저 첫 번째 꿈(미희가 여고생을 만나는) 장면 이전의 상황을 살펴보자. 미희는 학창 시절 늘 함께 붙어다닌 친구 근경에게 각자 대입 준비를 하자고 한다. 그녀는 입시의 중압감 때문에 친구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부담이 되었을 수 있다. 그 이후로 친구와 연락이 끊겼고 그렇게 10년이 흘렀다. 성숙에게 자신을 단짝친구라고 주장한 미희는 진짜 그녀의 단짝친구 근경이 생각났을 것이다. 미희는 근경에게 여러 차례 연락했다. 전화를 안 받는다고 화도 내고 미안했다고 사과도 했지만 그녀는 아무 소식이 없다. 그녀를 불러내기 위해서 미희는 특단의 조치를 취한다. 자신을 창고에 가두고 열쇠를 근경에게 보낸 것이다. 그녀가 와서 문을 열어줘야만 미희는 창고에서 나올 수 있다.
이제 꿈 장면으로 가보자. 졸업식 날 미희는 여고생에게 프리지어꽃을 주면서 다른 사람으로 착각해서 미안하다고 한다. 그러곤 앞으로 그녀의 삶의 증인이 돼주겠다면서 졸업을 축하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미희는 그녀를 누구라고 생각했다가 자기 생각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일까? 여고생은 꽃을 보면서 온실에서 키운 꽃이라며 냉소적으로 말한다. 게다가 꽃을 바닥에 버리면서 너무 이기적이라고 한다. 왜 그녀는 이런 심한 말을 하는 것일까? 어쩌면 미희는 여고생의 입장이 되어 자신이 듣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은 아닐까. 미희가 떨어진 꽃을 주우려는 데 꽃은 사라지고 바닥에 흐트러진 메모지와 볼펜들이 보인다. 이 장면은 미희가 여고생과 처음 마주친 영화의 시작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지하철 안에서 여고생은 승객들을 향해 메모지와 볼펜을 나눠주면서 자신에게 어떤 말이라도 좋으니 한마디만 부탁한다고 했다. 그때 미희는 모른 척 외면했다. 그날 그녀는 여고생을 쫓아갔고 성숙을 만났다. 여고생은 바로 미희와 성숙을 만나도록 연결해준 매개자였다. 그런데 감독은 그녀를 현실에 존재하는 실재 인물(여고생)인지 과거에서 온 유령(유영)인지 모호하게 보여준다. 실제로 그녀들은 같은 인물(김새벽의 1인2역)로 등장한다. 또한 유영은 고교 시절 자살한 성숙의 단짝친구라고 밝혀진다. 도대체 그녀는 누구인가? 하지만 감독은 그녀가 누구라도 상관없다는 듯이 미스터리한 인물로 남겨놓는다. 미희는 그녀에게 “용기를 가지고 살자”라는 글을 적어서 준다. 물론 이 말은 미희가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하고 부모가 원하는 사법시험을 10년간 준비했다. 이제 그녀는 시험을 포기하려고 한다. 그녀는 남자친구와도 헤어지고 집까지 나왔다. 그때 성숙을 만났다. 미희는 너무 절박한 심정으로 성숙에게 단짝친구라고 말한다. 그런 미희를 보고 성숙은 거절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 순간 성숙은 자살한 친구 유영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두 번째 꿈(미희의 장례식장) 장면은 근경이 창고 복도를 달려오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그녀는 너무 늦게 도착했다. 미희는 들것에 실려나온다. 이어서 장례식장이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누구의 장례식장인지 알지 못한다. 잠시 후 근경이 들어와서 성숙의 앞자리에 앉는다. 성숙은 근경을 알아보고 그녀에게 ‘미희의 단짝친구’라고 말한다. 미희의 선배의 목소리가 들릴 때 카메라는 천천히 그녀들을 지나서 선배의 모습에서 멈춘다. 이때 미희의 목소리가 들린다. 다시 카메라가 천천히 이동하면 선배 맞은편에 미희가 앉아 있다. 이 장면이 흥미로운 것은 근경이 장례식장에 들어오고 미희의 모습을 보여줄 때까지 감독이 컷을 나누지 않았다는 것이다. 감독은 왜 이 장면을 카메라의 움직임을 통해서 보여주는가? 이는 꿈 장면이나 다른 과거의 회상 장면에서 등장인물들이 과거의 모습으로 나왔다는 것을 떠올려볼 때 이 장례식장이 비현실이란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카메라의 이동을 통해 등장인물들을 보여줬다고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선배는 미희에게 ‘옛날 친구를 찾지 말라’며 ‘사람이 나이 들면 만나는 사람도 달라져야 한다’고 충고한다. 그녀가 ‘사람을 어떻게 가려서 만나냐’고 반문했을 때, 신념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말한다. 이제 그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때 미희에게 병원의 보호자가 돼달라는 성숙의 전화가 온다. 결국 미희는 스스로 창고를 나온다. 이렇게 과거의 근경을 현재로 불러내기 위한 미희의 극단적인 선택은 실패한다.
결말에서 다시 보는 첫 장면
영화의 결말에 미희는 선배가 말한 충고(옛날 친구를 찾지 말라)를 듣지 않고 성숙과 함께 근경이 재직하는 학교를 찾아간다. 미희 앞에 나타난 근경의 첫마디는 ‘스토커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이제 와서 우리가 함께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감독은 그녀가 말하는 동안 미희의 얼굴만 보여준다. 근경의 입장에서 볼 때 이렇게 불쑥 찾아온 미희의 행동이 너무 일방적이라 생각될 것이다. 아무 말 없이 근경의 말을 듣고 있는 미희의 표정에서 영화는 끝난다. 이 영화의 주된 공간은 잠실(누에치던 방)이다. 이곳은 재개발과 롯데타워로 예전의 모습이 사라지고 있는 공간이다. 미희가 과거의 친구 근경을 만나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 선배가 미희에게 충고했던 말. 이 모두는 잠실이란 공간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첫 번째 꿈 장면에서 미희가 여고생을 찾아와서 당신 인생의 증인이 돼주겠다고 말했지만 여고생이 너무 일방적이라고 한 말이 결말의 예지몽처럼 느껴지는 것은 우연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