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이와이 순지 / 출연 나카야마 미호, 도요카와 에쓰시 / 제작연도 1995년
고백하자면, 나는 결정장애를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다. 그래서 ‘내 인생의 영화’ 한편을 소개하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엄청난 고민에 빠졌다. 수많은 선택지들 중에서 어렵게 선택한 영화는, 하얀 설원에서 인연을 향해 안부 인사를 건네는 영화, <러브레터>다.
인연, 작게 소리내어보니 첫눈 오는 새벽 같은 아스라한 감정이 배어나온다. 아니, 그것보다는 오래된 세월이 묻어 있는 단어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인연’이라는 말에는 추상적이고 비과학적이고, 약간은 비밀스럽고 놀랍고 설레는 그런 비현실적인 감정들이 모인다. 우연과 운명의 사이 어디쯤 그것은 자리할 것이다. 우연이 자꾸 모여서 인연이 될 수도 있고, 온갖 우연들을 수집해서 감히 운명이라 이름 짓는 사이에 그것은 존재하기도 한다. 아무튼 인연이라는 말은 상당히 낭만적이다. 애석하게도 아직 나에게는 ‘인연’이라는 이름으로 뒤돌아볼 그럴싸한 과거는 없었던 것 같아서, 영화 <러브레터>를 처음 접했던 고등학생 시절을 떠올려본다. 같은 반 친구가 “어제 집에서 일본영화를 봤는데 엄청난 영화인 것 같다”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당시 난 그 친구에게 “그 영화 나도 볼 수 있을까?”라고 물어보았다. 친구는 자신의 언니에게 조르고 졸라 비디오테이프를 힘들게 공수해주었다. 그날 바로 집으로 달려와 이런 (제목이 붙어 있지 않은) 비디오테이프는 처음이라 의식을 치르듯 조용히 숨죽이고 비디오를 보기 위한 준비를 하고 감상했던 기억이 난다.
<러브레터>는 죽은 연인을 잊지 못하는 히로코가 자신의 옛 연인 이츠키에게 편지를 보내며 시작된다. 그리고 그 편지를 받은 같은 이름의 한 여자는 편지를 통해 자신의 삶에서 잊혀졌던 이츠키를 기억하게 된다. 한 남자를 통해 두 여자는 과거와 현재를 서로 잇게 되고, 영화는 사랑하는 연인에 대한 그리움과 그것이 사랑인지 몰랐던 시절의 첫사랑을 담는다. 비디오테이프의 화질이 너무 좋지 않아 답답한 구석이 있었지만, 이후 <러브레터>가 한국에 정식으로 개봉되었고 나는 수능을 치른 뒤 서울극장에서 친구와 다시 한번 이 영화를 보았다. 당시의 감동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2년 전쯤, 영화 <립반윙클의 신부> 굿즈 작업 제안이 왔었다. 당시 작업실에서 “이와이 순지요?”라는 말과 함께 저마다의 영화 감상을 늘어놓았던 기억이 난다. 우린 두 가지의 배지를 작업했고, 신기하고 재미있게도 많은 사람들이 ‘소시민워크’라는 이름을 이 작업을 통해 많이 기억해주었다(아직도 배지 구입 관련 문의를 받고 있다). 나름 이와이 순지와의 인연이지만 평소 흠모해왔던 감독의 작품 굿즈를 만드는 건 낭만적인 일인 것 같다.
양경애 소시민워크에서 영화 굿즈를 기획하고 만들고 있다. 종종 출판물을 발행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