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텀 스레드>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윌럼 더포가 연기한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모텔 매니저 바비는, 얼떨결에 호밀밭의 파수꾼이 된 남자다. 관광 모텔의 시설을 관리하고 정비하는 것이 본디 업무 내용이었지만, 불황의 여파로 매직캐슬 모텔이 극빈층의 레지던스로 변하자, 그는 투숙객들에게 일종의 ‘생활주임’이 된다. 보호자들이 일당을 버는 동안 남겨진 아이들이 위험에 빠지지 않나 한눈으로 살피는 것도 일과다. 요컨대 바비는 가난한 매직캐슬의 마법사다. 동분서주하며 고단한 일과를 끝낸 바비가 땅거미를 바라보며 담배에 불을 붙이는 순간, 기적처럼 모텔의 외부등이 일제히 켜지고 조악한 건물은 아주 잠깐 진짜 마법의 성처럼 보인다.
02/21
1950년대가 배경인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의 <팬텀 스레드>에는 두채의 집이 나온다. 하나는 집과 의상실을 겸하고 있는 런던의 디자인 하우스이고 다른 하나는 항구 마을의 별장으로 작업실을 포함한다. 두집의 주인은 16살에 어머니의 재혼 웨딩드레스를 직접 만든 일을 계기로 줄곧 드레스를 지어온 완벽주의자 디자이너 레이놀즈 우드콕(대니얼 데이 루이스)이다. 영화는 런던 우드콕 하우스의 아침 제의로 시작한다. 집 맨 위층에 사는 ‘성주’(城主) 레이놀즈와 그의 매니저인 누나 시릴(레슬리 맨빌)이 완벽하게 차려입은 다음 문을 열면 줄을 서서 기다리던 여성 재봉사들이 비로소 출근한다. 레이놀즈는 재봉사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아침 인사를 한다. 내려오는 레이놀즈와 올라오는 직원은 계단에서 살짝 몸을 돌려 서로를 지나친다. 두 사람이 동시에 지나가기에는 너무 좁아 요령이 필요한 가파른 계단. <팬텀 스레드>가 탐구하는 사랑이라는 관계도 그러하다.
우선 관계의 한쪽 당사자인 그는 누구인가? 레이놀즈 우드콕은 죽은 어머니의 머리카락을 옷 솔기에 바느질해 넣고 다닐 만큼 유년기에 고착된 폐쇄적 천재형의 예술가다. 어머니의 유령을 비롯해 그는 여자들의 울타리를 두르고 산다. 경영을 전담하는 누나, 재봉사, 고객에다가 주기적으로 교체되는 입주 뮤즈 겸 모델이 있다. 본인의 영감과 일과를 흔드는 미세한 잡음도 용납치 못하는 그는 기존 모델을 내보낸 직후 마음의 파문을 다스리고자 시골 별장으로 내려가자마자 꾸밈없는 태도를 가진 웨이트리스 알마(비키 크리엡스)에게서 곧장 이상형을 발견하고 런던으로 데려온다. 이 뻔뻔하게 자로 잰 듯한 타이밍은,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이 이번에는 일종의 게임을 디자인하고 있음을 말한다. <팬텀 스레드>에는 섹스 신이 없다. 관점에 따라 레이놀즈는 무성애자로 보이기도 한다. 다만 폴 토머스 앤더슨은 패션쇼 도중 굳이 구멍을 통해 본인의 드레스를 입은 모델의 워킹을 엿보는 레이놀즈의 숏으로, 스코포필리아(scopophilia)가 이 남자에게 중요한 쾌락의 원천임을 암시한다. 첫 데이트에서 서슴없이 알마의 입술 화장을 지워버리고 “훨씬 낫다”고 품평하는 레이놀즈는, 머릿속에 있는 절대적인 미와 여성의 이상을 옷으로 구현해 상대에게 입히고 그것을 바라보는 데에서 행복을 찾는다. 영화에 등장하는 우드콕표 드레스의 특징은 우아하되 각진 실루엣으로 여성의 몸을 지탱하고 ‘조각’한다는 데에 있다. 스타일로 예견할 수 있듯, 유행을 경멸하는 레이놀즈는 죽어가는 시대에 속한 딱한 예술가이기도 하다. 아무튼 고착형 인간인 것이다. 가상의 쿠튀르지만 아마도 우드콕 하우스는 변화없이 1960년대를 살아남지 못했을 터다.
그렇다면 알마는 누구인가? 영화는 그녀의 과거를 생략한다. 룩셈부르크 출신 비키 크리엡스의 억양이나 벨기에 공주와의 장면으로 이방인임을 암시할 뿐이다. 순순히 레이놀즈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알마는 부와 권력을 지닌 남자에게 기꺼이 픽업된 신데렐라로 보인다. 그러나 비키 크리엡스가 분한 알마는 <팬텀 스레드>가 대니얼 데이 루이스의 원맨쇼인 줄 알았던 관객에게 최대 반전을 안긴다. 영화를 두 번째로 보는 동안 나는, 첫 관람에서 많은 알마의 반격을 놓쳤음을 깨닫고 웃었다. 그녀는 웅얼거릴지언정 항복하는 법이 없다. 대화의 마무리도 꼭 자기쪽에서 짓는다. 감독은 알마의 캐릭터를 단번에 제시하는 대신 영화의 솔기 곳곳에 감춰두었다. 처음 모델이 되던 날 알마는 똑바로 서라는 레이놀즈의 핀잔을 그냥 넘기지 않고 “어떻게요? 진작 그렇게 말하지 그랬어요?”라고 대꾸한다. 시도 때도 없이 가봉하는 레이놀즈를 위해 서 있었던 일화를 추억하며 독백하는 “나는 누구보다도 오래 서 있을 수 있었어요”(No one can stand as long as I can)라는 대사는, 누구보다 오래 자기의 입장을 견지할 수 있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그녀는 레이놀즈가 강요하는 아침 식탁의 침묵이 우스꽝스럽다고 토를 달고, 아무도 그녀에게 묻지 않는 원단에 대한 견해를 말한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그를 알아가야 해요”(I have to know him in my own way)라고 선언하며 남자와 충돌한다. 영화 전반부의 한 장면에서 레이놀즈의 드레스를 예찬하는 여성들은 “당신의 드레스를 입은 채 죽어 매장되고 싶다”고 말한다. 알마는 다르다. 그녀는 레이놀즈의 드레스를 입고 만들며 살길 원한다. 옷 만드는 과정에서 자신이 한 기여를 주장하듯, 우드콕의 드레스가 모욕당할 때 레이놀즈보다 더 분노한다. 지난 2월 2일 로테르담국제영화제에서 집행위원장이 <팬텀 스레드> 상영에 참석한 비키 크리엡스에게 “대니얼 데이 루이스와 연기하는 일이 긴장되지 않았나요?”라고 묻자 눈치 빠른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이 끼어들었다. “왜 긴장한 쪽이 비키라고 단정하시죠?”
레이놀즈와 알마는 병적인 천생연분이다. 정신적 사도마조히즘의 10라운드 경기 같은 둘의 관계에서 출구를 찾는 쪽은 알마다. 알마가 없는 삶을 원치 않는다고 호소했다가, 남매가 이룩한 세계를 알마가 망친다고 투정하며 오락가락하는 레이놀즈는 동시에 갖기 불가능한 둘을 함께 가지려 든다. 이 딜레마를 극약처방으로 해결하는 알마의 행위는 언뜻 이기적으로 보이나 관계의 전체 그림에서는 총대를 멘 격이다. 병상에 누운 레이놀즈는 어머니의 환영이 알마와 교대하는 듯 보이는 광경을 목격한다. 사춘기에 고착돼 있는 이 자폐적 예술가가 어머니의 자리를 (못 이기는 척 기꺼이) 알마에게 넘기리라는 전조다.
시골뜨기 이방인 알마가 우드콕가에 입성하고 시릴에게 관찰당하는 시점까지만 해도 <팬텀 스레드>는, 우드콕과 이름도 비슷한 히치콕의 스릴러 <레베카>의 설정을 반복할 듯 보인다. 갑자기 신분상승한 평범한 여자가 저택에 깃든 죽은 여자의 환영에 억눌리고 미쳐가는. 그러나 시릴은 동생의 천적인 알마에게 점점 호감을 느끼고 알마는 노이로제에 걸리기는커녕 교섭권을 키워나간다. 누구의 환상일지 모를 영화의 에필로그는 어쩌면 그녀가 우드콕 하우스를 넘겨받았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부추긴다.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은 자신이 아파서 온전히 무력해졌을 때 아내(마야 루돌프)의 얼굴에 떠오른 기묘한 만족감과 기쁨으로부터 <팬텀 스레드>를 구상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고보면 영화 제목도 감독 이름과 이니셜이 같다. 하지만 폴 토머스 앤더슨은 레이놀즈를 부둥부둥 끌어안는 대신 거의 놀려대고 있다. <팬텀 스레드>는 압도적 재능을 가진 남성 예술가로부터 나온 자기애의 가장 세련된 표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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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씬거리기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온몸과 마음을 주체할 수 없는 사랑을 처음으로 경험하는 열일곱의 여름을 천천히 음미하는 영화다. 소년 엘리오(티모시 샬라메)는 고고학 교수인 아버지의 별장에 놀러온 대학원생 올리버(아미 해머)에게 사로잡힌다. 엘리오는 조숙하지만 미숙하기도 하다. 날 받아줄까? 좋아해주지 않는다면 죽는 것이 나아. 태연한 척 속을 끓이며 올리버 주변을 얼씬거린다. 올리버와 자전거를 달려 시내로 나간 어느 오후, 엘리오는 “넌 모르는 게 없구나”라는 올리버의 말에 “정말 중요한 건 몰라요”라고 마음을 발설하기 시작한다. “당신은 아셔야 할 것 같아요. 왜냐하면 당신한테만 말할 수 있으니까.” 올리버는 시치미는 떼지 않지만 조심스럽다. 이미 느껴온 ‘그것’을 처음 언급하는 둘의 대화는 단속적이고 괄호를 포함한다. 너무 가까워질까봐 혹은 밀쳐낼까봐 겁내듯, 엘리오와 올리버는 뚝 떨어져서 광장의 동상 주변을 돌며 띄엄띄엄 말을 주고받는다. 그리고 카메라는 멀찍이서 둘 사이의 거리까지 화면에 담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