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소공녀> 배우 이솜, "개성 있어 보이는 나 자신의 모습에 만족한다"
2018-03-22
글 : 이화정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잘 곳이 없어서 “하룻밤만 재워줄래?” 하고 친구집을 전전하는 20대 여성 미소. <소공녀>의 미소는 대학 중퇴 후 제대로 된 직장 없이 일당 4만5천원을 받는 가사도우미로 일하며 결혼도 하지 않은 여성이다. 과거 기준대로라면 구제가 불가능한 ‘사회낙오자’로 평가받기 딱 좋은 상황. 하지만 미소는 정해진 기준에 구속되지 않고, 담배와 위스키 같은 기호 식품을 탐닉하며 살아가는, ‘제멋’을 지닌 요즘 여성이다. 큰 키에 독특한 스타일, 건조한 화법으로 무장한 이솜의 당당함과 어우러지고 보니, 미소의 라이프스타일이 한층 더 멋지고 부러워진다. 이솜은 판타지와 리얼함을 이종교배한 <소공녀>의 독특한 설정 안에서, 미스터리함과 사실성 두 가지를 모두 획득하는 과제를 수행해낸다. 기존 상업영화 위주의 필모그래피에서도 <소공녀>는 그녀에게 새로운 도전이었고, 이 영민한 배우는 지금의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몸에 꼭 맞게 소화해냄으로써 자신의 색깔을 입증해낸다.

-<범죄의 여왕>(2015)을 찍은 광화문시네마가 제작한 작품이다. <범죄의 여왕> 때 402호 고시생 경진숙으로 잠깐 출연하면서 인연을 맺기도 했는데, 그때 이미 <소공녀> 출연 이야기가 오간 건가.

=<범죄의 여왕>은 <족구왕>(2013)을 만든 광화문시네마 작품을 보고 좋아해서 먼저 같이 하자고 연락했었다. 그땐 2회차밖에 촬영 안 해서 현장 분위기를 많이 느끼지 못했다. 그러다가 <범죄의 여왕> 개봉 때 <소공녀> 쿠키 영상을 보고 이 작품에 호감을 가졌다. 처음에는 미소의 연령대가 30대 이상으로 설정되어 있어서 지금보다 좀더 나이 많은 배우를 찾았었다. 그런데 중간에 연령대가 바뀌면서 <범죄의 여왕> 이요섭 감독님에게 연락이 왔다. 미소 역을 해보지 않겠냐고.

-그간 참여한 작품들을 보면 독립영화보다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2011), <하이힐>(2014), <마담뺑덕>(2014), <대립군>(2017) 등 상업영화 출연작 비중이 훨씬 높다. 그래서 <소공녀> 출연이 조금은 의외의 선택으로 보였고, 잘 맞을까 우려의 시선도 없지 않았다.

=시나리오는 <대립군> 작업을 시작할 때 받았다. 회사나 누구의 의견과 상관없이 내가 무척 하고 싶었던 작품이어서, 물어보지도 않고 ‘난 무조건 할 거야’, 이런 마음이 컸다. 원래 내 의견을 회사에 적극적으로 이야기하는 스타일이고, 차기작도 독립영화, 단편영화 상관없이 모두 본다. 배우 입장에서는 실험적인 작품, 도전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은 영역에 늘 관심이 많다.

-특히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역할이라 배우로서 욕심도 컸을 것 같다. <소공녀>의 어떤 지점에 매력을 느꼈나.

=작품을 하다보면 역할의 크기를 떠나, 이렇게 매력 있는 캐릭터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 여성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점도 반가운 작품이고, 광화문시네마의 작품에 참여한다는 것도 의미가 컸다. 내가 좀 ‘우정’ 같은 사람들간의 관계를 좋아하는데, 서로서로 응원해주고 존중해주는 이곳 문화가 좋아 보였다. 또 <족구왕> <범죄의 여왕> 같은 광화문시네마의 전작들이 있어서, <소공녀>가 어떤 작품일지 색깔이나 이미지가 그려지더라. 전고운 감독님이 여성감독인 점도 나한테는 즐거운 작업 환경이었다.

-기호품을 소비하기 위해 집을 나오는 미소의 선택. 지금의 현실에서 출발하고 있지만 미소의 결정이 다소 비약적이라는 생각도 든다. 어떻게 캐릭터를 이해하고 접근했나.

=처음에는 나도 미소가 비현실적인 지점이 많아서, 미소의 친구들의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런데 하나하나 미소의 선택에 대해서 질문을 하니 끝이 없더라. 그때부터는 미소 자체를 받아들이려는 노력을 했다. 감독님과 대화를 많이 나누고, 현장에 가서 사람들과 친해지고, 촬영 내내 미소의 옷을 입고 현장으로 출퇴근을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미소와 가까워지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고 나서는 그냥 미소가 된 것 같았다. 미소가 되어야지, 노력해야지 했던 고민들이 어느 순간 사라졌다. 1년이 지난 지금 미소를 본다면 ‘넌 참 멋진 친구구나’ 이런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현실에서는 쉽지 않은 선택을 한 멋진 존재로 보인다.

-생계보다 취향을 택하는 미소는 현재 젊은 세대의 사고방식을 여실히 반영해주는 캐릭터다. 집을 소유하기 위해 모든 걸 감내하고 살았던 기존 세대와는 확연히 다르다.

=지금 이 시기를 정말 잘 파악한 캐릭터이고,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요즘 많이들 쓰는 욜로(현재 자신의 행복을 가장 중시하고 소비하는 태도), 소확행(일상에서의 작지만 진정한 행복을 추구하는 경향)이란 말처럼, 결국 이런 삶의 태도가 중요한 시대다. 나도 스케줄이 없을 때는 사소한 것들로 삶의 충전을 많이 받는 편이고, 이런 것들이 일하는 데 더 큰 힘을 준다.

-본인은 어떤 것들로부터 위안을 받는가.

=매일 마시는 커피가 내겐 정말 중요하다. 친구들과 만나서 여유롭게 수다떨고 산책하는 것도 좋다. 영화관 가서 영화 보는 그 시간이 정말 좋다. 중학생 때부터 영화 상영티켓을 모았는데 스스로도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집착해서 모은다. (웃음) 잘 보관하려고 코팅까지 해둔다.

-집에서 코팅까지 하나.

=이걸 하려고 코팅기를 샀다. 중학생 때 영화산책부였고, 고등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영화를 혼자 보러 다닌다. 개봉하는 영화라면 뭐든 다 본다. 내가 출연한 영화가 개봉할 때도 다른 개봉작들 다 보러 다닌다. (웃음) 좋은 영화를 먼저 찾아보고 싶은 마음도 크고, 영화 보고 혼자 느끼는 지점들도 많다. 같은 시기 개봉작인 <콜 미 바이 유어 네임>과 <쓰리 빌보드>도 빨리 보고 싶다.

-<소공녀>에서 즉흥적인 상황의 연기를 많이 했다고 하는데, 정해진 대본은 어느 정도였나.

=지금까지 연기하면서 사전에 연습하고 리딩을 최대한 많이 하며 집요하게 파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정반대의 현장이었다. 사전 리딩을 정말 많이 했다. 감독님이 대본대로 읽는 느낌을 안 좋아하셔서 즉흥연기를 많이 주문하셨다. 정해진 대사는 있지만 상황 안에서 배우들이 더 자연스러운 걸 찾아가는 거다. 그게 배우들한테도 스탭들한테도 편한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다보니 서로 더 끈끈해지면서 의견도 많이 나오더라.

-미소는 여행자와 노숙인 그 중간 정도의 설정으로 보인다. 겹겹의 옷차림, 큰 트렁크와 짐들을 끌고 다닌다. 이솜이라는 배우가 가진 큰 키와 마른 체형, 특유의 세련됨이 최대한 활용된 결과, 멋지다라는 인상을 준다. 미소가 ‘내몰린’ 게 아니라 ‘선택’을 했다는 점을 더 부각시켜주는 장치다.

=감독님이 미소라는 캐릭터에 최대한 멋스러움을 넣고 싶다고 하시더라. 큰 키나 기존 이미지 같은 것들은 나한테 때로 장점이기도 하고 때로는 단점이기도 한데, 이번엔 내가 가진 그 지점이 역할에 잘 묻어나온 것 같다. 몇몇 작품의 경우, 그런 지점들을 최대한 죽여야 했다. 키가 너무 커서 호흡하는 배우와의 차이가 걸림돌이 된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큰 체형 때문에 미소가 가진 것 없어도 씩씩해 보이는, 우뚝 선 느낌을 줄 수 있었다.

-미소의 스타일링은 어떻게 탄생했나.

=특정 모델이 있진 않았다. 감독님뿐 아니라 분장팀, 의상팀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준비했다. 하얀 머리는 염색을 해도 그렇게 잘 안 나와서 물감으로 칠했다. 특히 옷을 항상 8겹쯤 껴입고 다녔는데, 그 레이어링 스타일이 집나와 떠돌아다니는 미소의 상황을 더 잘 부각시켜준 효과적인 장치였던 것 같다.

-그간 상업영화 현장에서 일해왔는데, 이번은 저예산 독립영화 현장이어서 각오부터 달랐다고 들었다. 매니저 없이 현장에 혼자 나가서 촬영을 하고 현장에 어울렸다. 소속사가 있는 배우로서는 좀 이례적인 행동이었다.

=현장을 즐기고 싶은 마음에 이렇게 해보자 싶었다. 회사는 배우가 혼자 다 하겠다고 하는 걸 안 좋아할 수도 있는데. (웃음) 한번쯤은 경험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하더라. 미소가 혼자 큰 트렁크를 끌고 집을 나가는 것처럼, 촬영 내내 나 혼자 현장에 가고 스케줄도 다 직접 관리했다. 워낙 체력도 좋고 씩씩한 스타일이라 어렵지는 않았다. 어릴 때는 생각지도 못했던 시스템인데, 혼자 나가서 하다보면 현장에 대한 책임감도 달라지지 않을까 생각했다. 사실 선배님들은 혼자 다 관리하고, 현장에도 혼자 오시고 이런 경우가 많다. 해외 배우들도 이런 방식으로 작업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더라.

-주연배우로 연기에 집중하면서 혼자 현장, 스케줄까지 관리한 건데 막상 경험해보니 어떻던가.

=초반에는 포기를 할까 그런 생각을 했다. (웃음) 겨울 촬영은 너무 춥고, 춥다보니 졸리고 몸이 많이 힘들었다. 스탭들도 처음엔 매니저 없이 배우와 일일이 직접 소통하는 것이 좀 부담스러웠다고 하더라. 그래서 이렇게는 안 되겠다 싶었는데, 그것도 이틀쯤 지나니 적응이 되고 편해지더라. 배우 활동 전에 모델 일을 할 때는, 사실 혼자 다 했던 일이다. 그때 경험이 이번에도 큰 도움이 됐다. 무엇보다 내가 직접 감독님, 스탭, 배우들과 소통을 하니 그들과 좀더 끈끈해질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하더라. <소공녀>는 그렇게 해본 건데, 모든 현장을 이렇게 경험하기는 쉽지 않을 거다.

-연기자로서 본격적으로 이솜이라는 이름을 각인시킨 건 <마담뺑덕> 때부터였다. 자신을 이용하고 버린 학규(정우성)에게 복수를 감행하는 여성 덕이로, 극 안에서 두가지 모습을 보여주는 연기였다.

=거의 시작점이자 내겐 정말 큰 도전이 된 작품이었다. 그 작품으로 나 자신을 많이 돌아보게 됐고, 또 인간으로서도 많이 성장했던 것 같다. 내가 잘하고 열심히 하지 않으면 화면에 다 보인다는 것도 결과물을 보면서 알게 된 것 같다. 정말 그 작품 이후에 자기 점검시간이 더 많아졌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영화 현장이 더 좋아졌고, 더 잘하고 싶어졌고, 열심히 하려고 애를 쓰게 된 것 같다.

-도전에 대한 기대가 컸을 텐데, 결과가 기대에 못 미쳐서 아쉬운 마음도 컸을 듯하다. 본인 역시 <마담뺑덕> 이전과 이후의 각오가 달라졌을 것 같다.

=그간 일을 하면서 큰 실망을 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조금은 내려놓는 게 맞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마음이 커진 것도 그때부터였다. 이후 다양한 캐릭터를 하려고 노력했던 것도 나라는 사람, 이솜이라는 배우를 좀 알아갈 수 있게 공부를 해야지 하는 마음이 커졌기 때문이다.

-큰 키와 독특한 마스크 등 모델 활동에 특화된 이미지가 주는 선입견도 연기 초반엔 걸림돌이 되는 요소였다.

=키는 워낙 어릴 때부터 컸다. 중학생 때 패션잡지에 나왔고, 패션모델이 꿈이었다. 10대 후반이 되어서야 연기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다행인 건지 연기를 처음 시작할 때는 그런 거 따지지 않았고, 겁도 없는 편이라 다 도전했다. 그렇게 부딪히면서 배운 것도 많았다. 처음엔 차마 내 연기를 못 보겠더라. 너무 못하더라. 화면에 나온 걸 보면서 내가 제일 놀랐다. 얼굴도 너무 못생겼더라. (웃음) 개성이 너무 있어 보이는 얼굴이라 배역에 잘 융화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반에는 그래서 어떻게 하면 더 예뻐 보일까를 고민하고, 내 개성을 숨기기에 급급했다. 그래서 정작 내가 가진 특징을 활용하려 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내 모습에 감사한다.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하는 데는 장점도 있어 보여 지금은 만족한다.

-마리끌레르영화제에서 올해의 루키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소공녀>가 배우 이솜의 또 다른 면을 보게 해준 중요한 작품이 되었다. 차기작 계획도 궁금하다.

=아직까지는 정해지지 않았고 계속 찾고 있다. 좋은 작품, 좋은 이야기를 하고 싶다. 액션영화같이 안 해본 장르도 도전하고 싶다. 그보다 먼저 <소공녀>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CGV아트하우스상도 받아서 주변에서 좋은 이야기들을 많이 해주시는데 부디 우리 영화가 입소문이 나서 많이들 봐주셨으면 좋겠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