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아이, 토냐> 스케이트는 그녀에게 초능력 같은 거라네
2018-03-29
글 : 김소희 (영화평론가)
<아이, 토냐>의 토냐 다시 쓰기

“나 홀로 해낸 거예요.” 라보나 역의 앨리슨 재니는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 소감 첫마디를 이렇게 뗐다. 처음에는 그 말이 ‘라보나다운’ 소감이라고 생각했지만, 곱씹을수록 토냐(마고 로비)에게 더 적절한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토냐가 보여준 뻔뻔하고 거들먹거리는 태도 때문이 아니라 비싼 의상비를 감당할 수 없자 스스로 피겨 드레스를 지어 입던 토냐의 ‘억척스러움’ 때문이다. 토냐를 나타내는 또 다른 말은 그녀가 버릇처럼 말하던 “그건 내 잘못이 아니에요”이다. 두 문장 속에 내포된 태도는 언뜻 모순돼 보이지만 토냐의 삶에서 자연스럽게 공존한다. 양립 불가능한 것의 양립. 이것이 곧 토냐의 삶이다.

토냐 하딩을 일컬어 흔히 ‘은반 위의 악녀’라고 말한다. 토냐의 모든 피겨 경력이 ‘낸시 케리건 피습사건’이라는 하나의 점으로 수렴된 탓이다. 케리건 vs 토냐의 라이벌 구도에 따른 감정싸움은 영화의 중심 서사가 아닐뿐더러 완벽히 생략된다. 적어도 영화에서의 토냐는 악녀가 아니다. 토냐는 케리건을 친구라고 말하며, 그녀와의 대결 구도는 미디어가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낸시 케리건 피습사건’은 분명 영화에서 중요한 기점이지만, 그 이유는 오직 그로 인해 토냐 하딩의 스케이트 인생이 결단났기 때문이다.

폭력의 세계에서 싸우기

토냐는 싸운다. 이때 싸우는 대상은 낸시 케리건을 비롯한 다른 경쟁자가 아니다. 그녀가 싸우는 상대는 오직 그녀 자신의 운명이다. 그리하여 그녀의 싸움은 어느 정도는 보이지 않는 적과 홀로 싸우는 모양새를 띤다. 토냐의 어린 시절을 재연한 장면 중 두드러진 숏 구성이 있다. 아버지를 따라 토끼사냥을 나선 어린 토냐가 토끼 한 마리를 명중시킨다. 총에 맞아 폴짝 뛰어오르는 토끼의 뒷모습을 보여주던 숏은 스케이트를 타고 뛰어오르는 토냐의 뒷모습 숏으로 급격히 전환된다. 그 때문에 흡사 토냐가 자신이 쏜 총에 맞아 튀어오르는 것처럼 보인다. 이때 토냐가 입고 있던 스케이팅 드레스가 마침 붉은색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앞서 총을 쏜 상황은 복기된다. 가죽이 벗겨진 토끼의 붉은 살갗은 다시 토냐의 붉은옷과 매칭되는 한편, 토끼털로 만든 코트를 걸친 토냐가 등장하면서 토냐는 토끼의 자리를 완벽히 대체한다. 중요한 것은 토냐는 쓰러지는 대신 높이 튀어올랐다는 것이고, 이는 고통을 대하는 토냐의 태도와 일치한다.

어린 시절을 제외하고 그녀가 빙판 위에서 훈련을 받거나 연습하는 장면은 대부분 생략된다. 대신 폭력과 연루된 그녀의 삶이 마치 훈련용 아이스링크처럼 비스듬히 놓인다. 그녀는 다른 무엇도 아닌 자신의 삶을 딛고 빙판 위에 선 것처럼 보인다. 연애 시절 제프(세바스천 스탠)가 토냐에게 했던 가장 달콤한 말을 꼽자면 “스케이트는 너에게 초능력 같은 거네”다. 둘의 만남은 처절하게 실패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토냐가 그에게 빠져든 것이 이해됐다. 제프는 그녀의 삶에 있어서 스케이트가 어떤 의미인지를 단숨에 정확히 짚어낸 것이고, 그런 파트너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토냐가 지닌 초능력의 핵심은 트리플 악셀 기술이다. 토냐는 누구도 시도하기 두려워하는 이 기술을 얼음 위에서 악착같이 시도한다. 토냐가 얼음 위로 뛰어올라 3회전 반을 돌 때, 그것은 히어로들이 변신하기 직전의 회전 동작과 통하는 데가 있다. 이때 회전의 위력은 그녀 자신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녀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는 데 쓰인다. 트리플 악셀에 보란 듯이 성공해 사람들의 적의에 찬 태도를 환호로 바꿔놓는 것이 그녀의 초능력의 쓸모다. 토냐가 연기를 시작하기 직전 잠시 멈춰 있을 때, 카메라와 그녀는 서로 마주보며 눈을 맞춘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 카메라는 아래위로 움직이며 시선을 고정한다. 그녀의 시선에 조응한 카메라의 움직임은 사람들의 시선을 움직이는 것이 그녀가 가진 기술의 본령임을 일깨운다. 그런데 그녀가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최초로 트리플 악셀에 성공한 장면을 보여주는 방식은 아이러니하다. 회전하는 동작을 슬로모션으로 보여주는데, 배경은 예외적으로 깜깜한 상태에서 오직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만 보인다. 이때 들려오는 배경음악이 도리스 데이의 <Dream a Little Dream of Me>인 것은 이것이 한낱 꾼 꿈일지 모른다는 복선이 된다.

그녀가 싸워야 할 대상 중에서도 가장 깐깐한 관객은 심사위원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다. 이때 심사위원은 단순히 누가 잘하고 못하고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미국을 대표할 여성 이미지를 찾는 사람처럼 묘사된다. 심사위원은 “대체 언제 공정한 점수를 줄거냐”는 토냐의 항변에 “의상도 점수에 포함된다”고 지적한다거나, “당신은 미국이 원하는 이미지가 아니에요”라고 충고하듯 말한다. 그러니까 얼음 위에 선 토냐는 미국이라는 나라 전체, 특히 미국이 원하는 여성상과 싸우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어머니 라보나를 통해 전승되는 미국의 보수적 가치와도 투쟁한다. 끊임없이 토냐의 스케이팅 실력만을 지적하는 라보나는 세상의 모순을 개인 탓으로 돌리며 현재의 세상에 안주하게 하는 보수주의적 태도와 닮았다. 토냐가 결국 파이터의 세계에 진입하는 건 폭력이 스케이트를 제외하고 그녀가 아는 유일한 것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스케이트 역시 그녀에겐 하나의 폭력이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토냐와 그녀를 둘러싼 인물들의 실제 인터뷰를 노이즈 가득한 4:3 화면비 속에 재연한다. 화면이 와이드로 펼쳐지면 인터뷰를 토대로 재구성된 일화가 펼쳐지는데, 이것은 매끈하게 정리된 회상이 아니다. 서로 충돌하는 진실에 바탕했기에 인물은 극 속에서 수시로 빠져나와 관객에게 말을 건다. 그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개입은 토냐와 제프의 갈등 국면으로 영화의 초점이 옮겨지자, 라보나가 “이제 내 얘긴 나오지도 않네”라며 화면 밖 목소리로 푸념하는 대목이다. 인물들이 이야기 바깥에서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보며 공동의 이야기를 창조하고 있음이 그 순간 드러난다. 이때 이야기의 목적은 진실을 찾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회의하는 데 있고, 이미지는 쓰이는 동시에 그 속에서 말을 걸어오는 인물들로 인해 끊임없이 지워진다. 이는 미국적인 가치에 저항한 토냐에 조응한 영화 나름의 저항 방식인지도 모른다.

토냐는 얼음처럼 단단한 당대의 미국적인 가치와 싸웠다. 토냐의 말로 기술되는 미국적인 특성은, 사람들은 쉬운 답을 원한다는 것이다. A 아니면 B여야 하고 그외의 답은 인정하지 않는 이분법세계가 영화에서 말하는 미국이다. 진실이 아니면 거짓이어야 하고, 공주가 아니면 쓰레기여야 하는 모진 세계다. B의 운명을 타고난 토냐는 단순히 A의 세계를 욕망한 것이 아니라 B의 세계를 포기하거나 부정하지 않으면서 A의 세계를 뚫고 들어가려 한 점에서 어쩌면 진정한 의미의 안티 히어로다.

결국 링 위에 선 토냐의 결말은 실화라는 것이 놀라울 만큼 절묘하다. “그녀는 미국 그 자체”라는 극중 인물의 논평처럼 미국을 짊어진 토냐는 기존의 미국적인 가치를 파괴하듯 자신을 파괴하기 위해 링 위에 오른다. 그녀가 어퍼컷을 맞아 목이 돌아가며 쓰러지는 순간과 그녀가 트리플 악셀을 시도하며 뛰어오르는 순간이 슬로모션으로 교차된다. 이것은 영광의 순간을 빌려 불운한 현재를 조롱하는 우스꽝스러운 풍자만은 아니다. 은반 위에서 그랬듯 링에서도 회전은 처절한 초능력의 신호다. 다만 이제는 완벽히 착지했을 때가 아니라 완벽히 쓰러졌을 때 환호성이 터진다. 한쪽 얼굴이 일그러진 ‘투페이스’의 토냐가 다시 카메라를 바라보며 말한다. 두 얼굴의 공존, 이게 빌어먹을 진실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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