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아이, 토냐> 속 ‘토냐 하딩’은 누구의 얼굴인가?
2018-04-05
글 : 손희정 (문화평론가)
미국의 어떤 시대정신

1994년, 미국을 뒤흔들어놓는 사건이 터진다. 한 괴한이 피겨스케이팅 올림픽 기대주 낸시 케리건의 무릎을 후려친 것이다. 라이벌이었던 토냐 하딩과 그의 파트너 제프 길롤리가 범인으로 지목된다. 토냐는 자신은 전혀 몰랐으며, 제프와 그의 친구 션이 꾸민 일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제프와 션은 징역형을 살고 토냐는 벌금형과 더불어 미국빙상연맹에서 영구제명당한다.

관찰의 시선에서 동일시의 대상으로

<아이, 토냐>는 가십을 소비하려는 미국 대중의 기이한 열정에 불을 붙였던 낸시 케리건 피습 사건을 스크린 위에 되살린다. 영화에 대한 비판은 즉각적이었다. 당시 케리건 피습을 취재했던 한 언론인은 영화는 일관되게 거짓을 말해온 토냐 하딩의 꿈을 실현해주고 그에게 면죄부를 주는 ‘판타지영화’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영화가 그의 말을 ‘진실’로 만들었거나 옹호하고 있다는 해석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아이, 토냐>는 무엇보다 ‘기억의 주관성’에 대한 작품이고, 그 주관적 기술(記述)의 허약하고 그렇기 때문에 비극적인 기반이 때로는 얼마나 희극적일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직설적이고 반박의 여지가 가득한 토냐 하딩과 제프 길롤리의 실제 인터뷰를 바탕으로 함”이라는 자막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토냐, 제프, 션 그리고 토냐의 어머니 라보나와 코치 다이앤의 인터뷰와 회상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하나의 사건을 둘러싸고도 이들의 말이 서로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영화는 그 불일치를 포착하고 강조한다. 이 작품의 특징으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제4의 벽을 깨는 형식의 파괴’는 이런 주관성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것이다. 예컨대 토냐가 카메라를 바라보면서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거는 장면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데이트 폭력에 대한 토냐와 제프의 진술이 엇갈릴 때다. 토냐는 제프가 폭력을 휘둘렀다고 말하고, 제프는 토냐가 총질을 했다고 주장한다. 회상 속 토냐는 제프를 향해 총을 쏘고 있으면서도 “이런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며 관객에게 어필한다. 진실은 무엇일까?

영화가 제4의 벽을 깨는 것은 관객이 작품 속으로 봉합되어 들어가 그 영화적 시공간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동일시의 메커니즘을 교란하고 관객으로 하여금 카메라의 존재와 스크린이라는 절단면을 인식하게 하기 위한 형식적 장치다. 이를 통해 영화는 스스로가 허구임을 드러내고 관객에게 “거리를 두고 생각하라”고 요청한다. 당신이 보고 있는 이야기가 등장인물들의 주관적 판단 속에서 멋대로 기술되고 있음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진실에 대한 식별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 영화적 세계에는 온갖 ‘대안적 진실’, 즉 각자의 구미에 맞게 만들어진 ‘허구적 진실’들만이 넘쳐나고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대안적 진실의 세계에서 관객이 만나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영화에서 제일 인상 깊은 것은 마고 로비의 얼굴이다. 케리건 피습으로 미국 전체의 조롱의 대상이 된 토냐가 1994년 올림픽에 출전하기 직전, 거울 앞에서 분장을 하고 피날레의 표정을 연습해보는 그 장면에서 마고 로비가 보여주었던 얼굴. 불안과 초조함 그리고 두려움에 떨던 그 얼굴 말이다. 영화는 일관되게 관객으로 하여금 관찰자의 입장에 머무르라고 요청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토냐의 내적 갈등으로 관객을 끌어들인다. 영화가 토냐와의 감정적 거리를 좁혀버리는 것이다. 거울 속 토냐의 얼굴은 누군가의 진술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영화가 내재적으로 산출해낸 이미지다. 때문에 이 순간 마고 로비는 1994년의 토냐를 초과한다. 관찰의 대상이 아니라 동일시의 대상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토냐를 초과한 이 얼굴은, 누구의 얼굴이었을까.

영화의 초반부, 코치 다이앤은 이런 말을 한다. “토냐는 미국 그 자체였죠.” 여기서 ‘미국’은 영화가 명시적으로 드러내는 것처럼 “호불호가 분명한 존재”, “언제나 사랑할 대상과 미워할 대상을 필요로 하는 대중”, “관심을 받아야 비로소 살맛나는 관종”, “빠르게 라이벌을 찾아 적대함으로써 성공을 추구하는 아메리칸드림” 등을 의미할 수 있다. 혹은 이 모든 것을 아우르며 미국의 역사를 추동해온 대중심리 그 자체일 수도 있겠다.

백인 촌뜨기 하층계급은 무엇을 선택했나

토냐는 미국 사회가 급진적인 반문화의 시대를 영위했던 1970년대에 태어나 80년대 신보수주의를 알렸던 레이건 시절에 스케이트 꿈나무로 자라서 90년대 클린턴 시절에 반짝 빛을 보았으나 이내 희대의 악녀가 되어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보수화와 퇴행의 시대인 트럼프 정권에서 이 영화를 통해 다시 등장한다.

토냐가 전시하는 비극적이면서도 희극적인 삶을 만든 8할은 레이건 시대의 미국이었다. “복지를 원하는 자는 거지일 뿐”이라는 매터도어를 통해 ‘작은 정부’를 추구했던 레이건 시절에 제도의 외부로 밀려난 하층계급에서 자란 토냐는 미국 사회가 원하는 ‘건전한 가족의 이미지’를 도저히 살아낼 수 없었다. 양복을 입은 아버지와 케이크를 굽는 어머니, ‘세련된 털코트를 입은’ 딸이라는 ‘건전 가족 이미지’는 미국 중산층의 젠더 규범일 뿐이다. 싱글맘인 토냐의 어머니는 스리잡을 뛰면서 토냐를 스케이터로 키워낸다. 그 시대에 피겨스케이팅은 “속물의 스포츠”(sports of snob)라고 불릴 정도로 “기술보다 이미지”가 중요한 영역이었다. 대체로 낸시 케리건보다 기교에서 뛰어났다고 평가받았던 토냐 하딩이 점수에 있어서 케리건에게 밀렸던 것은 그가 영화에서 스스로를 묘사하는 것처럼 ‘레드넥’(redneck), 즉 시골 촌뜨기 하층계급이었기 때문이었다. 영화는 속물의 시대와 불화하는 토냐의 저항적인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꽤 공을 들인다.

남편 제프는 토냐에게 있어 가장 큰 불행이지만, 동시에 사회가 원하는 ‘건전한 이성애 핵가족 이미지’를 위해서 꼭 필요한 존재이기도 했다. 제프의 폭력으로 몇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토냐가 제프에게 돌아가는 이유 중 하나는 빙상연맹이 ‘가정 내 토냐’를 원했기 때문이다. 영화는 제프의 폭력에도 ‘시대적 이유’를 주는 것을 잊지 않는다. 제프는 자신보다 뛰어나고 사회적으로 잘나가는 토냐를 길들이고 자격지심을 해소하기 위해 폭력을 휘두른다. 여자 위에 군림해야 비로소 남자다울 수 있다는 왜곡된 환상은 여성을 동반자가 아닌 소유물로 여기게 한다. 영화는 이 폭력적인 착각이 ‘하드보디 남성 영웅이 지배했던 레이건 시대의 소산’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제프가 토냐에게 차이고 “마지막 말은 남자가 하기 위해” 길을 나서는 장면의 배경에는 레이건의 얼굴이 그려진 포스터가 어색하게 걸려 있다.

우리는 이 ‘백인 촌뜨기 하층계급’이 2017년에 어떤 선택을 했는지 안다. 트럼프를 국가 지도자로 선출한 것이다. 토냐 하딩 역시 실제로 “미국 사회에는 변화가 필요하고, 나는 트럼프를 지지한다”고 인터뷰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트럼프 시대에 찾아온 레드넥의 항변과 그에 대한 코멘트처럼 보인다. 내가 먹고살기 위해서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정치적 자원으로 삼는 지도자에게 표를 던지는 것에 대해 우리는 얼마든지 이유를 댈 수 있다.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몰락이 그런 선택을 불가피하게 했다고 말이다. 모든 잘못은 “내 손 위의 밥그릇을 빼앗아가는” 인종적 소수자들, 난민들, 동성애자들 혹은 기가 센 여자들 탓일 뿐이다. 토냐가 영화에서 끊임없이 ‘사악한 다른 사람’ 탓을 한다는 것은 중요해 보인다. 그는 심지어 스케이트 슈즈의 끈이 제대로 묶이지 않은 것도 자신의 잘못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적의 무릎을 박살내는 폭력”이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마고 로비가 쓴 ‘토냐 하딩’ 가면의 의미를 조금은 도전적으로 해석해낼 수도 있겠다. 이 불안에 떠는 얼굴은 자신만의 정당성을 가지고 타인에게 폭력을 휘두른 뒤 초조하게 ‘좋은 결과’를 기다리는 미국의 어떤 시대정신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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