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부작 드라마 <나의 아저씨>(김원석 연출, 박해영 극본)는 이제 막 중반으로 들어가는 시점이지만, 그 서사적 틀은 거의 드러나 있다. 논란이 되었던 것은 45살 박동훈(이선균)과 21살 이지안(아이유)이 주인공으로 설정됨으로써 진부한 아저씨-아가씨 로맨스가 다시, 그것도 이 시점에 등장한다는 데 있었다.
‘나의 아저씨’라는 제목이 암시하듯이, 박동훈과 이지안 사이의 관계는 겉으로는 아저씨와 아가씨의 만남과 사랑이라는 클리셰를 의도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둘은 사랑에 빠져 허우적대는 연인이 아니라, 세상의 거친 파도에 내몰려 힘들지만 어떻게든 자신을 지키려 안간힘을 쓰는 처절한 인간의 모습으로 재현된다. 카메라는 이 둘의 삶이 교차하는 쪽을 지속적으로 비추지만, 그 교차로에서 발생하는 것은 달달한 로맨스가 아니라 쓸쓸하고 거친 두 인간 사이에 터가는 애처러움의 감각이다.
이 두 인물을 둘러싼 배경이면서 동시에 두 인물의 전경이기도 한 것은 사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다. 채무, 폭력, 대출, 실직, 파견직, 비정규직, 아르바이트 등 이 드라마의 뿌리와 줄기를 이루는 요소들은 모두 신자유주의가 급진적으로 증폭시킨 자본주의하의 인간 조건이다. 직업의 안정성 여부가 삶의 질 전체를 결정하는 오늘날 한국의 자본주의가 아니라면 이 드라마의 서사는 탄생하거나 진행될 수가 없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는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다. 바로 이곳에서 탄생하는 것이 로맨스의 불가능성이다.
아저씨와 아가씨가 주인공으로 설정되었다는 사실 하나로 드라마가 맹목적인 비판을 받곤 하지만, 사실 진정 놀라운 점은 수많은 나이와 직업을 가진 남녀의 로맨스로 범벅이 된 한국 드라마 시장 속에서 이 드라마에는 로맨스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기습키스’라는 한국식 코드가 등장하지만 장르적 관습과는 어긋나 있다. 지안이 기습키스를 했을 때 동훈이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어린 여자와의 사랑’이 아니라 정규직에서 잘릴 가능성이었고, 지안의 기습키스는 ‘듬직한 아저씨와의 사랑’이 아니라 1천만원의 보상금으로 채무를 변제할 가능성 때문이었던 것이다. 둘의 관계를 작동시키는 힘이 채무, 대출, 뇌물 등과 같은 금융적 요소들이라는 점에서 역시 그 근저에 도사리고 있는 힘은 자본주의 체제라는 가혹한 현실이다.
신자유주의가 만든 로맨스의 불가능성 앞에서 드라마는 두 남녀가 속고, 속이고, 도청하고, 기만하고, 경계하는 관계를 만들어낸다. 자산과 직업의 안정성 여부에 따라 연애와 결혼과 출산과 가족 전체의 불안정성과 불가능성이 달린 한국인의 현실은 바로 이 불가능성 속에서 드러난다. 아저씨와 아가씨? 이 드라마는 이 익숙한 설정을 가져오되 쓰지 않음으로써, 달달한 로맨스로 차가운 현실을 가렸던 기존 드라마를 뛰어넘는 전략을 취한다. 현실로 로맨스를 가려버리는 것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