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당신의 부탁> 임수정 - 배우가 계단을 오를 때
2018-04-18
글 : 김혜리
사진 : 오계옥
김혜리가 만난 사람

<당신의 부탁>에서 임수정이 연기하는 효진은 혹독한 인생의 환절기를 조용히 나고 있다. 결혼에 뜻이 없다가 만난 이혼남(김태우)을 깊이 사랑하여 아내가 되었지만 갑작스런 사고가 남편을 앗아갔다. 효진의 트라우마는 단번에 쓰러뜨리는 대신 스며든다. 친구(이상희)와 보습학원을 운영하며 남들만큼 일상을 감당하고 있지만, 효진은 사실 아무 데도 있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훌쩍 떠나거나 은둔할 만큼 드라마틱한 인간도 아니다(그런 일에는 약간의 자기도취가 필요한 법이다). 망가지진 않았지만 고장난 효진에게 어느 날 예전 시댁 식구가 뻔뻔한 부탁을 들이민다. 남편과 전 부인 사이의 16살 아들 종욱(윤찬영)이 사고무친한 처지가 됐다며 “애는 아무래도 엄마가 키워야 하지 않겠냐”고 들이댄다. 동의해서가 아니라 아무려면 어떠랴 하는 심정으로 데려온 소년도 효진에게 바라는 바가 없다. 그러니까 <당신의 부탁>은 모성이 모두를 구원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종욱은 효진을 신경 쓰게 하고 그래서 마침내 병원을 찾아 갑상선 질환을 발견하게 만들며, 타인에게 줄 도움이 남아 있나 메마른 내면을 뒤지게 만든다. 효진을 비롯해 이 영화 속 제 코가 석자인 사람들은 빠듯한 제 몫을 덜어 조금씩 타인에게 보태며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아”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스릴러 <은밀한 유혹>(2014)과 미스터리 판타지 멜로 <시간이탈자>(2015)와 드라마 <시카고 타자기>(2017)까지 최근 몇년 동안 장르의 코르셋을 입고 분투해온 배우 임수정도 <당신의 부탁>에서 효진과 더불어 ‘회복’하는 것처럼 보인다. “몇년 동안 딜레마가 있었어요. 연기는 열심히 하고 있는데 내가 나인지 모르겠는 혼란이랄까. 그런데 한달 동안 부산에서 <당신의 부탁>을 찍으면서, ‘그래 지금 내가 연기하고 있어’라고 또렷이 느꼈어요.”

‘외유내강’은 한국영화의 여성 캐릭터를 긍정적으로 평할 때 자주 등장하는 사자성어다. 임수정의 많은 캐릭터도 거기 속했다. 극중 남자들은 임수정의 또렷하고 무연한 눈동자 앞에서 반성했지만, 영원한 소녀처럼 가녀린 그 여자들을 구출하고 용서받음으로써 안도했다. 하지만 여성의 강함은 왜 꼭 내면에 보존돼야 할까? <당신의 부탁>의 효진은 겉과 속이 같다. 강함을 숨기지도 약함을 전시하지도 않는다. 그동안 스크린의 임수정을 바라보며, 본인의 가느다란 체구와 동그란 음색을 넘어서는 에너지를 표현하기 위해 또박또박 노력하는 배우라고 여겨온 나는 <당신의 부탁>을 보는 동안 그저 편안했다. 그건 아마 내가 우연히 개인 임수정의 현재를 엿볼 기회를 가진 덕분인지도 모른다. 팟캐스트 <김혜리의 필름클럽>의 동료로 1년 반 가까이 주기적으로 만난 그는 ‘나답게 살기’라는 표현을 자주 꺼냈다. 상투적 다짐처럼 들리는 이 말은 언제나 빠른 실천으로 뒷받침됐다. 동물의 생명권을 염려한 다음 바자회를 열어 길고양이를 도왔고, 완전 채식에 안착하더니 얼어붙은 겨울날 정관 스님의 백암사에서 김장을 하고 돌아왔다. 본인 영화가 출품되지 않은 로테르담국제영화제로 불현듯 여행을 감행해 관람한 영화 티켓 다발을 펼쳐 보였고 아시아 영화인들과 인사를 나누고 도시 곳곳을 걸어다녔다. 로테르담에서 여성배우의 일생을 그린 아네트 베닝의 <필름 스타는 리버풀에서 죽지 않는다>를 본 임수정의 얼굴은 어떤 조명 아래에서보다 환히 빛났다. 세상이 상상하고 사랑하는 임수정을 지키려고 고단한 20대를 보낸 이 배우는, 임수정이 사랑하는 임수정을 찾고 교육하고 나누는 나선형의 계단을 찬찬히 오르는 중이다. 배워서 스스로를 무성하게 키우고, 그 우거진 잎으로 드리운 그늘로 여럿을 안을 궁리를 하는 나무처럼. 삶에 조금씩 능숙해지고 있는 이 배우는 다만 그 삶을 표현할 기회가 충분할까 묻고 있었다.

-<당신의 부탁>의 주인공 효진은 임수정씨 필모그래피에서 최근의 좋은 작품으로 기억하는 <내 아내의 모든 것>(2012)의 연정인과 사상체질이 상극일 법한 캐릭터입니다. 남편을 사고로 잃은 후 삶의 피로가 서서히 누적돼 눈에는 힘이 빠져 있고 팔다리도 축 늘어뜨리고 움직입니다. 옷도 헐렁하게, 중간색만 입더군요.

=효진은 남편과 사별하고 삶에서 재미와 의욕을 찾지 못하는 우울증 상태예요. 그런데 우울을 어떤 증세로 표현할까? 효진은 어디로 걸어가더라도 가고 싶어 가는 게 아닌 걸음걸이고, 매사에 적극적이지 않아요. 공교롭게 영화 촬영 직전까지 드라마 작업을 하느라 저도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쳐 있는 상황이어서 공감하며 힘을 주지 않고 표현했어요.

-효진이 귀가 얇은 것도 자발적 의지가 저하된 상태라서인가요? (웃음)

=남편과 전 부인의 아들을 키우겠다는 엄청난 결정을 대책 없이 내린 것도, 미래를 깊이 생각할 의욕이 없어 저질러버린 면이 있어요. <당신의 부탁> 시나리오를 읽고 가장 고민된 부분이, 과연 관객이 효진의 결정을 납득할까였거든요. 그래서 영화 초반 효진의 일상을 주르르 보여주는 도입부에서 그녀의 공허하고 불건강한 상태가 자연스럽게 전달되도록 신경썼어요.

-JTBC <뉴스룸>의 모토가 한 걸음 더 들어가는 것이라면, 이동은 감독은 전작 <환절기>에서도 그렇고 한 걸음 덜 들어가기가 슬로건인 작가 같아요. (웃음) 극중 인물들도 삶에서 큰 걸 바라지 않고, 연출도 드라마틱한 사건들을 “그새 일어났다치고” 생략해버리잖아요.

=‘6개월 후’ 같은 시간 흐름을 표시하는 자막도 영화에선 빠졌어요. 종욱의 대사인 “근근이 먹고살고 싶다”가 감독님의 모토죠.

-그나저나 <김종욱 찾기>에서는 종욱을 그렇게 찾아 헤매더니 급기야 종욱을 키우네요.

=하하. 썩 좋아하는 남자 이름이 아닌데 신기한 우연이죠. 배우가 같은 이름의 캐릭터를 연기할 가능성도 낮은데 상대역으로 같은 이름을 만나다니! 효진이라는 인물 이름도 시나리오에 마음이 끌린 이유였어요. 배역의 이름도 캐릭터와 배우가 맞아떨어지는지 감을 주거든요. 효진은 어쩐지 거리감이 없고 제가 스며들 수 있을 것 같았어요.

-현실적이고 야무진 느낌의 이름이죠. <당신의 부탁>에서 효진과 어머니(오미연)의 설전은 <레이디 버드>의 그것 못지않게 리얼합니다. 저도 친구들과 “엄마들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을 도와주지도 않을 거면서 왜 되풀이해서 비난하실까?” 한탄하거든요.

=어머니와 대화하다 효진이 버럭 화내는 장면에서 제 모습도 봤어요. 저희 어머니는 젊은 나이에 사랑해서 결혼하고 곧 저를 낳으셨지만 줄곧 행복하신 것만은 아니어서, 극중 효진 어머니처럼 “너는 일찍 결혼하지 마라. 네 일을 오래 해라" 하고 늘 말씀하셨거든요. 그래야지 하면서도, 엄마 당신이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 느낌이 전해지니 슬퍼서 짜증을 내기도 했죠.

-친구 역의 이상희, 종욱의 과거 어머니 김선영 배우와의 장면이 인상적입니다. 이상희 배우는 임신한 배를 받치느라 다리를 벌리고 허리에 손 얹고다니는 품이 천연덕스러웠어요. 어떻게 친해졌는지 신기하지만 그냥 납득이 되는 베스트 프렌드랄까.

=이상희씨, 너무 잘해요. 가짜 배모형을 옷에 넣은 채로 촬영 쉬는 시간에 길거리에 얼마나 편하게 나가는지. (웃음) 신병이 든 종욱 어머니 역을 한 김선영 배우는 하루 내려와서 촬영을 했는데 리허설 때부터 온전히 배우의 힘이 공기를 바꿔놨어요. 점집이라는 공간도 예사롭진 않지만 다른 장면과 완전히 다른 호흡에 저도 빨려들어가 지금까지 효진과 다른 효진으로서 연기를 하고 있더라고요. 김선영 배우가 대사 리듬도 독특하게, 발성도 동시녹음에 잘 잡히지 않을 정도로 작게 하시니 덩달아 효진의 목소리도 작아졌어요. 이래도 괜찮을까, 감독님에게 여쭤봤는데 이게 맞는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죠. 연기뿐 아니라 동선도, 촬영도 그분의 연기에 맞춰 변화하는, 배우의 힘을 본 날이었어요.

-<당신의 부탁>은 어찌 보면 죽은 남편을 닮은 소년의 보호자가 되어 죽은 남편의 영향 속에 살아가는 여성의 이야기지만 한발 물러서서 보면 결혼 없이 아이만 갖고 싶어 하는 일부 여성들의 로망을 충족시키는 이야기 같기도 해요.

=실제로 시사회 마치고 어머니가 셋이었다는 한 50대 남성이, 종욱의 사연이 본인 이야기라고 했어요. 영화와 달리 어머니라는 호칭을 강요받았던 것이 차이라고. 영화와 다른 점이라고. 어느 여성 지인은 내가 낳고 싶진 않지만 아이를 원할 때 이미 아이 있는 남자와 같이 사는 걸 충분히 고려해볼 수 있다고 하셨어요. 그렇게 대화가 이어지더라고요. 저 역시 아이에 대해 고민을 조금씩 해봐야 하는 시점인데, 파트너가 될 남자에게 자식이 있다면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자문해 봤어요. 결론은 그 애에게, 일반적인 부모와 자식의 개념으로 접근하면 도저히 잘될 수 없을 것 같아요. 엄마, 아들, 딸 같은 역할을 붙이지 않고 그저 ‘가족’으로 함께 지내다보면 조금씩 닮아가고 이해하고 존중하게 되지 않을까.

-<김혜리의 필름클럽> 팟캐스트를 함께 운영하다 보니, <당신의 부탁> 크랭크인 당시 기억이 있습니다. 드라마 <시카고 타자기> 시작 무렵에는 오랜만의 드라마이고 장르물이어서인지 상당히 긴장한 분위기였는데 <당신의 부탁>은 “부산 가서 영화 찍고 올게요” 하는 가볍고 편한 표정이었습니다.

=드라마로 3개월 긴 여행을 하고 한달 동안 <당신의 부탁>을 부산에서 찍으며 여독이 싹 풀렸어요. 내가 영화 작업을 정말 사랑한다는 걸 다시 확인했어요. 최근 몇년 동안 선택한 작품들이 의지와 다른 결과를 낳아서- 실패한 거죠- 실망하고 속상하기도 했어요. 나답지 않은 판단을 내린 건 아닌지, 그렇다 해도 그 안에서 더 잘해볼 여지는 없었는지. 그런데 멀리 돌고 돌아서 <당신의 부탁>에서 다시 또렷하게 지금 내가 원하는 연기를 하고 있다고 실감했어요.

-말 나온 김에 어딘가에서 배우 임수정 회고전을 기획하며 임수정이 어떤 배우인지 가늠할 수 있는 세 작품을 골라달라고 하면 대답은요?

=<장화, 홍련>(2003), <싸이보그지만 괜찮아>(2007), 그리고 <행복>(2007)과 <내 아내의 모든 것>을 놓고 고민이 되는데 꼭 택해야 한다면 후자요. <행복>은 저보다 영화 속 인물 은희를 좋아하는 분들이 무척 많은 작품이죠.

딱 10년만 해보자고 결심했어요

-<장화, 홍련> 촬영 당시 우연히 미국판 <링>을 같이 관람한 것이 제가 최초로 임수정 배우를 만난 경험입니다. 유행을 앞선 검정 롱패딩으로 꽁꽁 싸매고 나오셨죠. 좀 주제넘지만 당시 받은 인상은 타인으로부터 호의나 도움을 별로 기대하지 않는달까, 혼자서 알아서 살아온 사람 같다는 것이었어요.

=실제로 그랬을 거예요. 부모님이 맞벌이를 했고 넉넉지 않은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서 배우의 진로를 정했다고 후원을 받은 건 아니에요. 결핍투성이에 가까웠고 내 인생 내가 개척해보자는 의지가 있던 때죠.

-<쎄씨> <키키> 같은 10대 패션지에서 모델로 일하던 신인 시절 임수정씨와 작업한 에디터에게 듣기로는, 어려운 제안을 급히 해도 늘 말없이 와주었던 모델이라고 하더군요. 비슷한 시기 모델이던 김민희, 배두나, 공효진씨 등과 달리, 앞으로 뭘 하고 싶다거나 하는 소망을 거의 내비치지 않았다고 기억했어요. 동료들이나 잡지 에디터와 사귀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모델 일은 고등학생 때 연극을 보고 배우 되겠다고 결심한 이후에 한 거죠?

=<리어왕>이었어요. 내용은 다 이해하지 못했지만, 무대에서 연기하는 배우의 모습과 상황 자체에 매료됐죠. 그리고 배우가 될 기회를 찾다가 패션지 모델 콘테스트에 지원해서 운좋게 1등을 한 결과로 1년 전속이 됐는대 막상 사진 작업은 정해진 대로 수동적으로 하는 일이라서 즐겁지 않았어요. 일이 즐겁지 않으니 친구도 만들지 않았고 회사 다니듯 1년 동안 군말 없이 했어요. 근데 15년 넘게 배우 생활을 하면서도 같이 작업한 배우, 감독님들과 꾸준한 관계를 잘 유지하지는 못해요. 혼자 있어도 별로 힘들지 않고 그로 인해 일을 놓치더라도 억지로 하는 사교가 주는 피로가 더 무거워서일 거예요.

-모델을 그만둔 다음 오디션을 많이 보셨죠. 많이 떨어졌고. 무례한 일을 겪은 적은 없나요?

=못생겼다는 얘기도 들었고 배우가 되는 데에 필요한 끼가 없다, 연기를 못한다는 말도 들었어요. ‘여배우 같은’ 매력이 필요한데 얼굴에 그런 느낌이 없다고 김희선, 이영애 선배님과 비교하면서 지적하는 분도 있었어요. 물론 그런 말을 듣다보면 자존감이 하락하죠. 하지만 그보다는 같이 오디션 본 또래 배우들이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 등으로 속속 데뷔하는 모습을 지켜볼 때가 더 힘들었어요. 하지만 포기하고 싶지 않아 딱 10년만 해보자고 결심했어요. 그런 의연함 덕에 <장화, 홍련> 오디션에서 떨거나 너무 잘하려고 하지 않았고 그것이 수미 역에 적합해 보였나봐요.

-첫 영화 <피아노 치는 대통령>을 오랜만에 다시 보다가 한 장면이 눈에 띄었어요. 임수정씨가 연기한 대통령의 반항적 딸 영희가, 아웃사이더다운 이미지를 위해서인지 농구골대 위에 올라앉아 있는 신인데요. 아무리 살펴봐도 영희가 대체 어떻게 올라갔는지 설명이 안 되는 장소인 거예요. (웃음)

=크레인으로 올려줬죠. 시나리오상으로는 자기만의 공간에 있는 소녀를 보고 관객이 연민을 느껴야 하는데 극장에서는 웃음이 터졌어요. “어떻게 올라갔대? 대통령 딸은 다르긴 다르구나” 하면서. (좌중 폭소) 신인배우니 최선을 다해야 해서 엉덩이 아픈 티도 못 냈어요.

다시 스무살로 돌아가면…

-아까도 가장 중요한 작품 세편 중 하나로 꼽았지만 <장화, 홍련>은 임수정의 커리어에서 결정적이면서도 제일 힘든 작업이었던 모양입니다. 뒷날 인터뷰를 보면.

=감독님과는 대화가 잘 통했는데, 저의 연기적인 기술이 부족했어요. 수미로서 이러저러한 감정을 느끼는데 그것이 내 눈과 입과 몸짓으로 표현이 되지 않을 때, 배우인 내가 감독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을 때 너무 괴로웠어요. 매일 도망가고 싶었죠. 김갑수, 염정아 선배님 모두 경력이 두터웠고 동생 역의 (문)근영이는 바깥에서 막 뛰어놀다가 “슛!” 하면 그 예쁜 눈망울로 또르르 눈물을 떨어뜨렸어요. 모두들 잘해주시는데도 내가 여기 있어도 되는 건지 싶어 혼자서만 따라갈 수 없다는 외로움에 짓눌려 있었죠. 궁극적으로는 그 감정이, 수미의 외로움, 아픔, 원하는데 안 되는 고통을 표현하는 데 도움이 됐지만요. <장화, 홍련>은 다시 제대로 본 적이 없어요. 2003년의 마음과 정신이 아팠던 개인 임수정의 얼굴이 그대로 찍혀 있어서요. 이후로는 배우 임수정으로서 얼굴이 변하고 캐릭터마다 저와 크고 작은 거리가 있는데 2003년의 임수정과 수미는 너무 하나인 거예요. 그래서 보면 마음이 아파요.

-시나리오를 처음 읽을 때 전체를 영상화해서 상상하는 버릇이 있다고 했는데 요즘도 그러시나요?

=여전해요. 굳이 연출의 관점으로 영화를 보려는 게 아니라 글을 읽으면 저절로 극장 좌석에서 스크린을 보듯 장면이 떠올라요.

-혼자서 머릿속 극장으로 본 영화와 완성된 결과물이 가장 달랐던 경우는?

=<은밀한 유혹>이요. 프랑스 소설 <지푸라기 여자>가 원작인데 그 제목으로 갔으면 좋았을걸. 그림도 상상과 달랐고 서스펜스를 끌고 가는 법도 아쉬웠던 게 사실이에요. 가끔은 리메이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조금 복잡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지만 ‘생각하는 남자들의 스타’ 같은 이미지가 있어요. 섹시함을 여성의 최우선 매력으로 치지 않는다고 믿는 남자들이 임수정씨를 좋아하는 예를 많이 봤거든요. 그런데 거꾸로 보면 자긍심 강하고 지적인 여성이되 결국 남자를 이기지는 않는 캐릭터로 자리잡은 건 아닐까 싶어요. 즉, 남성 입장에서는 여자를 대상화하지 않는다고 안심하면서도 궁극적으로 자신의 부족함을 다 포용해주는 소녀와 어머니의 결합이랄까요?

=실제로 제게 있는 면이에요. 완벽하게 남자를 이기려하기보다 대부분 제게 의지할 여지를 줬어요. 그렇지만 특정 이슈나 가치관에 대해 의견이 충돌할 때는 <내 아내의 모든 것>의 연정인이 돼 싸우죠. 그런 모습에 놀라고 실망하는 사람도 있고요. 이젠 연인 사이라도 그런 실망까지는 다독여주진 않을 것 같아요.

-말씀하신 <내 아내의 모든 것>은 언뜻 보면 어이없는 설정이죠. 연정인처럼 매력 있고 유능한 여성이 의견이 강하고 말이 많다는 이유만으로 억지로 이혼해야 할 신경증 환자 내지 일종의 괴물이 되는 구도니까요. 그런데 뒤로 갈수록 남편과 청부 유혹을 하는 카사노바를 놀리는 영화예요. 사실상 정인의 변화는 남자보다 일이 주는 만족과 관련이 있는데, 두 남자는 마치 자기들이 정인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것처럼 계속 바보 같은 의논을 하는 모습이 코미디 포인트예요.

=처음에는 그때까지 제 모습에 전혀 없는 캐릭터라 잘 못할 것 같다고 고백했어요. 임수정 하면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은채를 생각하고 <행복>의 은희를 떠올리며, 순종적이고 보호해줘야 할 것 같은 캐릭터가 많았으니까요. 연정인은 괴팍함과 주체성을 교묘히 왔다갔다해요. 노출이야 뭐 협의하면 부담되지 않았는데, 말이 많아도 너무 많은 거예요. (웃음) 저는 집에 있으면 하루 종일 “어” 소리도 안 낼 때가 많은데. 그런데 연기를 하다 보니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의 영군을 하면서 마음대로 총 쏘고 죽이고 날아다니며 느낀 것과 비슷한 쾌감이 나오더라고요.

-예전에 영화 하나를 할 때마다 본인의 새 얼굴을 발견하게 되고 이후로는 그것을 지울 수 없다고 했는데 <내 아내의 모든 것>이 대표적인 예 아닐까요?

=<내 아내의 모든 것>을 마치고는 정말 제 이야기를 더 솔직하게, 많이, 어느 곳에서나 할 수 있게 됐어요.

-환자복이 제일 잘 어울리는 배우라는 말을 많이 듣지만 극중 스타일이 다양해요. <…ing>와 <각설탕>에서는 짧은 머리에 보이시한 스타일이었고, 세련되기로는 <내 아내의 모든 것> 의상이 최고였어요.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유명한 니트는 지금 어디 있나요?

=제겐 없어요. 의상팀이 가져온 옷이었거든요. <행복>의 몸뻬가 편하긴 참 편했는데. (웃음) <장화, 홍련>의 옷도 참 예뻤죠. 저는 영화 속 의상으로 기억되는 배우 같아요.

-맞아요. 평소 임수정의 스타일은 확 떠오르지 않아요. 공개 행사에서는 하이 웨이스트의 긴 스커트를 즐겨 입던데요.

=롱스커트는 제 취향이기도 해요. 지방시의 오드리 헵번 룩 같은 클래식한 옷을 좋아하는데, 일상에서는 팬츠를 훨씬 자주 입죠. 다리가 밉진 않은데 짧은 스커트는 선호하지 않아요. <내 아내의 모든 것>에서는 민규동 감독님이 위와 아래 중 선택하라고 하셔서(웃음) 하의를 짧게 입는 쪽을 택했죠. 남편 티셔츠 입고 아래는 속옷만 입고 담배 문 채 청소기를 돌리잖아요. 아무래도 그나마 노출했을 때 제가 등쪽을 훅 판다거나 가슴골이 보이게 입는 쪽보단 낫겠죠.

-배우기를 즐기는 사람입니다. 지금까지 독학한 취미를 나열해주실래요? 남들처럼 정해진대로 공부만 했다면 그런 다양한 배움의 욕구가 없었을까요?

=그런데 뭐든지 배우다가 중도에 멈춰요. 그런데 얼마 후 다시 돌아가서 이어 배워요. 우선 기타는 예닐곱곡까지 떼고 멈췄어요. 꼭 연주하고 싶은 특정곡이 있어야 진도가 나가더라고요. 핸드드립 커피도 로스팅만 빼고 원두 감별과 드립 공부는 했어요. 요가는 최근에 다시 시작해서 지금 복근이 당겨요. 영어 레슨도 받았다 쉬었다 하죠. 요리는 꽤 꾸준한 일상이 됐어요. 가구는 지금에 와 디자인을 공부하긴 무리고 인테리어 스타일링에 관심이 있어요. 학창 시절에는 공부가 너무 재미없어서 유학을 꿈꿨는데 형편이 되지 않았어요. 그래도 레이디 버드처럼 떼쓰진 못하고 참았죠.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오디션을 거쳐 연예계로 왔는데, 다시 스무살로 돌아가 전공을 고르라면 정치나 경제, 철학을 공부하고 싶어요. 내가 공부하고 싶은 것이 뭔지 30대 중반이 되어서야 알게 됐어요. 고등학생 때 알았다면 3수, 4수를 해서라도 대학을 갔을 텐데.

-춤은 안 배웠나요? <시카고 타자기>의 클럽 장면도 그렇고 짤막하지만 <내 아내의 모든 것>의 맘보 춤, <전우치>의 무대 안무를 흉내내는 대목을 보면 프로페셔널까지는 아니더라도 춤의 선이 예뻐요.

=어려서부터 관심은 있었죠. 다시 태어나면 무용수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했고. 지금도 발레를 좋아해서 공연 보러 다녀요. 4, 5년 전 몇 개월 동안 성인 발레 레슨을 받기도 했어요. 음악을 이해하고 나름 몸으로 반응하는 감각은 있는 것 같아요. 왜 이렇게 호기심이 많을까요? 돈 벌어야 하는데. (웃음)

-출연한 광고 가운데 한편을 꼽는다면요? 저는 강혜정씨와 같이 찍은 ‘고소미’ 광고가 먼저 생각나는데요.

=7년이나 모델로 일한 SKII 광고를 잊기 힘들어요. 모델로서 책임감 때문에 어디서나 좋은 피부와 컨디션을 유지해야 하는 점이 힘들었지만 지나고 보니 덕분에 성장도 했어요. 하지만 채식을 하고 동물과 환경보호에 관심을 가지면서 찾아온 생활의 변화 가운데 매일 사용하는 화장품도 있었어요. 동물실험을 하지 않고 화학성분이 없는 유기농 제품으로 바꾸면서 양심상 더이상은 광고 모델을 하기 힘들겠다는 판단이 섰어요.

-작업실을 구경할 기회가 있었는데, 공간을 분리해 한쪽은 사적인 용도로, 한쪽은 완전히 사람들과 만나는 용도로 분리한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다양한 사람을 만나는 건 여전히 제게 어렵지만 취미나 추구하는 생활 방식이 맞는 분들과의 유대는 깊어지더라고요. 채식을 계속하다 보니 채식인과의 모임이라거나 다른 장르의 예술가들을 뵙는다거나 하며 속한 몇몇 모임이 있는데 제 공간으로 초대하고 싶었어요. 친교를 위한 친교는 문자 한번 보내기가 힘든데 공통의 구체적인 관심사가 있는 모임은 예외예요.

-<김혜리의 필름클럽> 팟캐스트에 합류하게 된 계기가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 노견 특집의 내레이션을 듣고 제가 보낸 감사 문자였습니다. 동물에 대한 관심도 채식과 함께 시작됐나요?

=복합적으로 왔어요. 저의 개 뚜비가 무지개다리를 건넌 다음 유기동물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채식을 하면서 동물과 자연으로 관심이 확장됐죠. 채식도 역시나, 했다가 망치기를 반복했어요. (웃음) 촬영 가도 밥차가 육류투성이잖아요. <은밀한 유혹> 개봉 무렵에야 완전 채식(비건, vegan) 생활을 했어요. 저는 동물성 단백질 중에서도 유제품과 달걀에 알레르기 반응이 높아서 비건 디저트와 빵 종류부터 시작해 다른 음식으로 넓혀갔죠. 사람도 자연의 일부인데 순리를 거슬러가며 억지로 만든 가공식품이나 화학성분이 포함된 사료를 먹은 가축의 고기를 몸에 흡수하면 나쁘지 않을까요? 채식을 하다보면 본연의 에너지와 자생능력이 회복되는 것 같아요. 몸뿐 아니라 마음도 차분해졌어요. 감정 기복이 줄었고 우울해도 우울감의 깊이가 달라요. 불교에서는 도축 과정에서 동물들이 겪는 고통과 불행도 같이 먹는 거라는 관점의 말씀도 하더군요.

-채식 보급에 도움이 된다면 역할을 하겠다는 말도 했어요.

=채식하는 지인들과 일본 교토, 요가의 본산인 인도네시아 우붓으로 베지 트립도 가봤고, 해외 갈 일이 있으면 비건 레스토랑에 들러봤어요. 보통 채식 하면 샐러드만 떠올리지만, 상당히 수준 높은 음식이 많아요. 먹는 즐거움 없이 신념과 건강만 위해 식사하기는 불가능하잖아요. 채식의 맛과 즐거움을 더 알릴 기회가 있다면 요리 프로그램도 좋고 채식 페스티벌도 좋아요. 채식 요리를 다룬다면 예능 프로그램에도 출연할 수 있고 채식 다큐멘터리를 직접 찍고도 싶어요.

-영화 팟캐스트에 선뜻 동참하셔서 놀랐습니다. 연기에 끼치는 변화도 있을까요?

=자유롭고 주체적으로 콘텐츠를 만드는 팟캐스트에 늘 관심이 있었는데 그나마 제게 익숙한 영화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받아만 주신다면 해보고 싶었어요. 다만 이미 호흡을 맞춘 두분의 색깔에 잘 흡수될 수 있을까 걱정했어요. 영화를 만든다고 많은 영화를 보는 게 아닌데 팟캐스트 덕에 다양한 영화를 꾸준히 보게 됐죠. 다른 배우의 좋은 연기를 보는 것만큼 좋은 연기 수업은 없어요. 영감과 아이디어도 얻고요.

-영화가 책이고 학교인 셈인데 다른 여성배우들의 어떤 점에 매력을 느끼는지 예를 들어주실 수 있어요?

=고현정 선배의 표현력이요. 얼굴의 표현이나 특유의 리듬감을 갖고 불규칙한 높낮이로 노래하듯이 대사를 구사하는 능력은 제게 없는 것이거든요. 저는 톤이 일정하고 억양이 일정하죠. 그래서 고현정 선배가 나오면 유심히 보게 돼요. <여배우는 오늘도>의 연출과 연기도 좋았지만 <리틀 포레스트>의 문소리 선배님 연기도 좋았어요. 딸에게 부모의 의무를 할 만큼 한 다음 당당히 가출하는 엄마가 문소리 선배라서 납득이 됐어요. 그렇게 떠나버린 엄마가 밉지도, 이상하지도 않았어요. 시종일관 딸 앞에서 유머와 뻔뻔함이 있는 것도 좋았고요. 저도 남들과 다른 삶을 선택해서 사는 인물을 낯설지 않게 관객에게 납득시키는 힘을 가진 배우가 되고 싶어요. 나이가 무색하게 영화 속에서 언제나 여성으로서 매력적인 동시에 차갑고 지적인 이자벨 위페르도 좋아해요. 섹시하고 엉뚱하고 귀엽고. 저도 쉰, 예순이 되어도 여성으로서 매력 있기를 바라요.

-우연히도 고현정씨가 지난주 표지 모델이었는데 이런 질문을 하시더군요. 여성배우들이 저예산 독립영화에 많이 참여하는데, 저예산으로 여성 중심의 영화를 찍었던 감독들이 수십억원 넘는 예산을 확보한 주류영화를 연출할 기회를 가져도 과연 그럴까?

=아쉽긴 해요. 기회와 시장 자체가 다른 것 같아요. 남성배우들은 주류영화에서도 다양한 캐릭터가 많이 주어지다보니, 독립영화를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해도, 굳이 독립영화에 출연할 필요가 없는 듯해요. 물론 감독과의 인연 등으로 참여하기도 하지만.

고현정, 문소리, 이자벨 위페르…

-페미니스트 비평에서뿐만 아니라 대중문화가 여성을 어떻게 재현하고 이야기를 만드는가에 대한 보편적 인식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요즘 들어 과거 출연작을 보면서 저건 아니었다 싶은 장면도 있을 텐데요.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유명한 대사인데 “죽을래? 나랑 밥 먹을래?” 같은 말도 당시엔 폭력성보다 “나 이렇게 너를 사랑한다”는 뜻으로 통했지만 지금은 불편하죠. 나이 차가 많이 나지 않는데도 끝까지 은채가 ‘아저씨’라고 부르는 설정도, 성숙한 여성이 아니라 어린 소녀로 위치지워 로맨스를 만든 것이니까 논란의 여지가 있고요. 이제는 시나리오 읽으면서 눈에 띄어요. 왜 이 남자가 여성에 대해 이런 말을 할까, 여자가 스스로 왜 이런 말을 할까 의아하고, 때론 아직도 이런 걸 쓰다니 이 작업은 같이하기 힘들겠다 생각할 때도 있어요. 안그래도 할 작품이 없는데 그나마 더 줄어들고 있어요! (웃음)

-누구였는지 기억이 애매한데 할리우드 여성배우가 인터뷰에서 “주연급 남자배우들이 여성의 이야기가 더 많이 스크린에 나와야 한다고 립서비스만 하지 말고, 여성주인공을 서포트하는 배역을 적극적으로 맡아야 변화가 온다”고 지적한 적이 있어요.

=실제로 제작사의 고충을 들은 적이 있어요. <은밀한 유혹>이 여성 중심 이야기이고 남성 캐릭터가 후반에 악역이 된다는 점을 남성배우들이 꺼린다고. 남자배우들은 생각과 마음이 따로 움직이는구나 싶었죠. 이성으로는 다양성을 위해 여성 중심 영화가 필요하다면서 막상 자신에게 제안이 들어오면 받아들이지 못하는가봐요. 한두분이 시작하고 그것이 괜찮음을 보여주면 바뀔 수 있을 텐데.

-얼핏 드는 생각으로는 일급 남성배우들이 통상 개런티를 고집한다면 하겠다고 해도 캐스팅할 수 없겠네요.

=그렇죠. 여성배우들은 작품의 여건에 맞춰 상당히 유연하게 보수를 조정하는데, 남자배우들은 좀 다를 수도 있어요. 그런데 이것은 우리 사회가 남성 중심 사회이다보니 남자들의 의식 속에서는 본인이 항상 중심인 구도가 익숙한 건지도 몰라요.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앞으로는 작품을 선택할 때 지금까지와 다른 기준도 작용할 것 같네요.

=음, 지금까지는 장면이나 캐릭터의 해석에 대해 상대역이나 감독의 의견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아니라고 생각할 때에도 어느정도 맞춰가기도 했어요. 제 캐릭터가 소모되더라도 남성배우에게 맞춰주는 부분도 있었고 남성의 로망으로서 기대되는 바를 받아들이기도 했어요. 그런데 이제는 타협이 힘들어졌어요. 이를테면, 지금이라면 <내 아내의 모든 것>에서 정인이 반성한 남편에게 돌아가는 장면이 없으면 좋겠다고 더 적극 주장할 거예요. 넓은 의미에서 작품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이 일치하는 분들과 대등한 관계에서 존중하며 일하고 싶어요. 스탭, 여성배우에 대한 매너도 고려 대상일 수 있고 가령 제 영화에 동물이 출연한다면 어떻게 위해로부터 보호할지에 대한 보장을 제 계약조건에 넣을 것 같아요. 안 그래도 할 작품이 없는데 이렇게 또 줄어들고! (좌중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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