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이광국 감독은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다 속담 하나를 듣게 된다. ‘여름(오뉴월) 손님은 호랑이보다 무섭다.’ 그리고 그 말이 영화의 제목이 될 수도 있겠다는 걸, 하나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다는 걸 직감한다. <로맨스 조>(2011), <꿈보다 해몽>(2014)을 통해 꿈과 현실, 이야기 속의 이야기를 비선형적으로 직조했던 이광국 감독이 세 번째 영화 <호랑이보다 무서운 겨울손님>에선 이전과 다른 시도들을 보여준다. 서사 구조는 단순해졌고, 이야기 매개자로서 동원되던 캐릭터는 행위자로서의 역할이 중시된다. <호랑이보다 무서운 겨울손님>은 여자친구 집에서 쫓겨난 경유(이진욱)가 겨울의 거리를 떠돌다 소설가로 등단한 옛 여자친구 유정(고현정)을 만나는 이야기다. 경유와 유정을 경유해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이었는지 이광국 감독에게 들었다.
-물론 이전에도 좋은 배우들과 작업을 했지만 <호랑이보다 무서운 겨울손님>의 경우 배우의 이름이 주는 무게감이 전보다 큰 작품이다.
=그렇다고 해서 전작과 다를 건 없다. 다만 고현정 배우나 이진욱 배우나 오랜 시간 언젠가 한번 같이 작업해보고 싶었던 분들이라 그런 점에서 특별한 마음은 드는 것 같다. 이번 작품이 좀더 많은 관객을 만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안 했다면 거짓말일테고.
-<호랑이보다 무서운 겨울손님>은 제목을 먼저 떠올린 다음 이야기를 만든 경우다. ‘손님’의 모티브가 어떻게 거리를 떠도는 남자의 이야기로 뻗어가게 됐나.
=제목을 지어놓고 나니까 우리는 어쩌면 서로에게 손님일 수밖에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면서 손님이란 모티브가 생겨났다. 그게 바로 떠도는 남자의 이미지로 이어진 것은 아닌데, 내가 평소에 많이 떠돌긴 한다. 영화를 찍고 있지 않을 때, 일이 없을 때 무작정 집을 나와 ‘오늘은 어딜 가지’ 하며 길을 떠돌던 시절이 길게 있었다. 그때의 기분 같은 게 남아 있어서, 그 시절의 인상이 이번 이야기를 쓸 때 정처없이 떠도는 나그네의 이미지로 이어졌던 것 같다. 지금도 할 일이 없으면 거리를 떠돌아다니는데, 그래서인지 길에서 우연히 사람들을 잘 만난다. (웃음)
-경유는 그토록 사랑하던 소설을 포기한 남자고 유정은 소설 창작에 전전긍긍 매달리며 괴로워하는 여자다. 창작자라는 점에서, 경유와 유정 모두에게 감독님의 모습이 일정 부분 반영됐을 것 같다.
=두 인물이 한 인물처럼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꿈을 포기한 사람이나 꿈을 이룬 사람이나, 나이를 좀 먹고 보니까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더라. 이래도 힘들고 저래도 힘들고, 힘든 건 똑같으니까. 경유가 좋아하는 소설로 <노인과 바다>를 영화에 담았는데, 우리는 애를 쓰며 살아가지만 결국엔 빈손으로 돌아간다. 그렇다고 대충대충 살자는 건 아니지만 그런 삶이 어딘지 쓸쓸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더라. 결국엔 빈손일 텐데, 그럼 어떤 게 나은 거지? 그렇게 내가 가진 고민들을 두 캐릭터에 적당히 나눠 반영했다.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의 고민들, 힘겹게 영화를 만들고 나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막막해지는 상황들 말이다.
-<로맨스 조>를 만들고 나서 “무겁고 진지한 소재도 명랑한 톤으로 만들고 싶다”는 말을 한 적 있는데, <호랑이보다 무서운 겨울손님>은 그리 명랑한 영화는 아니다.
=명랑하다고 볼 수 없는 영화다. (웃음) 여전히 밝은 톤, 명랑한 톤으로 무언가를 만들고 싶은 욕망은 있는데, 이번 이야기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의식적으로 분위기를 끌어올려야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경유가 사람들을 만나고 그 속에서 흘러가는 과정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비겁하고 무능력했던 경유가 영화 마지막 즈음에 이르면 낯선 여자의 목숨을 구한다. 여자친구, 전 여자친구, 낯선 여자를 만나는 과정에서 경유는 자신의 비겁함을 응시하고 자신도 모르는 새 조금 성장한다.
=누가 봐도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한 남자가 어느 날 누군가의 생명을 구하게 된다면, 설령 그것이 자신이 의도한 행동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가 사회적으로 무능력한 사람이기만 한 건 아니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경유가 누군가에겐 중요한 사람일 수도 있지 않을까, 혹은 누군가에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이면 좋겠다는 내 바람과 희망이 반영된 결과다.
-전작들에선 흥미로운 이야기 구조를 보여주었는데 이번엔 영화가 심플해졌다.
=내 영화에서 구조적 재미를 기대하신 분들은 ‘갑자기 왜 이런 영화를 만들었지?’ 하는 반응을 보이기도 하더라. 여전히 구조에는 관심이 많은데 이번엔 처음부터 심플하게 가고 싶었다. 영화적 취향이나 관심이 변해서라기보다 이런 이야기에는 이런 틀이 맞을 것 같았다. 촬영에 있어서도 핸드헬드로 리듬을 만드는 게 아니라 고정 숏들로 영화를 채우면 어떨까 싶었고.
-이야기 구조가 간결해지니 캐릭터의 감정, 배우들의 연기에 더 집중하게 되더라.
=현장에서 특별히 연기 디렉팅에 더 집중한 건 아니다. 리허설 단계에서 이미 배우들은 시나리오에 근접한 연기를 보여줬다. 경유 캐릭터의 경우 대사도 별로 없고 감정 표현도 많지 않아서 이걸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이 많았는데, 이진욱 배우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경유의 감정을 충실히 표현하는 연기를 너무도 잘해줬다. 고현정 배우는 시나리오를 본 사람들 중 가장 내 생각과 근접한 해석을 들려줬기 때문에 처음부터 잘 통했다. 시나리오에는 표시되지 않은 디테일한 몸짓, 표정, 아이디어들이 현장에서 추가됐는데, 그러면서 유정의 캐릭터가 풍성해졌다. 불규칙한 리듬으로 예측 불허의 행동이나 표정을 보여주는 고현정 배우의 연기 덕에, 유정은 시나리오상의 분량보다 더 큰 존재감을 가지게 됐다.
-홍상수 감독의 오랜 파트너인 김형구 촬영감독이 촬영을 맡았다. 그와는 첫 작업이다.
=첫 영화를 만들 때부터 함께 작업하고 싶은 분이었다. 예전부터 존경하는 촬영감독님이고, 그분이 보여주는 여백이 많지만 무언가 요동치는 것 같은 숏들을 좋아한다. 이번에도 그런 숏들을 담고 싶었다. 기본적으로 촬영은 전적으로 김형구 촬영감독님에게 맡겼다. 주로 시나리오 얘기만 나눴던 것 같다. 덕분에 콘티나 미술에 대한 걱정이 전작에 비해 덜했다.
-경유가 끝내 버리지 못한 단 한권의 소설 <노인과 바다>처럼 감독님에게도 그런 한편의 영화가 있나.
=한편은 도저히 못 고르겠다. (웃음) 그저 그때그때 위안을 주고 힘을 주는 좋은 영화들이 있는 것 같다. 좋은 영화들을 만나면 의지가 된다. 영화를 만들 때나 영화를 준비할 때나. 최근에 봤던 영화 중에는 마틴 맥도나 감독의 <쓰리 빌보드>가 좋았다. 영화는 이렇게 만들어야 되는데, 이런 영화가 많아졌음 좋겠다고 생각한 영화다.
-차기작 계획은 어떻게 되나.
=온전히 한 여자가 주도적으로 끌고 가는 이야기를 생각하고 있다. 올해 안에 시나리오를 쓰고 내년에 촬영하는 게 목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