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크시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 / 출연 그라지나 자폴로스카, 올라프 루바젠코 / 제작연도 1988년
나의 고향은 충청남도 태안이다. 꼬꼬마 시절 내가 처음 접했던 영화들은 방학 때마다 마을회관에서 무료로 상영해주던 <영구와 땡칠이> 시리즈가 전부였다. 친구들과 일주일에 한번 정도 모여 대여점에서 빌린 비디오를 보곤 했는데 주로 홍콩영화들이었다. 강시들이 나오는 호러 코미디물과 <호소자> 시리즈, 그외엔 <WWF 레슬마니아> 시리즈를 즐겨봤었다. 제대로 된 극장에서 처음 본 영화는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서울 이모님 댁에 놀러갔다가 우연히 보게 된 팀 버튼 감독의 <팀 버튼의 크리스마스 악몽>이었다. 그러나 당시엔 아무 생각 없이 봐왔던 영화들과 너무 다른 생경한 느낌에 큰 인상을 받진 못했었다. 영화 일로 먹고살게 된 지금, 내 인생의 영화는 과연 어떤 작품이었을까를 떠올려보니 성장기에 봤던 수많은 영화들 중 내가 영화 일을 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된 작품,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을 소개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너무나 유명하지만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면, 이웃집 연상의 여인 마그다(그라지나 자폴로스카)를 매일 훔쳐보다 사랑에 빠진 우체국 직원 도메크(올라프 루바젠코)는 그녀를 갈구한다. 하지만 마그다는 그의 순수한 사랑 또한 본질은 결국 육체적 쾌락일 뿐이라고 치부하고, 이에 상처받은 도메크는 자살을 시도한다.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마그다는 자살미수로 병원에 있다 집으로 돌아온 도메크를 찾아갔다가 그가 자신을 지켜보던 망원경을 통해 도메크가 자신의 어떤 모습을 보아왔는지 알게 되고 비로소 그의 진정한 사랑을 깨닫게 된다.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어머니께서는 성당 성물 판매소에서 주일마다 봉사를 하셨는데, 그곳은 천주교의 교리나 성서에 관한 비디오테이프들도 대여해주고 있었다. 그때 눈에 띄었던 비디오가 바로 크시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십계’ 연작이었고, 한창 성에 눈뜰 무렵이었던 탓에 그 중 6편인 <간음하지 말라>를 제일 먼저 집어들게 되었다. 표지와 줄거리가 가장 야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십계명을 교육하는 교리에 관련된 교육적인 영화라 생각하셨겠지만, 내 의도는 그렇게 불순하기 짝이 없었다. 책상 서랍 속에 숨겨놓고 집에 혼자 있게 될 때마다 몇번이고 돌려봤었다. 실상 기대하던 그런 영화가 아니었음을 알게 된 이후에도 계속 비밀스럽게 몰래 보았다. 볼 때마다 심장이 뛰었다. 주인공처럼 망원경을 통해 내가 그녀를 훔쳐보는 느낌이었고, 도메크의 대사 한마디, 표정 하나에도 몰입했었다. 건방지게도 그 영화가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고 생각한 순간 어른이 된 기분이 들었고 처음으로 영화를 만든 사람이 궁금해졌다. 어떤 면에선 내게 진정한 의미의 ‘첫 영화’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뒤 어떤 열정 같은 것이 끓어오르며 연작의 남은 9편을 모두 빌려보게 됐고, 친구들과 자주 가서 파르페를 시켜먹던 동네 커피숍 구석에 걸려 있던 익숙한 영화 포스터가 같은 감독의 다른 영화임도 알게 됐다. 그리고 나의 꿈은 영화감독이 되었다.
박정훈 촬영감독. <설행_눈길을 걷다> <악녀> 등을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