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차이밍량 / 출연 양귀매, 이강생 / 제작연도 1998년
스물넷, 대학을 자퇴하고 도서관으로 출근했다. 딱히 어떤 근무를 한 건 아니고 매일 아침 7시부터 오후 6시까지, 대구 남구도서관 3층 여자 열람실 21번, 늘 같은 자리에 앉아 책을 읽었다. 자료실에서 온갖 분야의 책을 골라와 뒤적거리다 대부분의 시간을 졸았다고 하는 게 사실은 정확한 표현이겠다. 집에 있기는 미안하고 아르바이트는 하기 싫은 시절, 도서관은 나의 백수 라이프를 그럴싸하게 포장해주는 공간이었다.
엄마가 싸준 점심을 먹고 느그적느그적 산책을 하던 나는 극장에서 상시상영하는 영화 프로그램에까지 눈을 돌리게 됐다. 그 시절 그 도서관에서 접한 영화감독들의 이름을 말하자면 허우샤오시엔, 에드워드 양, 에릭 쿠 등이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차이밍량. 이쯤되면 도서관 상영 영화 프로그램을 짜는 직원이 어떤 사람인지 무척 궁금할 터인데, 안타깝게도 당시 나는 영화의 ‘영’자도 관심이 없는 백수였던 터라 지금과 같이 본능적으로 인터뷰를 하고 싶다든지 만나서 커피 한잔하고 싶다는 마음 따위는 들지 않았다. 그저 평소와 다름없이 자판기 커피를 입에 물고 <구멍>을 보러갔을 뿐이고, 거기서 차이밍량을 처음 만났다. 이제는 나의 ‘최애’ 감독인 차이밍량을 이토록 무지한 상태에서 영접하다니. 운명이란 참으로 무뚝뚝한 모습을 하고 있구나 싶다.
나는 혼자 관람석에 앉아 있었다. 어느덧 영화가 시작되었고 때마침 소나기가 쏟아져 비가 천장을 투둑투둑 때리기 시작했다. 영화를 본 이들은 알겠지만 이 영화는 비가 내리고 전염병이 도는 축축한 어느 시기에 한쌍의 바퀴벌레가 겨우 짝을 만나듯 낯선 두 남녀가 힘겹게 만나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다.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내 옷이 젖은 것 같았고, 앉은 의자가 찝찝했고, 먹고 있는 믹스커피가 오염된 하숫물 같았다. 영화는 축축했고, 소나기가 스며든 상영관 시멘트 벽에서 나는 냄새는 시큼했다. 그날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영화를 ‘체험’했다.
그날 이후 차이밍량의 거의 모든 영화를 찾아봤다. 그리고 그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 무엇이 그토록 나를 사로잡았던 것일까. 말이 없는 인물들과 포토제닉한 미장센, 특이한 유머 코드. 모두 좋지만 생각해보면 나는 차이밍량 영화에서 인물들이 무언가를 먹는 장면을 가장 좋아하는 것 같다. 텅 빈 마음을 음식으로 채우는 걸 나 역시 알고 있어서일까. <구멍>에서도 엉망진창이 된 집 거실에서 여주인공은 홀로 호로록호로록 컵라면을 먹는다. 습기 때문에 떨어져나간 눅눅한 벽지를 손으러 쩌억 쩌억 다시 붙이며 친구와 남자 얘기를 하는 여주인공은 전염병 속에서도 사랑을 이야기한다. 그녀도 나도 그 시절 사랑이 필요했나보다.
그의 영화 안에서 나를 본다. 거울을 보듯, 가끔 내 존재가 희미할 때 그의 영화를 꺼내본다. 그래서 차이밍량의 영화는 나에게 관람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구멍>에서 남자가 여자를 사랑으로 구원하듯 그의 영화는 내 삶이 호흡하는 법을 잊고 불규칙한 길로 들어설 때 언제나 나를 구원해낸다. 그 힘이 뭐냐고? 바로 사랑이다. 차이밍량 영화 속 인물들은 사랑을 흘리며 사랑을 찾아 헤맨다. 자신이 무엇을 흘린지도 모른 채 구멍난 가슴을 꾸역꾸역 음식으로, 공허한 섹스로 채운다. 그러나 채워지지 않는 그 무엇을 차이밍량은 끝내 사랑으로 구원한다. 그의 영화를 보면 차이밍량이 외로운 사람을 사랑할 것만 같다.
입에 단내가 나도록 혼자인 시기를 보냈던 도서관 생활 중 나는 그의 사랑을 받은, 선택받은 자였다.
유지영 영화감독.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연출을 전공했고, 장편 데뷔작 <수성못>(2017)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