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렛 더 선샤인 인>(2017)은 여러모로 클레르 드니의 전작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작품이다. 일단 로맨틱 코미디를 연상케 하는 제목부터 그렇다. 구체적이기보다는 추상적이고, 관습적인 도덕률보다는 선악의 모호한 경계를 선호하고, 언어를 통한 이성적 설명보다 육체 위에 드러난 직접적인 감각을 향유하도록 했던 그녀의 작품 세계에 느닷없는 ‘햇살’이라니. 당혹스러울 지경이다. <인디와이어>의 데이비드 얼리치는 이 작품을 두고, 마치 클레르 드니가 낸시 마이어스(<인턴> <로맨틱 홀리데이> 연출자)의 아이디어를 가지고 만든 영화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물론 로맨틱 코미디의 통상적인 장르 규칙을 완전히 무시한 버전으로. 이 영화의 장르를 굳이 구분하자면 낸시 마이어스의 전공이라 할 수 있는 로맨스물이겠지만 클레르 드니의 필터를 거치면 로맨스의 달콤한 캐러멜 코팅은 산산조각이 난다. 날것 그대로의 연애 행각이 눈앞에 펼쳐진다. 엇갈린 욕망과 상대를 향한 날선 코멘트가 있고, 폐부를 찌르는 날카로운 유머가 있다. 스크린을 위해 제조된 가공된 사랑 대신 복작대는 길 위를 걷고, 시끄러운 카페에서 수작을 걸며, 낡은 소파와 침대 위를 뒹구는 실재의 사랑이 있다. 그리고 찰나의 교감이 지나간 자리에는 억겁의 소외감이 공기처럼 들어와 앉는다.
사랑의 여러 얼굴
영화 서두의 이자벨(줄리엣 비노쉬)과 뱅상(자비에 보부아)의 섹스 신은 이 작품의 시선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카메라는 충만한 표정으로 누워 있는 이자벨을 내려다보며 시작된다. 곧 그녀의 몸 위로 노회한 뱅상의 육체가 출렁거리며 올라온다. 그는 조급하게 그녀를 만족시키기 위해 낑낑대기 시작한다. 이자벨은 “웃으면서 해. 나는 충분히 좋아”라고 말하지만 그녀를 만족시키겠다는 뱅상의 욕망은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 그의 몸짓이 바빠질수록 이자벨의 충만했던 표정이 점차 얼굴에서 자취를 감춘다. 뱅상의 거구가 그녀의 육체를 짓누르며 숨막히게 한다. 카메라는 이자벨의 머리맡에 밀착하고, 헉헉대는 뱅상의 몸에 깔려 쾌락은커녕 질식할 것 같은 상태가 된 이자벨의 코끝을 바라본다. 로맨틱한 환상으로 포장되지 않은 섹스의 물질성이 관객 앞에 당도한다. 이것은 이 영화의 선언과도 같다. 주류영화에서는 낯선, 여성의 시선에서 바라본 건조한 섹스 신은 이 영화가 앞으로 탐구할 ‘사랑’의 다양한 얼굴이 어떻게 펼쳐질 것인지를 예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랑의 얼굴은 이자벨 역을 맡은 줄리엣 비노쉬의 얼굴이기도 하다. 그녀 얼굴은 20대에도 중년의 미소를 품고 있었고, 중년이 된 지금도 소녀의 눈빛으로 반짝거린다. 이자벨을 스쳐간 8명의 남성을 마주보는 줄리엣 비노쉬의 얼굴은 이 영화의 얼굴이며, 그녀의 숨결이 이 영화의 호흡이다. 이 영화에서 그녀의 말보다 더 신뢰할 수 있는 것은 그녀의 얼굴이다. 이 영화는 건조하고 주름이 팬 중년의 얼굴 같은 사랑을 보여주지만 안정적이고 중후하리라는 관습적 기대를 충족시키는 데 전혀 관심이 없다. 그렇다고 더이상 젊지 않은 육체가 품은 욕망에 대한 부끄러움도 없다.
이자벨에게 ‘사랑’은 도통 쉽지 않다. 남자들은 끊임없이 다가오지만 그들의 의도와 그녀의 요구는 늘 엇갈리기만 한다. 은행가인 뱅상은 화가인 이자벨의 아비투스를 욕망한다. 그는 예술가로서 그녀의 예술적 능력과 문화적 배경을 찬미하지만, 그외의 것들에 대해서는 지독하게 무례하다. 매끈한 연극배우는 관계에 뒤따르는 그 어떤 책임도 원치 않는다. 그 지점을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그와의 대화는 이자벨을 지치게 한다. 전남편 프랑수아는 편하지만 둘 사이의 역사 때문에 관계는 쉽게 피로해진다. 이자벨의 예술성을 이해하는 남성들의 지질함 대신 단백함을 가진 실뱅과의 관계는 친구, 문화, 지식, 그 어떤 것도 공유할 수 없어 공허하다. 갤러리 주인인 파브리스는 변죽만 올릴 뿐 정공법을 쓰지 않고, 다정한 마크는 정중하게 거리를 요구한다. 이자벨에게는 모든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기 위해서 열리는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그 누구보다도 사랑이 넘치는 삶이지만 그녀는 결코 사랑하지 못하게 될까봐 늘 조바심이 난다. 하지만 이들은 왜 사랑이 아니라는 말인가? 사랑이란 결국 이 수많은 현실적 요구와 육체적 욕망이 벌이는 순간의 화학작용이자 그것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철저한 계산이자 불가해한 선택이 아니던가.
로맨스의 공식 밖의 진짜 사랑
클레르 드니의 어떤 영화들보다 수다스러운 이 작품에서 대사는 ‘말’(言語)의 무용(無用)함을 보여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 이자벨은 자신에게 다가온 수많은 남자들과 대화를 나눈다. 그러나 대화는 상대를 이해하고 서로를 연결해주는 끈이 되어주지 못하고, 겉돌고 모순되고 상처를 주고 그 상처를 다시 다른 이에게 전이하는 역할밖에 하지 못한다. 클레르 드니는 화면을 가득 채우고 흘러넘치는 대사들을 통해 언어에 대한 불신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인식은 이자벨이 관계에 지쳐 갤러리 지인들과 떠난 여행지에서 폭발한다. 부르주아 예술 애호가들은 자연을 보며 경탄하고, 표현하고, 자연의 호젓함을 소유할 수 있는 자신의 부유함을, 게다가 친구들에게까지 베풀 수 있는 자신의 아량을 끊임없이 떠들어댄다. 심지어 눈앞에 펼쳐진 ‘텅 빈 풍경’에 호들갑을 떨며 풍경에 대한 미학적 분석과 현학적인 목소리로 비어 있는 공간을 쉴 틈 없이 채워버린다. 결국 이자벨은 견디지 못하고 폭발한다. “다가져, 다. 땅도, 하늘도 산도 몽땅. 도서관도 책들도.” 그 순간 그녀의 예민함은 통쾌할 지경이다. 하지만 통쾌함은 이내 걱정을 부른다. 그녀의 섬세한 영혼과 교섭할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은 더 희박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자벨이 마크에게 거부당하고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은 점술가의 집이다. 점술가의 화려한 언변과 위로가 끝도 없이 이어지고, 이자벨은 자신을 알지 못하는 그와의 대화에서 가장 큰 위안을 받는다. 이자벨의 얼굴이 처음으로 희망의 광채로 빛난다. 제라르 드파르디외가 점술가로 등장하는 이 마지막 시퀀스는 엉뚱하게도 클레르 드니의 <아름다운 직업>(Beau Travail, 1999)의 엔딩 신을 떠오르게 만든다. 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드니 라방이 타국의 나이트클럽에서 춤- 정제된 춤이라기보다 격렬한 몸짓에 가까운-을 추던 모습이 <렛 더 선샤인 인>의 제라르 드파르디외의 현란한 말솜씨와 완벽하게 대극점을 이루기 때문이다. 드니 라방의 춤이 말로 전하지 못했던 그의 내적 욕망을 분출하는 간절하고 진실된 것처럼 보였다면 제라르 드파르디외의 말은 위안을 주지만 진실이 결여된 것처럼 들린다. 이 장면 직전에 배치된 점술가와 여인의 이별 시퀀스로 인해 우리는 그가 이자벨과 다를 바 없이 사랑에 절망하고 낙심한 인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가 이자벨에게 건네는 긴 회유, “마음을 오픈해두고, 자기 일에 전념하세요”는 묘한 실소를 자아낸다. 한편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한다. 그는 또 어떻게 이자벨의 삶 안으로 휩쓸려 들어갈까? 이 영화의 결말에 완벽한 위로는 없다. 그렇다고 지리멸렬하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아름다운 젊은 육체에 담긴 진심을 음유하던 클레르 드니는 이제 중년의 주름진 욕망마저도 끌어안는다. 여기에 로맨틱 코미디의 공식 안에 우겨넣어지지 않는 진짜 사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