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성못>은 어두운 물속이 조금씩 밝아지고 기타 소리와 함께 물속에서 뭔가 수면 위로 불쑥 튀어오르는 소리가 나면서 시작한다. 하지만 이후의 장면에서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것은 평온한 수성못에 떠 있는 오리배들뿐이다. 그러곤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음 장면에서 주인공 희정(이세영)이 오리배를 타러 온 엄마와 아들의 사진을 찍어주고 오리배에 타는 것을 도와주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처럼 감독은 영화의 시작 장면에서 우리에게 소리만 들려줄 뿐 그 소리의 실체를 보여주지 않는다. 이 영화가 흥미로운 것은 우리가 영화의 첫 장면에서 들었던 소리의 실체를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우리는 어떻게 우리가 영화에서 들었던 것(기타 소리, 뭔가 수면 위로 튀어 오르는 소리)의 실체가 우리가 본 것(기타 치는 아저씨)이라고 확신하게 되는가? 지금부터 감독이 어떤 방식으로 소리의 실체를 구체화하는지 따라가보려고 한다. 우선 영화의 마지막 장면, 즉 희정이 ‘기타 치는 아저씨’를 보기 바로 전 장면에서 희정에게 다가와 말을 건 남자(강신일)에 대해 살펴보자.
그는 영화에서 두 모습(산 자와 죽은 자)으로 나온다. 영화의 초반 아내의 불륜 사실을 알고 수성못에서 투신했던 그는 희정의 꿈에 나타나서 그녀의 목을 조른다. 하지만 그는 자살에 실패했고 다시 죽기 위해 영목(김현준)과 희정에게 도움을 청한다. 영목은 그의 호텔 방에서 그에게 자살 예행연습을 시키고 그 과정을 녹화한다. 녹화된 뷰파인더를 통해 자신이 자살하는 장면을 보게 된 남자는 자살을 포기한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한다. 그가 호텔 바에서 만난 여자와 사랑을 나누고 다시 인생의 행복을 느낀 순간 여자의 남자가 나타난다. 그는 남자를 피해 호텔 방의 창문에서 뛰어내린다. 하지만 우리는 그의 주검을 보지 못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그는 ‘귀신’일까? 그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다시 살펴보게 될 것이다. 이처럼 감독은 이 영화에서 등장인물들이 겪게 되는 상황의 반복과 실패를 통해 아이러니를 만들어낸다.
죽음에의 시도
첫 번째로 영목의 경우를 보자. 그는 자살 시도 경력 때문에 자살방지센터에서 사회봉사를 한다. 그는 자살을 시도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카메라로 녹화한다. 희정이 그에게 왜 그곳에서 일하느냐고 묻자 “누군가 한명이라도 자신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이 있다면 자살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어쩌면 이 말은 그의 ‘동반자살’과도 연관이 있지 않을까. 그는 또 자살 동호회를 만들고 동반자살할 사람을 모집한다. 그에게 “자살은 그가 자신의 인생을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했듯이 그는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어서 자살을 시도한 것은 아닐까. 하지만 이번에도 실패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영화의 결말에 상담자의 역할을 했던 그가 반대로 상담자의 뷰파인더에 등장한다.
두 번째는 유일하게 외출하는 장소가 집 근처 도서관이 전부인 희정의 동생 희준(남태부)이다. 삶의 에너지가 넘치는 희정과 반대의 성격으로 집에서 책만 읽는 은둔형 외톨이다. 그는 희정에게 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좋겠다고 말할 정도로 뭔가를 하고자 하는 의욕이 없는 인물이다. 희정에게 쓸모없는 인간이란 핀잔만 듣던 그는 영목이 운영하는 자살 ‘동호회’에 가입한다. 감독은 희정이 편입시험을 보는 장면과 영목의 자살 동호회 사람들이 자살하는 장면을 교차편집으로 보여준다. 여기서 감독이 두 장면을 반복적으로 보여줄 때, 자살 장면에서는 빠른 템포의 음악이 사용된다. 이러한 이미지와 사운드의 부조화는 희준의 자살이 실패할 것을 예감케 한다.
그녀는 곤경에 빠졌다
영화의 결말에서 희준은 도를 권유하는 젊은 여자를 만난다. 그녀가 기를 모아서 ‘함께’ 삶의 움직임을 만들어나가자는 권유에 관심을 보이면서 그녀를 따라가는 것이 우연일까. 혹시 그도 영목과 마찬가지로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마지막으로 희정은 앞의 두 인물 영목, 희준과는 대조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대학 편입, 서울 상경)을 얻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가는 인물이다. 하지만 영화의 초반 감독은 그녀의 입으로 영어 단어 ‘Predicament’(곤경, 궁지)를 발음하게 한다. 이는 앞으로 그녀의 삶이 그녀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을 것이란 걸 예상하게 한다. 그녀는 수성못에서 남자가 투신하는 사고를 목격한다. 그로 인해 영목과 엮이게 되고 결국엔 일자리도 잃는다. 또한 편입시험 당일 신도림역에서 신종 소매치기범을 만나 지갑을 뺏기고 맞기까지 한다. 영화의 결말에 그녀가 컴퓨터 화면으로 편입시험 결과를 확인하는 장면에 주목해보자. 이 장면 다음에 수성못의 울타리에 걸린 자물쇠(‘다 함께 그곳으로’란 글이 적힌)를 클로즈업으로 보여준다. 이 자물쇠는 영목이 자살 동호회 모임의 한 회원에게 걸라고 줬던 자물쇠다. 여기서 감독은 왜 이 자물쇠를 보여주는가? 이어서 모든 삶의 의욕을 상실한 희정이 수성못 근처의 벤치에 앉아 호수를 바라보는 장면으로 연결된다. 이는 희정이 자살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까. 왜냐하면 이때 호텔 방에서 뛰어내린 남자(우리가 죽었다고 추측한)가 맨발로 나타나서 그녀 옆에 앉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는 희정의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이 “사는 게 그렇게 간단치가 않아”라며 말을 건다. 희정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요”라고 말하자 “얼른 집에 들어가”라고 충고한다. 그가 ‘귀신’이라는 가정에서 다음 장면은 더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기타 소리’가 들리면서 예전에 영목이 그녀에게 말해줬던 수성못 귀신 이야기에서 들었던 ‘기타 치는 아저씨’가 수성못을 바라보면서 노래하는 장면이 보인다. 이 장면에서 “근데 그거 아나? 수성못 귀신 이야기?”라는 영목의 내레이션이 들린다. 이 목소리는 영화의 중반 영목이 희정에게 들려준 이야기다. 그가 그녀에게 ‘기타 치는 아저씨’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줄 때, 배경음악으로 들렸던 노래와 같은 노래를 그가 부른다. 영목은 “기타 소리를 들은 사람은 호수로 빨려들어갔다”는 말까지 해줬다. 이 장면에서 카메라는 흐르는 물을 보여주다가 서서히 남자가 투신한 작은 섬쪽으로 줌인했었다. 다시 마지막 장면에서 같은 노래와 영목의 목소리가 들리면서 카메라는 흐르는 물을 보여주다가 서서히 줌인하면서 이전 장면과 똑같이 작은 섬쪽으로 다가간다. 같은 장면의 반복이다. 영목의 내레이션(“그래서 어떻게 됐게?”)과 카메라의 움직임이 겹치면서 마치 누군가가 빨려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주면서 영화는 끝난다. 이처럼 영화의 시작 장면에서 우리가 들었던 기타 소리는 ‘수성못 귀신 이야기’ 장면에서 반복해서 들리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같은 음악을 직접 연주하는 ‘기타 치는 아저씨’를 소환한다. 감독은 반복적인 소리(기타 소리, 영목의 목소리)의 사용과 카메라의 움직임(줌인)을 통해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했다. 과연 희정은 남자의 충고대로 집에 들어갈 수 있을까. 그녀가 무사히 집에 들어갈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