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와 이동, 과거와 미래, 주저함과 결단. 영화 <콜럼버스>(2017)는 이 사이에서 동요하고 성찰하며 조응하는 두 인물을 따라가는 영화다. 정적이고 묵상적이다. 영화는 미국 모더니즘 건축의 메카로 알려진 지방의 소도시명을 제목으로 삼았다. 인간, 공간, 자연이 어우러져 있지만 인위적 배치를 감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자연스럽다. 평범함은 값비싸다. 영화 오프닝에 등장하는 저택의 소유자였으며 콜럼버스 모더니즘 건축의 후원자였던 어윈 밀러의 말이다. 영화는 건물과 건물이 자리잡은 공간을 포착해내는 시각적 아름다움을 넘어서 진귀한 평범함이라 할 어떠한 정서에 서서히 다가간다.
<콜럼버스>는 우리에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코고나다의 장편 데뷔작이다. 그는 이 작품의 시나리오와 편집까지 담당했다. 코고나다 감독은 <사이트 앤드 사운드>나 <크라이테리언 컬렉션> 등에 영화비평과 예술창작의 일환인 필름 에세이를 게재해왔다. 필름 에세이의 대상은 다양하나 주로 로베르 브레송, 잉마르 베리만, 오즈 야스지로 등의 고전영화다. 카메라 워킹을 거의 활용하지 않은 정적인 화면, 스토리가 중요하지 않은 밋밋한 서사구조, 자연스러운 듯 보이지만 엄밀하게 고안된 화면구성 등 코고나다는 자신이 헌사해온 감독들의 미덕을 자신의 것으로 자연스럽게 소화시켰다.
공간이 말하는 것
영화는 고안된 대칭 구도를 활용하고 있지만 완전무결한 대칭이 주는 기하학적 엄격함에서 벗어나려는 듯이 조금씩의 변주와 초점의 변화를 두기도 한다. 우선 공간 구성과 인물의 상황이 대칭적이다. 케이시(헤일리 루 리처드슨)에게는 도서관 동료 가브리엘(로리 컬킨)이, 진(존 조)에게는 아버지의 제자이자 어린 시절 첫사랑의 대상이었던 엘리노어(파커 포시)가 대화 상대다.
케이시는 밝고 부드럽고 자연스러우나 근원적 우울을 품은 소녀다. 괴로울 때는 자신이 좋아하는 건축물 앞에서 마음을 정돈시킨다. 도서관의 비정규직 사서인 케이시는 회복 중인 중독자 어머니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경제적 어려움과 어머니 부양에 대한 의무감으로 대학 진학을 포기한 채다. 그녀는 우연히 혼수상태에 빠진 건축비평가 아버지의 소식을 듣고 이 도시를 방문한 진을 만나게 된다. 차가운 합리주의자이자 독설가로 보이는 진은 자신과 거의 정서적 관계를 맺지 않았던 아버지를 원망하고 있다. 케이시의 의무는 그녀의 미래를 불투명하게 만들고 있고, 진이 부담스러워하는 전통은 그로 하여금 아버지의 상황을 외면하게 만든다.
장면의 균형과 리듬감을 조율해내는 영화적 방식이 무척 인상적이다. 감독은 대화 대부분을 커트 없이 한 장면에 담아내고 있는데, 특히 케이시 역의 리처드슨의 전형을 찾기 어려운 흐르는 듯 자연스럽고도 속 깊은 연기는 실로 경이로울 정도다. 그녀는 대사로는 도저히 전달될 수 없을 감정을 미세한 움직임, 가벼운 시선의 변화, 포즈나 전형적 표정연기를 거의 활용하지 않는 방식으로 전달한다. 리처드슨으로 인해 <콜럼버스>가 공간의 영화이자 배우의 영화로 기억될 듯하다.
한편 진과 엘리노어의 대화 중 인상적 장면은 거울에 비친 대화 신이다. 진의 첫사랑 상대였던 엘리노어는 아마도 새롭게 나타난 어린 여성인 케이시가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진에게 다가가 과거의 이야기를 끄집어내고 키스를 유도하지만 더이상의 깊은 관계는 원치 않는다. 이 모든 장면이 침실 경대 위에 놓인 그다지 크지 않은 거울에 비쳐서 진행된다(이 장면 외에도 감독은 거울을 활용해 다양한 장면을 변주하고 있는데, 코고나다 감독 자신이 베리만 영화의 거울 신에 대한 에세이를 만들었던 만큼 이 작품에서의 거울 신들도 하나하나 각별한 것이리라).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부드러운 시선으로 응시하는 케이시는 성마르고 예리한 눈매를 지녔으며 각진 몸매와 얼굴 윤곽을 지닌 진과 여러모로 대조적이다. 케이시는 이곳 콜럼버스에서 거의 평생을 살았지만, 아마도 직업적인 이유로 거주하던 서울에서 도착한 진은 콜럼버스에서 거의 완벽한 이방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의무와 전통에 얽매인 부모에 대한 책임감, 가까운 과거와 미래의 삶에 대한 심려로 인한 우울을 공유하고 있다.
영화는 여러 번 밀러 주택과 케이시의 집을 대칭적으로 보여준다. 밀러 주택은 교수이자 건축 후원가, 에큐메니즘주의자이자 시민권 운동가였던 어윈 밀러가 짓고 살았던 저택이다. 에로 사리넨에 의해 설계된 이 건물은 현재는 박물관에 기증되어 관광객들에게 개방되어 있다. 영화는 호사스럽고 아름다운 소품들로 가득한 밀러 주택만큼이나 케이시의 집을 비추는 데 공을 들인다. 이는 케이시의 일상을 설명하기 위한 방식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집 안 구조의 전체를 추측할 수 없을 정도로 카메라는 특정한 방향에서 움직임 없이 실내를 비춘다. 욕실에서 침실이 자리한 방향으로 혹은 그 반대로 카메라를 비추면 그 이외의 공간(거실이나 부엌)은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전형적 서민 주택의 실내지만 반복적인 (사람이 있거나 혹은 부재하는) 공간의 등장 속에서 묘하게도 묵상적이고도 고요한 깊이감이 만들어진다. 밀러 주택의 거실에는 진귀한 유리 공예품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사실 케이시의 집 거실에도 밀러 주택의 것만큼 값비싼 공예품은 아니더라도 색색의 유리 공예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크기와 질에 있어서 비교할 수 없는 두 저택이지만, 사람이 사는 공간에는 그 사람의 삶과 취향이 반영돼 있으며 삶의 깊이가 각인되어 있는 셈이다.
아름다움과 경이는 일상에 있다
‘영혼이 담긴 모더니즘’은 진의 아버지가 탐구하던 건축의 주제다. 케이시와 진은 건축을 매개로 실상은 자신의 내면을 탐험한다. 작은 도시 콜럼버스는 기념비적 규모의 과시적 건축물이 아니라 병원, 교회, 학교, 은행, 도서관 등 일상적 공공건물이 즐비한 곳이다. 머물고 떠나는 인물의 이야기는 완결되지 않은 채 미래를 향해 열려 있다. 그럼에도 영화에는 공공건물과 함께 그 건물들과 삶을 공유하는 인물들- 청소부들, 병원 노무원들, 공장 노동자 등 비정규직 노동자들- 을 여러 번 보여준다. 영화의 한 층위는 모더니즘 건축물을 경유하며 관계를 이어 나가는 케이시와 진의 모습에 주목한다. 그리고 다른 한 층위는 서사에 크게 기여하지 않지만 공간의 공공성, 그리고 그 공간을 구성하는 실제 사람들의 삶에 주목한다. 영혼이 담긴 모더니즘이란 대부호의 사적 공간에서 벗어나 공공의 일상적 삶에서 공유할 수 있는 공동체의 경험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부수적 장면들이 우리의 마음을 고요히 동요시킨다.
무심한 듯 두 차례 등장하는 좁은 뒷골목, 별다를 것 없는 거리 아이들의 대화와 놀이, 그리고 일상적 삶의 경이로움. 진이 찾아다니던 아버지의 메모 속 건물은 시청 건물이었다. 근접하지만 만나지 않는 외팔보 형식의 구조물은 어떠한 형이상학적 열망을 상징하는 듯하다. 그것은 부호의 살롱이 아니라 시청에, 광장에, 병원과 학교에 있다. 깨닫기만 한다면 이 아름다움과 경이는 우리의 일상 속으로 그렇게 잠입해온다. <콜럼버스>는 이러한 평범하고 귀한 진리를 우리에게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