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원더스트럭>, 토드 헤인즈의 염려
2018-05-15
글 : 홍수정 (영화평론가)
두개의 세계는 만날 수 있을까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무성영화시대를 살아가는 로즈(밀리센트 시먼스)와 유성영화시대에 머무는 벤(오크스 페글리). <원더스트럭>(2017)은 두개의 이질적인 세계가 이리저리 교차하다가 마침내 조우하는 여정을 지켜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영화를 본 후 나의 머릿속에서는 한 가지 의문이 떠나질 않았다. 과연 토드 헤인즈는 그의 영화가 그리는 조우의 순간을 정말로 믿을까. 나는 영화가 두 세계의 조우만큼이나 그 사이에 벌어진 간극을 끊임없이 의식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기에 마지막에 이르러 제시되는 해피엔딩 또한 내게는 그리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 않는다. 두 세계 사이의 간극과 다소 의심스러운 결합. 이 글은 그 미묘한 불일치를 응시하며 시작한다.

판타지를 경유하고서라도 만나고 싶은 세계

로즈와 벤 사이 50년의 시간 차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영화에는 두 인물간의 간극을 환기하는 순간이 자주 등장한다. 벤이 제이미(제이든 마이클)를 멀찍이서 쫓으며 미국 자연사박물관으로 향할 때 그들 사이의 거리의 간극은 박물관 안에서도 한동안 유지된다. 박물관 역사상 가장 오래된 운석 앞에 선 벤은 거울을 통해 제이미를 보고, 로즈 역시 이 거울을 통해 주변 사람들을 본다. 그 운석은 지구에 떨어진 순간부터 지속된 시간의 흐름을 물화하고 있다. 이 장면은 유구한 시간의 간극을 건너서 다른 이를 마주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준다. 그들은 하나의 매개(거울)를 통해 다른 이를 건너볼 뿐이다. 이처럼 <원더스트럭>은 거리의 간극을 가로지르는 아이들의 여정을 통해 시간의 간극(1927년과 1977년), 그리고 시대의 간극(무성영화와 유성영화)을 사유한다. 간혹 두개의 세계가 이 틈을 횡단하여 기적적으로 접촉하기도 한다. 그러나 토드 헤인즈가 그 접촉의 순간을 마냥 긍정하는 것 같지는 않다. 로즈가 종이배를 고이 접어서 어디론가 보내는 순간은 영화에 단 두번 등장한다. 그녀가 “도와주세요”라고 적은 종이배를 띄워 보내자 벤의 집 앞 강물이 찰박대고, 잠시 후 어디론가 전화를 걸던 벤은 그 자리에서 쓰러진다. 로즈는 박물관에서 “내가 있을 곳은 어디인가”라고 적은 종이배를 접어서 운석 위에 올린다. 짤랑대는 종소리가 들려오고 친구 제이미를 따라가던 벤은 늑대 디오라마와 마주친다. 언급한 장면들은 로즈와 벤이 속한 세계가 서로 교감하는 순간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인상깊게 다가오는 것은 이 장면들에 스며 있는 죽음의 기운이다. 벤이 벼락을 맞고 쓰러졌을 때, 그리고 늑대 디오라마 앞에서 주저앉았을 때 그의 얼굴에는 창백한 푸른빛이 감돈다. 벼락을 맞았다는 벤에게 제이미가 말한다. “벼락을 맞으면 죽어.” 다른 세계와의 접촉은 그 자체로 경이롭지만, 과연 우리는 경이의 순간이 전달하는 충격을 감당할 수 있을까. 나는 토드 헤인즈가 시종 그것을 염려한다고 느낀다. <원더스트럭>에는 판타지를 경유해서라도 접촉하고픈 이질적인 세계에 대한 갈망이 존재하지만, 그것을 접촉한 순간의 충격과 그 충격을 이기지 못했을 때의 파국에 대한 불안 역시 공존한다.

박물관에 간 아이들

두 세계 사이의 간극을 메우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등장하는 것은 ‘큐레이팅’이다. 영화에는 잡동사니가 가득한 방 한 가운데 선 아이의 이미지가 자주 반복된다. 벤의 오두막과 ‘호기심의 방’은 작은 물건들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으며, 벤과 로즈가 우연히 마주치는 곳은 박물관과 서점이다. 이곳은 인간이 끝내 지각할 수 없는 유구한 시간의 흐름을 붙잡기 위해 시간의 단편들을 끌어모은다. 영화가 아이들의 눈을 통해 뉴욕을 바라보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 일 것이다. 맥락과 상황을 통해 장소를 이해하는 어른과 달리 아이들은 생소하고 투명한 눈으로 공간을 감각한다. 그러므로 다양한 건물과 패션이 북적대는 뉴욕은 아이들에게 하나의 거대한 박물관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잡동사니 중에서도 의미 있는 물건을 선별하는 큐레이터의 안목을 통해 우리는 억겁의 시간 가운데 특별한 사건들과 만나게 된다. 이 영화에서 큐레이터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제이미다. 그가 하는 많은 말들 중에 일부만이 수첩에 적혀서 벤에게 전달된다. 벤이 늑대 디오라마 앞에 섰을 때, 아버지 대니와 관련된 문서를 발견했을 때, 퀸스 미술관에 로즈와 함께 있을 때 제이미는 이 순간들을 카메라로 찍는다. 번쩍이는 카메라의 불빛이 벤을 감전시켰던 번개의 섬광처럼 느껴지는 것이 나만의 착각은 아닐 것이다. 로즈와 벤이 연결되는 운명적인 순간에 벼락이 번쩍이듯, 제이미는 역사에 남을 의미심장한 순간에 카메라의 셔터를 누른다. 그런데 과연 이런 노력들로 두 세계간의 간극을 메울 수 있을까. 벤이 킨케이드 서점에 들어섰던 순간을 잠시 회상해보자. 월터(톰 누난)와 벤은 한 공간에 있지만 그들의 동선은 미묘하게 어긋난다. 로즈가 서점에 들어왔을 때도 1층의 월터와 로즈, 2층의 벤 사이의 간극은 한동안 유지된다. 그다음 장면에서 영화는 월터와 로즈 사이의 수화를 번역해주지 않기에 그들과 관객 사이에도 간극이 생성된다. 킨케이드 서점은 온 가족이 모인 공간이지만, 이곳은 여러 층위의 간극들로 점철되어 있다. 곧이어 로즈는 벤에게 대니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이야기는 오로지 모형과 사진만으로 재현되는데, 이것은 벤을 쫓아 미술관에 온 제이미의 모습이 생생한 영상으로 재현되는 것과 대비를 이룬다. 우리는 끝내 대니의 삶을 직접 들여다볼 수 없다. 따라서 그의 모습은 벤에게도, 관객에게도 영영 채워지지 않을 공백으로 남는다. 벤이 무언가를 기억해내려고 할 때쯤 미술관은 정전되고, 그가 로즈에게 전하려던 말도 전달되지 않는다. 마지막 순간까지 영화는 무수한 간극과 공백, 그리고 실패를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 영화가 두 세계의 조우를 긍정한다고 선뜻 말하기 어려운 이유다. 어쩌면 토드 헤인즈는 로즈와 벤의 만남은 축복하면서도, 두 세계의 완전한 조우는 의심하고 근심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영화의 마지막 결말(세 사람이 손을 잡고 별을 바라보는 장면)에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토드 헤인즈의 전작 <캐롤>(2015)이 냉혹한 현실 속에서도 연인의 사랑을 힘껏 끌어안았다고 느낀 이유는 그것이 결말에서 보여준 태도 때문이다. <캐롤>은 연인을 향한 여자의 시선에 오롯이 집중함으로써 그들의 사랑을 긍정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원더스트럭>은 세 사람의 화합에 대한 아름다운 수사로 갑작스레 끝을 맺는다. 이 결말에서 나는 영화가 시종 응시하는 간극을 끌어안는 용기도, 그것에 패배를 선언하는 대범함도 보지 못했다. 나는 이것이 훈훈하고 아름다운 서사 뒤로 스리슬쩍 몸을 숨기는 태도라고 느낀다. 그러나 내가 끝내 <원더스트럭>에 대한 애정을 거둘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보여주는 괴리에 어쩔 수 없이 마음이 가기 때문이다. 영화는 두 세계의 기적적인 접촉을 염원하면서도 그 순간을 두려워하며, 끝내 건널 수 없는 간극도 있었음을 고백한다. 여기에는 토드 헤인즈가 다른 세계에 대하여 품는 선망, 그리고 그만큼 큰 경외와 존중이 있다. 그가 여전히 흥미로운 작가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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