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큐레이터
2018-05-16
글 : 김혜리
<원더스트럭>

토드 헤인즈 감독은 이미지와 정체성의 관계를 연구하는 다양한 영화들을 만들어왔다. <원더스트럭>도 예외가 아니다. 1927년의 소녀 로즈(밀리센트 시먼스)와 1977년의 소년 벤(오크스 페글리)은 그들이 어떤 세계에 속하는 존재인지 발견하고자 집을 떠난다. 그러자면 우선 세상 전체를 조감해야 하기에 영화 속에는 한눈에 볼 수 있는 사이즈로 줄여진 세계의 대체물이 여럿 등장한다. 곳곳의 신기한 사물을 모아놓은 ‘호기심의 방’, 자연을 축소한 디오라마, 종이로 접은 도시가 그것들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박람회를 위해 정확한 비율로 줄여 만든 미니어처 뉴욕 전체가 등장한다. <원더스트럭>의 주인공에게 모형 제작은 세계를 이해하고 그 안에서 본인의 위치를 파악하는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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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드 헤인즈 감독의 <원더스트럭>을 비행기에서 처음 보았을 때, 첫 10분 동안은 영화 제목을 잘못 누른 줄 알았다. 이유는 단순무식하다. 토드 헤인즈의 필모그래피는 대략 여성이 중심에 있는 멜로드라마와 음악인에 관한 영화로 줄잡을 수 있는데, 두 어린이의 가출을 그린 <원더스트럭>은 어느 쪽도 아닌 전체 관람가 동화처럼 보였다. 그러나 의아함은 곧바로 사라졌다. <원더스트럭>이 토드 헤인즈 영화다운 진면목을 발휘하는 대목은 무엇을 이야기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이야기하느냐다.

영화는 평행하는 두개의 가출 스토리를 왕복한다. 하늘의 별에 관심이 많은, 1977년 미네소타의 소년 벤은 아빠에 대해 함구하던 엄마가 교통사고로 숨지자 책갈피 메모를 단서로 혼자 뉴욕행 버스에 오른다. 가출 직전 벼락을 맞아 귀가 멀게 된 사건조차, 자신의 정체를 알아내려는 소년의 결의를 막지 못한다. 한편 1927년 뉴저지의 소녀 로즈는 부재하는 엄마와 청각장애를 가진 그녀를 가둬만 두려는 아빠 사이에서 스크린의 별, 영화 스타들을 동경한다. 사랑했던 무성영화를 토키(talkie, 유성영화)가 밀어내고 아빠가 수화를 익히라 명령한 날, 로즈는 맨해튼으로 건너가는 배를 탄다. 로즈와 벤의 궤적은 뉴욕 자연사박물관에서 50년을 사이에 두고 교차한다. 실은 세 번째 아이가 있다. 부모가 이혼한 외로운 소년 제이미(제이든 마이클)는 아빠의 직장인 박물관을 자기만의 놀이터로 바꾸고 친구를 기다려왔다. 요컨대 통틀어 세 아이가 부모의 삶을 향해 다가가거나, 부모에게서 벗어남을 통해 결국 자기의 세상을 찾는 스토리다. 원작에 따른 것이겠지만, 로즈와 벤의 여정은 반드시 마지막 장에서 서사로 묶이지 않아도 충분히 서로에게 빛을 던질 수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 편이 더욱 경이롭고(wonder) 더 큰 위안을 안겼을지도 모른다. 예컨대 1927년의 로즈와 1977년의 벤이 박물관의 같은 자리에 서 있는 별의 조각, 운석 덩어리를 바라볼 때 이미 둘은 연결된다. 로즈와 벤이 공유하는 소리 없는 세계도 둘을 동일한 우주에 속하게 만든다. 당연히 관객은 침묵과 음향, 음악에 솔깃해진다. 눈에 띄는 점은 토드 헤인즈 감독이 두 아이의 커뮤니케이션 방식이 영화를 주도하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로즈와 벤은 청각을 잃었지만 각기 다른 이유로 수화를 할 줄 모른다. 따라서 말 대신 메모를 써서 남들과 소통하는 장면이 많은데 <원더스트럭>은 보통 영화와 달리 이 시간을 생략하지 않고 일일이 기다린다. 극중 상대방도 감독도 아이들의 들리지 않는 상태를 매우 존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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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원더스트럭>은 이상의 스토리를 어떻게 이야기하는가? <밀드레드 피어스>(2011)의 1930년대, <파 프롬 헤븐>(2002)과 <캐롤>(2015)의 1950년대, <벨벳 골드마인>(1998)의 1970년대, <세이프>(1995)의 1980년대 그리고 여러 연대를 종횡하는 <아임 낫 데어>(2007)까지, 토드 헤인즈는 은근히 시대극의 명인이다. 당대의 공기를 영화적으로 포착하는 능력에서 추종을 불허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실제 역사가 아니라 과거의 영화나 사진 등 시각 매체가 집단 기억에 특정 시대의 이미지를 새긴 양식을 재현하는 데에 탁월하다. 35mm필름으로 촬영한 <원더스트럭>에서 토드 헤인즈 감독은 두 시대를 찍는 스타일을 당대 영화에서 가져왔다. 벤이 여행하는 1970년대 뉴욕은 예를 들면 딱 <프렌치 커넥션>(1971)의 뉴욕이다. 노랑과 검정이 번지고 콘트라스트가 강하며 조금 지저분한 거리에 다문화가 물결치며 종종 동시대 영화의 유행이었던 줌도 쓱 들어온다. 보다 강렬한 인상을 안기는 로즈의 1920년대는 흑백 무성영화의 문법을 따른다. 단지 흑백 네거티브와 오래된 렌즈를 사용한 것이 다가 아니라, 극단적 앵글과 연기 스타일, 감정의 낙차와 빠른 편집이 모두 무성영화의 관습에 준한다. 어른의 손 그림자가 로즈에게 다가오는 숏은 독일 표현주의 무성 호러의 직접인용이다. 무엇보다 무성영화적인 요소는 강렬한 얼굴과 비언어적 감정 표현에 숙련된 청각장애인인 배우 밀리센트 시먼스라는 점은 말할 나위도 없다. <원더스트럭>의 1920년대 챕터는 1970년대와 마디마디 교차편집돼 있는 데에도 불구하고 한곡의 음악을 내처 듣고 있는 기분을 안긴다. 음향과 음악이 둘러싼 대공황 이전의 활기찬 맨해튼 거리 신은 도시교향악 그 자체다. 한편 마지막 무성영화 <폭풍의 딸>을 보고 극장에서 걸어나오던 로즈가 “유성영화 설비 설치로 임시 휴관”이라는 공고와 마주치는 숏은 <원더스트럭>에서 가장 슬픈 순간이다. 그토록 영화를 사랑했던 소녀는 이제 불완전한 관객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 정도로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토드 헤인즈 감독은 1920년대 파트에는 줄리언 무어가 릴리언 기시 같은 연기를 하는 극중 ‘진짜’ 무성영화를 넣었고, 1970년대 이야기 안에는 부모 세대의 과거를 압축 설명하는 스톱모션애니메이션을 삽입했다. 후자는 즉각 바비 인형을 배우로 쓴 감독의 초기 단편 <슈퍼스타: 더 카렌 카펜터 스토리>(1988)를 떠오르게 한다. 두 이야기와 그보다 많은 형식을 연결하는 알폰소 콘클라베의 편집은 치밀하고 아이디어가 풍부하다. 이야기의 진도를 맞추는 선로 변경의 역할을 넘어, 인물의 제스처와 대사의 합, 유사한 이미지나 컨셉이 두루 매치 컷의 고리로 쓰인다. <원더스트럭>의 원작자 브라이언 셀즈닉은 마틴 스코시즈의 <휴고>(2011)가 바탕한 원작의 저자이기도 하다. <휴고>는 영화의 기원, <원더스트럭>은 박물관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토드 헤인즈는 <원더스트럭>도 시네마에 관한 영화로 만들어버린다. “큐레이터의 일은 중요하다. 박물관이 뭘 소장할지 그가 결정한다. 개인 컬렉터도 역시 큐레이터다.”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책 속 구절이다. <원더스트럭>에서 가장 집요한 큐레이터이자 컬렉터이자 모델러는, 영화 양식을 수집하고 선별해 전시한 토드 헤인즈다.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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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뷸라의 수난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의 타노스(조시 브롤린)는 최악의 아버지다. 그는 침략 전쟁 중 납치 입양한 가모라(조이 살다나)를 가학적 훈련을 통해 전사로 키웠다. 여기까진 그렇다 치자. 안드로이드 네뷸라(카렌 길런)를 둘째딸로 삼은 타노스는 그를 학대하며 “언니보다 못해서 벌을 받는 것”이라고 주입해 이간질했다. 다행히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2>(2016)에서 가모라와 네뷸라는 반목을 해소했지만 이제 철면피 양부는 자매가 회복한 애정마저 이용한다. 네뷸라를 고문해 가모라를 움직이는 것이다. 보기 괴롭지만, 이 신의 시각적 아이디어는 신선하다. 공중에 뜬 네뷸라의 몸은 낱낱의 부속으로 갈라진 채 전체 형태를 유지한다. SF버전의 능지처참 일보 직전이랄까. 이 고문은 신화 속 프로메테우스처럼 산 채로 끝없이 겪는 최악의 고통을 피를 보여주지 않고 상상하게 한다. 또한 땅에 발을 딛지 못하는 네뷸라의 파편화된 몸은 가부장의 전횡으로 조각나고 도구화된 여성의 이미지로 읽히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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