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제37회 국제현대무용제 홍보대사 문소리, "쉰살, 예순살 넘어서까지 무대에 서고 싶다"
2018-05-24
글 : 이주현
사진 : 최성열

“<박하사탕>으로 데뷔했을 때의 나를 생각하면 지금 후배들이 나 무서워하는 게 어이가 없지. (웃음) 그땐 겁도 많고 부끄러운 것도 많았던,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애였는데.” <박하사탕>(1999) 개봉 이후 18년이란 시간이 흐르는 동안 문소리는 까마득한 선배 배우가 됐고, 스크린뿐만 아니라 무대에서도 존재감을 과시하는 배우가 됐고, <여배우는 오늘도>(2017)를 연출한 감독이 됐고, TV프로그램 <전체관람가>에 출연해 단편영화를 찍은 동료 감독들에게 날카로운 평을 날리는 진행자로도 활약하기에 이르렀다. 연극, 무용 등 공연에 꾸준히 관심을 기울인 덕에 최근엔 제37회 국제현대무용제(이하 모다페, 5월1 6~27일)의 홍보대사로도 위촉됐다. 부쩍 다방면에서 얼굴 볼 일이 많아진 것 같다고 하자 문소리는 “어떤 성과나 남들의 평가에 상관없이, 그동안 공부해왔고 애정을 가져왔던 것들을 가지고 재밌게 이것저것 해보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말했다. <박하사탕>의 재개봉 이야기부터 연극과 무용이야기까지, 문화예술 전반에 대한 문소리의 관심사를 함께 나눴다.

-<박하사탕> 얘기부터 해보자. 4월 26일에 디지털 리마스터링 버전의 <박하사탕>이 재개봉했다. <박하사탕>에 대한 추억과 애정을 공유한 사람들과 한 공간에서 영화를 볼 때 꽤 뭉클했겠다.

=정말 큰맘먹고 봤다. 영화가 시작되면 까만 화면에 하얀 점처럼 터널 입구가 보이고 따리라라 하고 음악이 나오지 않나. 그러면 벌써부터 눈물이 난다. ‘이젠 괜찮겠지’ 하면서 봤는데 또 통곡했다. 다른 관객에게 방해가 될까봐 울음을 꾹 참으니까 가슴이 막 쑤시고, 그런데 챕터가 바뀌고 기찻길이 나오면 더 눈물이 터지고. 붙인 속눈썹도 다 떨어져버렸다. (웃음) 아직 면역력이 생기지 않은 모양이다. 인간과 세상에 대한 애정과 이해가 정말 깊은 영화다.

-영화가 시작하면 곧장 눈물이 쏟아진다고 했는데, <박하사탕>이 환기시키는 그 감정이 대체 뭐기에 조건반사적으로 눈물이 나는 걸까.

=영화에서 영호(설경구)의 삶이 많이 변한다. 마찬가지로 내 삶 또한 변한 걸 느낀다. 무언가 지켰어야 했는데 지키지 못하고 잃어버린 것들. 어리석었던 순간들. 그런 생각들이 막 밀려든다. 내가 지금 똑바로 살고 있나 하는 질문도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 같고. 거기에 무릎 꿇을 수밖에 없다. 그래요 내가 잘못했어요, 열심히 살아보려고 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어요, 하는 마음으로. 내가 영호처럼 망가진 건 아니지만 많은 변화를 겪으며 흔들렸고, 그 속에서 갈피를 못 잡기도 했고, 나쁜 마음을 먹은 적도 있었고.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소중한 순간들이 너무 사무치게 그리운 거다. 영화가 시작되면 그렇게 정체를 알 수 없이 사무치게 그리운 마음, 슬픈 감정이 밀려온다.

-18년 전의 일임에도 <박하사탕> 오디션장에서 있었던 일이나 촬영장에서의 일을 굉장히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렇다면 <박하사탕>을 떠올렸을 때 가장 먼저 연상되는 건 무엇인가. 감정이든 사람이든 특정한 기억이든.

=아직도 <박하사탕> 오디션용 대본을 다 외우고 있다. 지금 바로 툭 치면 줄줄 대사를 할 수 있다. 그때의 경험이 내게 퍽 인상깊었던 것 같다. <박하사탕> 오디션을 볼 땐 검은색 스커트에 쇄골이 좀 드러나는 흰색 카디건을 입고 갔다. 좋아하는 선배한테 전화를 걸어 고백하는 장면이었고, 그 대사를 하다가 얼굴이 붉어졌다. 갑자기 심한 자극을 받거나 감정적으로 변화가 생기면 얼굴이 잘 울긋불긋 해진다. 이창동 감독님은 그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고 하시더라. 나처럼 그렇게 부끄러워한 사람이 없었다면서. 원래 몸이 정직하게 반응하는 편이다. <오아시스>(2002) 때도 (설)경구 오빠가 내 발에 뽀뽀하는 장면을 찍는데, 한 테이크 끝나고나서 보니까 발에 붉은 반점이 올라와 있었다. 누가 내 발등에 입 맞추는 게 싫었던 거야. (웃음) 그래서 차가운 물에 발 담그고 30분 쉬었다가 다음 테이크를 찍었다. 아무튼 <박하사탕>을 찍는 내내 어찌할 줄 모르겠고 부끄러운 마음이 컸다. <박하사탕>이 제4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초청받아서 영화제에 갔을 때도, 영화제가 처음이니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고, 그런 내가 너무 바보같고 부끄럽고. <박하사탕>을 생각하면 그런 부끄러운 기억들이 먼저 떠오른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이창동 감독에 대한 애정도는 변함없다고 말했는데, 그런 만큼 이창동 감독이 오랜만에 신작 <버닝>을 준비한다고 했을 때 남다른 마음이었겠다.

=이번엔 어떤 사명을 가지고 영화를 찍으실까 기대가 됐고, 또 언제 현장에서 뵐 수 있을까 하는 마음도 들었다. 죽기 전에 한번은 더 현장에서 만나겠지, 그런 생각도 늘 하고 있고.

-<버닝>의 전종서는 <박하사탕>에서의 문소리처럼 영화 경력이 전무한 신인이다. 전종서에게 ‘제2의 문소리’라는 수식어가 붙는 걸 보면서 전종서라는 배우에게도 자연히 관심이 갔을 것 같다.

=<버닝> 캐스팅 과정에서 이창동 감독님이 나에게도 여러 배우를 추천해달라고 하셨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쳐본 적이 있어 신인배우들 프로필도 드리고 정보도 드렸다. 그러다 전종서라는 배우가 캐스팅됐다는 얘기를 들었고, 연기를 잘했다는 얘기도 이미 들었다. 지난해 연극 <빛의 제국>으로 프랑스 투어를 했을 때, 지금은 고인이 된 칸국제영화제 자문위원인 피에르 르시앵을 만났다. 그때 피에르 르시앵이 <버닝>의 전종서 배우에 대해 ‘이창동 감독이 굉장히 훌륭한 배우를 찾은 것 같다, 제2의 문소리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그런데 사실 나와는 너무 다른 배우다. 오히려 제2의 문소리라고 하면 기분 나빠할지도 모른다. (웃음)

-국제현대무용제의 홍보대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현대무용과는 어떤 접점, 어떤 인연이 있나.

=<바람난 가족>(2003)에서 연기한 호정 캐릭터가 전직 무용수였던 주부여서, 그때 안애순 무용단과 두달 가까이 생활하며 현대무용을 배웠다. <오아시스>를 찍고 나서 <바람난 가족>에 들어갔는데, <오아시스>에서 뇌성마비장애인 공주를 연기하는 동안 몸이 많이 틀어져 고생을 꽤 했다. 골반도 틀어지고 경추랑 턱 관절도 안 좋아지고. 그런데 무용을 배우니까 몸이 좀 덜 아프더라. 그 이후 꾸준히 현대무용을 배우면 좋았을 텐데 그러진 못했다. <오아시스> 때부터 <바람난 가족>까지 계속 몸을 쓰다보니 몸을 쓰는 게 지긋지긋했다. 그렇게 한동안 현대무용과 멀어졌다. 그사이 여러 운동을 했는데 마음에 꼭 맞는 재밌는 운동을 찾기가 어렵더라. 기구나 기계가 많은 곳을 좋아하지 않아서 피트니스 센터에도 자주 안 가게 되고. 그러다 2년쯤 전 우연한 기회에 현대무용에 발레와 필라테스를 접목한 탄츠플레이를 접하게 됐다. 우선 도구를 많이 활용하지 않는 게 좋았고, 좋은 음악을 들으며 하는 것도 좋았고, 운동 효과도 톡톡히 봤다. 탄츠플레이를 시작하고서 어깨 통증이 사라졌고 몸도 반듯해졌다. 3년 전부터는 연극과 무용 공연을 열심히 보기 시작했다. 쉰살, 예순살 넘어서까지 무대에 서고 싶은데, 그러려면 무대에서 몸을 잘 쓸 수 있도록 관리를 해야 할 것 같더라. 그러면서 더 현대무용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무용에 소질이 있다는 소리를 종종 들었나.

=가동성, 유연성은 좋은데 리듬감이 좋진 않다. 그런데 무용을 통해 신체의 부족한 점을 채우게 되는 것 같다. 어릴 때부터 몸을 잘 구기고 있었다. (웃음) 늘 몸을 희한하게 구긴 채로 책을 읽고 TV를 보고 밥을 먹었다. 오랜 시간 좋지 않은 자세로 생활했더니 몸이 안 좋아졌다. 무용은 몸의 균형을 맞추고 중심을 잡는 운동이라, 나에게 필요한 운동이란 생각이 든다. 그런데 무용을 하기엔 발이 약하다. 무용은 발이 중요하다. 안정감 있게 발로 균형을 잡는 게 중요한데 발이 크지 않아서 튼튼하게 버티질 못한다.

-지난 4월엔 이란 출신 작가 낫심 술리만푸어의 연극 작품 <낫심>으로 무대에 섰다. 매회 다른 배우가 무대에 서고, 배우는 무대에서 처음 대본을 받아 극을 이끌어간다. 이런 실험극엔 어떻게 참여하게 됐나.

=무대에 서기로 한 결정적 이유는 대체 어떤 작품인지 궁금해서였다. 그 궁금증을 풀려면 직접 표를 구해서 연극을 보러 가야 하는데 그럴 바에 한번 하자 싶더라. 다른 문화적 배경을 지닌 사람들,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서로 소통하는 과정이 이 연극의 주제다. 대단한 볼거리나 내용이 있는 건 아니고, 주제의 전달 방식이 흥미로운 작품이다. 무대에 올라가면 스크린에 텍스트가 뜨고 그걸 계속 읽어나간다. 생각보다 내가 읽기를 잘하더라. (웃음) 너무 실수를 안 해서 공연 보러 온 남편이 사전에 대본을 보고 무대에 오른 줄 알았다더라. 리허설이 없는 1인 즉흥극이라는 컨셉이 주는 압박감도 그렇게 크지 않았다. 설마 사람이 할 수 없는 것들로 연극을 만들진 않았겠지 싶어서 긴장하지 않았다. 공연 관계자도 다른 배우들과 달리 너무 편안해 보인다고, 너무 긴장을 안 한다고 하긴 하더라.

-지난 우디네극동영화제(4월 20~28일)엔 <여배우는 오늘도>를 들고 감독으로 초청받아 갔다. 배우로 영화제에 참석할 때와 다른 점이 있던가.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일정이 너무 빡빡했다. 하루쯤은 와인도 마시고 바람도 쐬고 싶었는데 괜한 기대였다. 하루는 <여배우는 오늘도> 상영하고, 하루는 <1987>(2017) 상영하고, 하루는 <리틀 포레스트>(2018) 상영하고. 20개가 넘는 매체와 인터뷰 하고, 토크 행사에도 참석하고 나니 3일이 금방 지나가더라. 게다가 감독으로 초청받은 거라 헤어, 메이크업 스탭과 동행하지 않았다. 혼자 옷 챙겨 입고 화장하고 머리 고데기로 펴고 했는데, 아침마다 한 시간씩 그러고 있자니 진이 다 빠졌다. 막상 사진 보면 고생해서 꾸민 티도 안 나고. (웃음) 그래도 재밌었다. <1987>은 대규모 오페라 극장에서 상영을 했는데, 극장을 가득 메운 관객이 울면서 기립박수 치니까 꽤 감동적이었다. <리틀 포레스트>의 반응도 좋았다. 관객 투표 결과를 보니까 <군함도: 감독판>(2017)에 이어 <리틀 포레스트>가 4등이었다(3등까지 관객상이 수여된다). <여배우는 오늘도>도 좋아하셨다. 아시아영화를 소개하는 유럽의 영화제라 한국영화에 대한 이해가 깊은 관객이 많은데, 그래서인지 영화에 이창동이나 홍상수 감독이 언급되는 장면에서 즉각적으로 맥락을 이해하고 웃더라.

-현재 드라마 촬영 중이라고 들었다. 작품 계획은 어떻게 되나.

=의학 드라마 <라이프>를 촬영 중이다. 드라마 <비밀의 숲>을 쓴 이수연 작가의 작품이고 조승우, 이동욱 배우가 출연한다. 거기서 신경외과 과장 역을 맡았다. 실제 여러 전공 중 신경외과가 제일 하드하고 터프하다. EBS <극한직업>에도 신경외과 전문의가 소개된 적이 있고. 의학 드라마를 한번 해 보고 싶었는데 이번에 기회가 닿았다. 드라마 촬영이 끝나면 영화 <어쩌다 배심원>(감독 홍승완)에 들어간다. 거기선 판사 역이다. 김영란 전 대법관과 젊은 여성 판사들을 만났는데 다 훌륭한 분들이더라. <박하사탕>에선 구로공단의 노동자였는데, 이제 곧 대통령도 할 것 같다. 사주에 관이 많다더니 작품으로 관운을 다 풀고 있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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