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세대 대만 남자배우들에 대한 국내의 관심은 최근 5년 사이 급상승했다. 로맨스 코미디 영화를 포함해 대만 드라마의 인기가 주요한 요인으로 자리잡은 가운데 류이호, 왕대륙, 가진동, 펑위옌 등 몇몇 이름들이 핵심 멤버로 자리잡았다. 2011년 드라마 <연애의 조건>으로 데뷔한 류이호는 드라마 <희환일개인>(2014)에서 따뜻한 셰프를, <타간타적제2안>(2015)에서 도시적인 이미지의 투자자를, <아적귀기우>(2015)에서 학교 킹카를 연기하며 인기 스타의 입지를 확고히 굳혔다. 그간 대만 드라마 속의 류이호는 냉정히 말해 현실보다는 상상계 속에나 있을 법한 존재였다. 하지만 주연으로 스크린 데뷔를 꾀한 <안녕, 나의 소녀>에선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학창 시절의 부푼 꿈과 달리 어느덧 평범한 샐러리맨이 된 정샹(류이호)은 전면에 나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보다 은페이(송운화)의 죽음을 경유해 차분히 삶을 되돌아보기를 택한다. 기꺼이 많은 이들의 이상형이 될 배우야 과거에도 지금도 수두룩하지만 그중에서 류이호는 요즘 여성들의 취향에 딱 맞는 ‘클린’한 이미지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 중이다. 한국의 정해인, 일본의 사카구치 겐타로와 함께 사려 깊은 로맨스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류이호를 5월 24일 한국에서 만났다.
-스크린에서 본격적으로 주인공을 맡은 첫 작품인데. 캐스팅 과정이 궁금하다.
=정샹 역은 많은 남자배우들이 탐냈던 역할이다. 나를 포함해 꽤 여러 배우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알고 있다. 내 경우는 우선 시나리오를 보자마자 작품에 매료됐다. 영화에서 정샹과 은페이의 추억 속에 가장 중요한 정서를 이루는 가수 장위성을 개인적으로도 무척 좋아한다(장위성은 90년대 대만을 풍미했던 가수로, <안녕, 나의 소녀>에서 정샹과 친구들은 장위성을 흠모하며 ‘월구방’이라는 밴드를 결성하기도 한다.-편집자). 특히 내가 좋아하는 장위성의 노래 중 <나의 미래가 꿈인 것만은 아니다>의 메시지는 이번 영화와도 연결되어 있다고 느낀다.
-대만에서 칭첸덴(輕晨電)이라는 이름의 밴드 활동을 하고 있는데, <안녕, 나의 소녀>에서도 음악을 사랑하는 역할이라 즐겁게 촬영했겠다.
=칭첸덴은 모닝콜(Morning call)이라는 뜻이다. (웃음) 일렉트로닉 밴드고 기타리스트로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솔로로 돋보이는 역할은 아니다. 실제로 노래하는 분량도 거의 없고, 여태 내가 노래를 잘한다고 느낀 적이 없는데 <안녕, 나의 소녀>에선 혼자 노래를 불러야 해서 압박감이 꽤 있었다. 영화관이라는 크고 밀폐된 공간에서 내 노래가 관객에게 집중적으로 전달될 것을 생각하니 정말 아찔한 심정이었다. 솔로 연주와 노래에 심혈을 기울였다.
-영화에 90년대의 추억을 소환하는 장치들이 여럿 등장한다. 영화 속 나이보다 조금 더 젊은 세대이긴 하지만 특별히 공감대를 형성한 복고적 요소가 있나.
=타입슬립해서 들어간 1997년은 실제로 장위성이 불의의 사고로 운명한 해라는 점으로 내게도 각인되어 있다. 그 밖에도 영화에는 다마고치, 버블티, 동전을 넣고 스티커 사진을 찍는 기계 등 내가 어릴땐 곳곳에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진 것들이 많다. 세트가 다 만들어진 뒤 영화 속 배경이 되는 거리에 섰는데, 마치 내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류이호, 송운화라는 대만 로맨스영화의 차세대 주역들이 모인 점이 화제가 됐다. 송운화와의 호흡은 어땠나.
=우리 모두 극중 캐릭터와 실제 성격이 비슷해서 편안한 마음으로 작업했다. 특히 송운화 배우는 특유의 털털하고 대범한 태도로 촬영장 분위기를 늘 즐겁게 만들었다. 약간 낯을 가리는 성격이지만 송운화 배우 덕분에 거리감을 느낄 새도 없이 자연스럽게 관계를 쌓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스스로 정샹과 어떤 면이 닮았다고 느꼈나.
=배역에 많이 공감했다. 정샹에 비하면 좀더 꿈이 없었던 편이지만. 사회에 나가면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하고 흐릿하던 시기가 있었다. 막연히 어른이 되면 샐러리맨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가지기도 했다. 정샹 역시 어릴 때 지녔던 또렷한 꿈이 있었지만 나이가 들면서 그런 기억들로부터 점점 멀어진다. 동시대 청년이라면 보편적으로 공감할 만한 지점이기도 하다.
-환하고 다정한 이미지로 로맨스 스토리의 주역으로 자주 호출을 받는다. 팬들이 선호하고 기대하는 부분과 별개로 기존 이미지에서 완전히 탈피한 배역을 시도해보고 싶은 마음도 생길 것 같다.
=도전을 한다는 측면에서는 정말 그렇다. 특히 한국영화가 새로운 영감을 주는데, 한국은 거칠고 남성적인 소재의 영화가 많이 등장하는 것 같다. 암흑 세계가 자주 배경이 되기도 하고. (웃음) 배우 김수현이 출연한 <은밀하게 위대하게>(2013)는 특히 탐나는 작품이다. 엉성하고 바보 같은 인물인데 알고보면 간첩이라는 설정이 좋다. 극단적인 양면을 보여줄 수 있는 역할을 연기해보고 싶다. 한국 배우 중에선 차태현 배우와도 함께 작업해보고 싶다.
-코미디 연기에 대한 은근한 야심이 느껴진다.
=예리한데. (웃음) 실은 어릴 때부터 주성치 영화를 워낙 좋아했다. 사람들을 웃게 만드는 건 굉장히 대단한 힘이라고 생각한다. 웃음이 관계를 편하게 만들어주기도 하고. 기쁘고 희망적인 분위기의 코미디영화가 관객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거라는 생각 때문에 더 작업하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사실 한국영화 <슬픔보다 더 슬픈 이야기>(2009)의 대만 리메이크작을 다음 영화로 결정한 상황이다. 무척 슬프고 우울한 정서가 짙은 작품이라 이 아이러니함이 재밌다.
-언제부터 배우를 꿈꿨나.
=어릴 때부터 배우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집안 분위기가 조금은 보수적인 편이어서 내가 배우가 된다고 했을 때 가족들 모두 정말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한번은 염색을 하고 집에 갔더니 “그런 건 연예인들이나 하는 거지!”라고 다그치시기도 했다. 그러던 중 학창 시절에 한 선배가 기획사의 모델 선발 대회를 추천해 엉겁결에 나가게 됐다. 그 당시에 정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사실 나는 말수가 적은 내성적인 성향에 가까웠고, 그때까지만 해도 잘 모르는 이성과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힘들었다. 안 되겠다는 생각에 포기하려고 한 순간이 있었는데 주위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널 응원하고 있는데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라고 격려해주더라. 그 일 이후 지금까지 개인적으로 배워온 마음가짐이 하나 있다면 무엇이든 편안하고 차분한 마음으로 해나가자라는 거다.
-<안녕, 나의 소녀>뿐 아니라 그간 출연한 대만 드라마들이 국내에 두터운 팬층을 형성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체감하고 있나.
=2년 전에 한국에서 열린 팬미팅에서 깜짝 놀랐다. 평소에 눈물이 거의 없다고 생각했는데 한국 팬들이 만들어준 생일케이크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울고 있더라. 올해는 그때보다 더 편안한 마음으로 왔다.
-현재 대만에서 촬영 중인 드라마 신작에 대해서도 들려달라.
=<식물 여신>(Plant Goddess)이라는 대만 드라마에서 음악 프로듀서 역할을 맡았다. 최근 몇년간 작품 속에서 음악과 인연이 많은 것 같다. (웃음) 결벽증을 가진 인물이 어쩔 수 없이 시골에 가 살게 되면서 농촌 생활에 적응하는 모습을 보여주게 될 것 같다. 그 과정에서 매번 갈등 관계였던 여성과 사랑을 키워나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