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촬영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봐야 할 건 하나의 장면이 아닙니다. 장면과 장면이 연결되고 부딪치는 걸 주목해야 합니다. 영화의 불꽃은 거기서 피어납니다.” 2018년 칸영화제 기간 내내 나를 지배한 건 장 뤽 고다르의 저 한마디였다. 매일 두세편씩 열흘간 영화를 보며 순서대로 쌓여가던 기억은 저 한마디에 뒤흔들렸다. 그리고 막바지에 이르러선 서로 충돌하고 영향을 미치며 겪어보지 못했던 형태로 재구성되기 시작했다. 아마 영화를 본 순서가 바뀌었다면, 혹은 극장에 들어서기 전 날씨가 달라졌다면, 이곳이 칸이 아니었다면 전혀 다른 기록이 되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지금부터 쓸 2018년 5월 8일부터 18일까지 칸영화제의 관람기는 유일하고 반복될 수 없는 개인적인 경험이다. 때문에 다소 낯간지럽지만 체험기의 형태로 이 기억을 기록해보고자 한다.
생각해보면 모든 영화적 체험이 유일하며 개인적이다. 영화와의 교감은 장면과 관객 사이에만 머물지 않는다. 연극, 공연 등에 비해 간과되는 부분이지만 영화 역시 시간과 장소에 얽매이는 집단 체험이다. 때론 극장의 분위기도 중요하고 함께 영화를 보는 이들의 미묘한 반응들이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전이되기도 한다. 언제, 어떤 타이밍에, 어떤 순서로 보느냐에 따라서 영화에 얽힌 기억은 지층이 퇴적되듯 유일한 문양을 만들어간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제는 단순한 축제 이상의 체험이다. 차라리 일종의 종교적 의식에 가깝다고 보는 편이 적절할 것 같다. 영화를 한자리에 모아놓고 압축적으로 보다보면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지도가 그려지기 마련이다. 한정된 시간에 들뜬 분위기로 영화를 공유한다는 것, 여기엔 실로 공유라는 단어의 울림이 기분 좋게 달라붙는다. 영화와 영화들이 내 의사와 관계없이 이어지고 예상치 못한 행간 속에서 의미를 발견해나가는 기쁨. 흥분, 걱정, 긴장이 교묘하게 뒤섞여 몸을 달구는 가운데 장 뤽 고다르의 신작 <이미지의 책>이 있다.
끊어지지 않는 영화의 사슬, <이미지의 책>
이 글은 어떻게 해도 <이미지의 책>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미지의 책>은 순서상 다섯 번째로 본 영화였지만 칸영화제 내내 나를 지배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이 영화가 서사에 기댄 친절한 설명이나 정서의 전달이 아니라 극장이라는 동굴 안에서 끊임없이 공명하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식상하게 들리겠지만 고다르의 영화를 접하고 나서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지 않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언젠가부터 고다르는 아카이브적인 영상들을 모으고 뒤섞고 충돌시켜 하나의 소용돌이를 창조한다. 고다르는 이를 “일어나고 있는 일이 아니라 일어나지 않는 일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정리한다. 일견 거창해 보이지만 핵심은 간단하다. 재현된 것을 카메라에 찍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이미지와 이미지의 충돌을 통해 촉발되는 사유의 흐름을 감지하라는 것이다. 고다르는 <이미지의 책>을 통해 역사와 이미지가 결합하는 5가지 운동을 창조한다. 여기서 이미지란 단순히 장면, 그림이 아니다. 오히려 덩어리진 감각이나 관념이라고 하는 편이 적절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슬람 문명을 압박하고 서구에 예속시키려 했던 욕망, 여성에게 폭력을 가했던 역사가 수많은 레퍼런스 영상을 통해 전달된다. 물론 뉴스나 다큐멘터리처럼 사실을 재현하는 것과는 다르다. 이 아카이브 영상들은 오직 조형적인 질료에 불과하다. 불분명한 프레임과 야수파의 회화를 연상시키는 색조, 사운드의 충돌들이 끊임없이 불꽃을 튀기면 그 잔영들이 하나의 운동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사실 경쟁부문 리스트에서 장 뤽 고다르의 영화를 발견했을 때부터 기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영화의 역사처럼 공부했던 감독의 신작을 영화제에서 만난다는 건 분명 쉽게 할 수 있는 경험은 아닐 것이다. 장 뤽 고다르 스스로는 거부했지만 ‘작가’라는 인장은 자연스레 경배를 일으키는 일종의 최면 상태에 가깝다. 고다르의 신작에 대해서도 기꺼이 존경을 바칠 준비를 하고 관람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와 무관하게 <이미지의 책>은 강렬한 에너지로 칸을 휩쓸었다. 이 영화에 특별황금종려상을 준 것도 이해가 된다. 다른 경쟁작들과 전혀 다른 성질의 <이미지의 책>은 애초에 잣대를 들이대기 어려운 위치에서 영화를 향한 질문을 던진다. <이미지의 책>은 영상들을 뒤섞고 휘저으면서도 영상간의 연결고리들을 만들어 끊임없이 연쇄시키는 종류의 영화다. 그 연결된 불꽃의 궤적이야말로 영화의 운동이라 부를 만하다. 나도 여기에 자극을 받아 직접 체험한 21편의 경쟁작들의 불꽃으로 3개의 고리를 만들어보았다. 고다르를 흉내내어 말하자면, 중요한 건 한편의 영화가 아니다. 좁고 고요하고 어두운 밤, 저 깊숙한 우물 밑바닥에서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질문들이다.
첫 번째 고리. 예쁘다와 아름답다 사이 이미지의 파편들
<요메드딘> <더 와일드 페어 트리> <콜드 워>
첫 번째 고리는 A. B. 샤키 감독의 <요메드딘>으로 조각해보자. <요메드딘>은 나병 환자인 비샤이가 고아인 오바마와 함께 가족을 만나기 위해 고향으로 떠나는 여정을 그린 영화다. 극장을 나서자마자 영화제 중간에 봤으면 좋았을 거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장애로 인해 가족에게 버림받았던 남자가 자아를 찾아가는 맑고 착한 이야기는 소위 말하는 힐링의 조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반대로 말해 이 영화는 어쩌면 빈곤의 포르노처럼 보일 만큼 관습적이고 평범하다. 소박하고 단선적인 스토리에 찰기를 부여하는 건 두 가지다. 하나는 비전문배우들의 육체에 깃든 설명되지 않을 이미지들. 비샤이는 나병으로 인해 표정을 거의 짓지 못한다. 데드마스크처럼 보이는 그의 얼굴이 카랑카랑한 목소리, 자연광 아래 이집트의 풍광들과 조우할 때 설명하기 힘든 감흥을 자아낸다. 그야말로 서사로부터 어느정도 분리된, 이미지 자체의 힘이라 해도 무방하다. 일종의 로드무비이기도 한 이 영화에서 남자와 소년은 당나귀가 끄는 수레에 의지해 먼 길을 떠난다.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느리고 귀여운 추격 장면도 등장하는데 부분이 전체를 압도하는 이미지들 덕분에 이 영화에 대한 박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인상깊게 다가왔다. 일견 제3세계의 문화를 전시하는 듯 보이기도 하지만 일련의 장면 자체가 경탄스러울 만큼 예쁘다는 사실이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바로 이 ‘예쁨’, 그러니까 전체의 완성도와 무관하게 기능적이고 기술적인 장면들이 올해 칸에서 발견한 하나의 고리다.
기하학적으로 또는 거의 강박적으로 프레임을 액자 삼아 풍경화를 그리는 영화들은 영화제 곳곳에서 발견된다. 누리 빌게 제일란 감독의 <더 와일드 페어 트리>는 소설을 쓰고자 하는 아들과 학교 선생님인 아버지 사이의 갈등을 그리고 있다. 세대간의 충돌을 온갖 상징으로 엮어 그려낸 이 영화는 3시간이 넘는 상영시간 동안 한권의 풍경 삽화집을 밀도 있게 엮어낸다. 전작 <윈터 슬립>(2014)과 여러 지점에서 겹치는 인상인데 소설을 쓴다는 키워드에 걸맞게 여러 문학적 콘텍스트를 인용한다. 하지만 누리 빌게 제일란 고유의 연출과 별개로 이 영화가 촘촘히 메워낸 이미지들은 종종 서사와 분리된다는 인상을 남긴다. 굳이 ‘삽화집’이란 표현을 동원한 건 스크린을 하나의 화폭처럼 활용하는 장면들이 마치 성당의 프레스코화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신의 이야기를 담은 프레스코화의 연결처럼 누리 빌게 제일란은 인간 본성에 대한 성찰과 질문을 상징화된 장면들 속에 담아낸다. 그러곤 플립북처럼 주르륵 빠르게 넘기는 것이다. 주제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과는 별개로 이 이미지들은 뇌리에 각인되어 종종 제멋대로 되살아난다. 굳이 그 이유를 찾아보자면 그 역시 아마도 예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작가주의가 만약 작가적 스타일을 반복하는 것이라면 누리 빌게 제일란만큼 그 지점이 선명한 감독도 드물 것이다.
재미있는 건 올해 칸에서 유독 거장들의 반복이 도드라졌다는 점이다. 이 부분은 뒤에 따로 다루도록 하겠다. 왜냐하면 근원의 탐색이야말로 가장 핵심적인 고리이자 칸을 설명해주는 결정적 매듭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와, 장면의 아름다움에 관한 한 파벨 파블리코프스키 감독의 <콜드 워>를 빼놓을 순 없을 것 같다. <콜드 워>는 1940년대 냉전시대의 폴란드를 배경으로, 20년에 걸쳐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는 남녀의 애틋한 멜로드라마다. 피아니스트 빅터(토마스 코트)는 가수이자 댄서인 줄라(조안나 쿠릭)를 만나 운명적인 사랑을 시작한다. 1940년 폴란드에서 시작된 이들의 인연은 빅터가 망명을 떠남에 따라 1952년 베를린, 1955년 유고슬라비아, 1957년 파리, 1959년 다시 폴란드로 장소를 옮겨가며 이어진다. 시대의 풍파에도 불구하고 결국엔 함께할 수밖에 없는 사랑 이야기 자체는 새로울 게 없다. 그러나 파벨 파블리코프스키 감독이 거의 강박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유지하는 프레임의 기하학적 구도는 서사와 별개로 아름답다. 매 장면이 한폭의 정물화가 되는데 이 빅숏들이 공간과 도시에 따라 톤을 달리한다는 게 이 영화의 탁월한 지점이다. 가난하지만 자존감 넘쳤던 폴란드에서의 풍경은 매우 정밀한 롱숏으로 구성되어 있는 반면 상대적으로 윤택하지만 혼란스러운 파리에서의 생활은 어지러운 클로즈업숏들이 화면을 침범해 들어온다. 주제에 맞춘 형식, 불안의 장면화라고 정의하면 이해하기 쉽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지점이 있다. <콜드 워>는 “16mm영화들을 떠올리게 하지만 시대를 조명하지도 못하고 감동을 자아내긴 부족하다”는 아쉬운 지적도 받았다. 하지만 어떤 악평도 이 영화의 촬영이 탁월하다는 전제만큼은 공통적으로 동의하고 출발했다. 특히 거울에 비친 군무의 훈련 장면이나 정적 그 자체를 찍은 정류장 장면은 직관적으로 아름답다. 여기서 피어오르는 질문. 서사와 별개로 장면 자체로 아름다움을 느낀다면 그 장면은 유효한가. 사진처럼 뇌리에 박힌 멋진 장면들은 감독의 의도와 분리된 채 되살아난다. 그 생명력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아쉬운 평가를 남긴 영화들의 예쁜 장면들은 내 개인적인 ‘이미지의 책’ 속에 아직도 꽂혀 있다.
두 번째 고리. 아시아영화들의 약진과 뼛속을 울리는 신호들
<레토> <애시 이즈 퓨어리스트 화이트> <버닝>
파편화된 이미지들이 눈을 매혹했던 것처럼 피부의 솜털까지 자극했던 사운드들도 있었다. 올해 칸의 영화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 징후 중 하나는 일종의 신호와 같은 사운드들이었다. 고다르의 <이미지의 책>은 말할 것도 없다. 여기서 꼭 언급하고 싶은 건 빅토르 최의 일화를 다룬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감독의 <레토>처럼 누가 봐도 음악이 주가 되는 영화들이 아니다. 물론 1980년 초 레닌그라드의 분위기와 창작의 불안, 부서진 꿈을 MTV 뮤직비디오처럼 경쾌하게 풀어낸 <레토>의 음악은 충분히 인상적이다. 다만 전기영화, 연대기, 뮤지컬 등 여러 장르를 직조해 엮어낸 <레토>는 다이내믹한 음악만큼이나 장식적이고 기교로 가득 찬 영화라 달콤할지언정 뼛속까지 울리는 느낌은 약했다. 예쁜 오브제 같은 영화는 한편으론 기운을 북돋아주면서도 영화에 대한 질문과 탐색을 흐리게 만들었다. 에바 허슨 감독의 <걸스 오브 더 선>이나 스파이크 리 감독의 <블랙클랜스맨>처럼 과장되고 선동적이며 장르적 색채가 강한 영화들도 마찬가지다. 올해 칸의 정치적인 색채를 대표하는 두 영화는 편안하고 충분히 즐겁지만 거기까지다. 이 영화들이 꼭 영화제라는 공간의 힘을 필요로 하는 작품인지 솔직히 의문이 든다. 상대적으로 두드러지지 않고 무난한(혹은 박한) 평가가 이어진 건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아장커 감독의 <애시 이즈 퓨어리스트 화이트>는 예상 이상으로 좋았다. 지아장커가 그간 걸어온 영화적 여로의 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영화는 2001년부터 2018년까지 17년의 세월을 경유해 남녀의 관계를 그려나간다. 개발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주변부로 밀려나는 것들에 시선을 보내던 지아장커는 <천주정>(2013)을 기점으로 장르와의 접목을 시도한다. 그 연장에서 볼 때 <애시 이즈 퓨어리스트 화이트>는 누아르와 멜로드라마의 지아장커식 변주다. 어떤 장르를 가져온다 해도 자신의 자장 안에 녹여 소화하는 만큼 이번 영화 역시 지아장커의 연대기라 할 만하다. 정확히는 그의 동반자 자오타오의 연대기다. 탄광촌 출신의 여성인 차오는 강호의 리더 빈(리아오판)의 연인이다. 변화의 속도에 휩쓸린 사람들은 전통적 가치와 분리되기 시작하는데 누군가는 의리를 배신하고 누군가는 도태된다. 그 와중에 굳건하게 자신을 지켜나가는 사람은 다름 아닌 차오다. 빈을 위해 감옥에 들어간 차오는 출소 후 빈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원망과 과거에 매몰되는 일 없이 기어이 생존해나간다. 다통, 펑제, 신장 등지를 아우르는 차오의 여정은 <스틸 라이프>(2006)에서 미처 다 보여주지 못했던 고향으로 돌아온 여인의 초상을 연상시킨다. 싼샤댐의 풍경, UFO 등 초현실적인 장면의 삽입 등 초기작의 정서를 켜켜이 쌓은 장면들은 오마주 내지는 회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종국엔 한 여인의 일대기가 하얗게 불태우고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애상처럼 남는다. 어떤 면에서는 반복이지만 정확히는 축적이라 불러 마땅하다. 지아장커가 그간 선보였던 정서들, 풍경에 녹여내던 가치들, 장르에 대한 호기심들이 한데 뭉쳐 간혹 서로 충돌시키고 긴장을 자아내면서도 균형을 잃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은 올해 칸의 빈자리를 달래준 아시아의 거장들, 그러니까 고레에다 히로카즈와 이창동 감독에게서도 마찬가지로 발견된다. 다시 돌아와 <애시 이즈 퓨어리스트 화이트>가 나를 뒤흔든 건 다름 아닌 음악이었다. 롱숏의 느린 호흡으로 담아낸 중국의 풍경은 지아장커의 전매특허지만 이번에 도드라진 건 이미지보다 음악이라 생각한다. 영화에는 북소리(혹은 총소리)처럼 들리는 사운드가 반복해서 등장한다. 마치 막이 오르고 내리는 신호처럼 둥둥둥 세번 울리는 이 소리는 영화 바깥에서 관객에게 신호를 주는 것처럼 온몸을 울린다. 그 후 차오가 비상한 결심을 하거나 상황이 전환되는 등 시간이 삽시간에 흘러버린다. 시간의 흐름을 따로 짚어주지 않는 이 영화에서 이 세번의 북소리는 중요한 지표다. 관습적으로는 무언가 일어날 것이라는 신호처럼 보이지만 그렇게 단순하게 반복되지도 않는다. 고다르가 <이미지의 책>에서 본인의 목소리를 통해 이미지들을 헤집고 모으고 흐트러트리는 것처럼 지아장커는 이 세번의 북소리로 관객을 자신의(혹은 자오타오의) 시간 여행 속으로 동참시킨다. 이건 일종의 충돌이자 균열을 유발시키는 장치에 가깝다.
지아장커만큼 흥미롭게 사운드를 활용한 또 한명의 감독은 다름 아닌 이창동이다. <버닝>은 여러모로 화제였는데 ‘영화적인 것으로 뭉친 영화’라는 평이 이 영화의 미학적 가치를 단적으로 짚어줬다고 생각한다. <버닝>에 대한 설명은 따로 하지 않겠다. 이 짧은 글에서 언급하고 싶은 지점은 두 가지다. 하나는 <버닝>에도 <애시 이즈 퓨어리스트 화이트>와 기시감이 드는 사운드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창동의 영화 중 가장 적극적으로 음악(그것도 외재음)을 사용한 이 영화에서는 사건이 일어나거나 국면이 전환되거나 인물의 감정을 드러내고자 할 때 적극적으로 음악을 사용한다. 서스펜스 스릴러라는 장르의 외피에 맞게 주로 긴장을 고양시키는 방식으로 구성된 <버닝>의 음악은 심장 고동 소리를 닮았다. 상황에 따라 볼륨을 조절해가며 화면을 두드리는 둔탁한 사운드는 뼛속까지 울리며 관객을 긴장 속에 동참시킨다. 여기까지라면 그저 장르적인 활용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지만 영화가 끝나고 난 뒤 끝내 뇌리에 남는 게 어떤 탁월한 이미지가 아닌 그 둔탁한 울림이라는 점이 내 호기심을 자극했다. 어떤 순간에 음악이 제시되는지, 몇번 등장하는지 세어보기도 했지만 그런 계량적인 분석은 이 영화에서 그다지 의미 있는 작업이 아닌 듯하다. 두 영화 모두 사운드를 거의 사용하지 않던 감독이 어떤 신호처럼 (혹은 장르의 표식인 양) 사운드를 제시했고, 이 음악들이 마치 쏘아올린 신호탄처럼 겹쳐졌다는 게 중요하다. 물론 압축적으로 영화를 연달아 본 개인적 편집의 결과라 해도 할 말은 없다. 그럼에도 내겐 이 신호들이 자신의 영화적 고향으로 돌아가 뿌리를 단단히 한 중견감독들의 부지런한 시도로 보였다. 한 가지 더, 약간의 과장과 망상을 보태면 장 뤽 고다르가 사운드를 적극적으로 개입시킨 연출이 일종의 징후처럼 여기저기서 동시다발적으로 발견되는 게 신기했다. 분리된 이미지로 기억되는 영화와 끝난 뒤 사운드가 맴도는 영화. 어쩌면 영화가 주는 서사적 경험이란 그토록 미약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세 번째 고리. 근원으로의 회귀, 그리고 질문들
<만비키 가족> <가버나움> <아이카>
<버닝>에 대한 두 번째 키워드는 이 영화가 진정 영화적인가 하는 점이다. <버닝>을 보고 난 직후 나는 뼛속까지 울리는 두근거림을 느끼고 감탄했다. 하지만 연이어 다른 영화들을 보고 난 뒤 왠지 모를 앙금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영화적인 것이란 무엇일까. 단어로 쓰기 쉽지만 이 짧은 글에서 내릴 결론은 아니다. 언젠가 기회가 닿으면 풀어보길 기약하며 잠시 미뤄두고자 한다. 여기서 언급하고 싶은 건 고다르의 그림자 아래에서 지아장커와 이창동을 경유하며 영화적인 것, 작가주의의 뿌리에 대한 질문이 시작됐다는 사실이다. 올해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만비키 가족>이 그 해답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올해 칸에서 나를 고민에 빠트린 영화는 <이미지의 책>이었고, 나를 격동시킨 영화가 <버닝>이었다면, 나를 가장 즐겁고 만족스럽게 해준 영화는 <만비키 가족>이다. 한동안 자기 반복적인 소품을 선보였던 고레에다는 <만비키 가족>을 통해 숙련되고 섬세한 순항을 이어갔다. 오즈 야스지로의 실질적인 계승자라 해도 무방할 그는 자신의 오랜 화두인 가족에 대해 매끈하고 우아하며 신랄한 에너지를 동시에 품은 영화로 돌아왔다. “다듬어진 잔혹함과 기표로 둘러싸인 가족 연대기”(<리베라시옹>)라는 평은 이 영화의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짚어준다. 하나는 초창기 고레에다가 선보인 긴장감과 섬뜩함이 깔려 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것이 어디까지나 정교하게 통제되어 관객에게 큰 불편과 불쾌감을 안기진 않는다는 것이다. 요컨대 고레에다는 자신의 영화 궤적을 하나 이탈하지 않고 절묘한 균형감각으로 꿰어낸다. 다시 고다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작가’와 ‘주의’(-ism) 사이에서 간혹 길을 잃곤 하던 아시아 감독들이 다시금 자신의 영화적 태도를 분명히 하고 있다는 점이 괄목할 만하다. 경로를 조금 바꿔, 지아장커와 고레에다의 영화에서 흥미로웠던 또 다른 지점은 여성을 그리는 방식에 대해서다. 지아장커는 그야말로 비전형적이고 강인한 여성을 통해 중국의 지난 세월은 물론 자신의 작품까지 반추한다. 고레에다의 <만비키 가족>은 모든 가족 구성원에게 세세하게 애정을 드러내고 공평하게 조명하지만 아무래도 관객의 마음을 뒤흔드는 건 두 여성이다.
기키 기린의 평화로운 가운데 비밀을 품고 있는 오묘한 표정과 안도 사쿠라의 영화 전체의 공기를 뒤흔드는 깊은 호흡의 클로즈업. 소복이 쌓인 눈처럼 세월을 두른 기키 기린이야 읽어낼 수 없는(어떻게도 읽을 수 있는) 표정을 소유할 수 있다고 쳐도, 안도 사쿠라에게 허락된 몇몇 장면은 좋은 의미에서 영화의 밸런스를 깨고도 남을 만큼 압도적이다. 이들 작품이 아닌 <아이카>의 사말 예슬라모바에게 여우주연상이 돌아갔다는 건 칸이 언제나 반복하는 납득할 수 없는 결과 중 하나다. <아이카>는 러시아에 불법입국하여 부당한 처우를 받는 여성을 그린다. 출산과 함께 아이를 버리고 도망치는 여인의 뒷모습에서 출발하는 이 영화는 소위 ‘다르덴 형제의 방식’에 따라 핸드헬드 방식으로 인물의 뒤를 밀착해서 따른다. 문제는 일련의 트래킹숏이 노골적이고 천박한 방식으로 불쾌감을 유발한다는 점이다. 아이를 낳자마자 도망친 여자가 향하는 곳은 닭털을 뽑는 공장이다. 한참 뒤 모유를 먹이지 못해 고통 속에 젖을 짜내던 여자는 동물병원에서 근무하면서 개가 새끼에게 젖을 먹이는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본다. 딱히 상징이나 은유랄 것도 없는 1차원적인 연결은 매우 정치적인 메시지를 던진다. 아마도 강렬한 퍼포먼스에 손을 들어준 것으로 짐작할 수 있을 테지만 이런 비극과 전시의 포르노가 유독 비서구권을 무대로 했을 때 관용적으로 소비된다는 사실이 칸(또는 서구영화계)의 불균형한 시선을 우회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권위는 일종의 환상이다. 작가의 이름에 드리워진 권위는 맹목적인 지지를 이끌어내기도 한다. 칸영화제도 마찬가지다. 칸의 선택이 언제나 미학적 가치를 담보하는 건 아니다. 물론 칸이 좋은 영화제인지와는 별개로 이름과 세월에서 발생하는 권위를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올해의 칸은(수상 결과와는 별개로) 나름 도전적인 프로그램을 제시했고 이름값에 매달리는 ‘작가’에서 의지와 태도를 표명하는 ‘주의’로의 전환을 시도했으며 몇몇 부분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거뒀다. 이미지의 아카이브를 충돌시켜 관객을 사유 속으로 초대하는 장 뤽 고다르의 신작처럼 올해의 영화들은 여러 의미에서 불균질하고 충돌하며 균열을 선보였다. 그 점이 못내 미덥고 반갑다. 우리는 데이비드 로버트 미첼 감독의 <언더 더 실버레이크>가 관객을 얼마나 실망시켰는지를 말하는 동시에 얼마나 매력적인 괴작인지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나딘 라바키 감독의 <가버나움>의 엔딩에서 선보인 마지막 표정이 주는 충격을 되새기며 이 영화가 왜 황금종려를 놓쳤는지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알리스 로르바허 감독의 <라자로 펠리체>를 보며 빅토르 에리세 감독의 <벌집의 정령>(1973)이 떠오른 이유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다.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스리 페이스>는 또 어떤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에 비해 풍자가 부족하다곤 하지만 원 테이크로 촬영된 정교한 자동차 시퀀스는 그것만으로도 아름답지 않은가? 플랫폼의 도전에 직면한 칸영화제가 여전히 유의미하다면 영화에서 영화로 끊임없이 질문을 자아내는 분위기, 집단체험 덕분일 것이다. 다시 강조하건대 중요한 건 개별 영화의 서사나 평가가 아니다. 영화들이 서로 부딪치며 일으키는 불꽃의 궤적을 기억해주었으면 한다. 칸영화제의 영향력을 증명하듯 아마도 여기 언급된 영화들 중 상당수는 극장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 당신의 체험이 당신만의 ‘이미지 북’으로 엮이길 희망하며 짧고 아쉬운 기록을 마감한다.